〈 17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8)
* * *
"……."
“아, 혹시라도 착각은 마.”
그렇다고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잠시 말을 잃은 애쉬. 살롱 룸 안에 레이라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해서 애쉬에게 사랑에 빠진 건 결코 아니었다.
평생 동안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보지 못했고,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없던 그녀가 사랑에 빠지기엔 그와 만난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몇 번의 만남이라고 해도 다 합쳐서 두어 시간이나 됐을까 싶은 짧은 시간이 전부였고.
다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고, 언제고 사용하기 위해 가꿔온 무기를 지금 사용할 뿐인 것이다.
몇 백만 크레딧이라는 돈은 적어도 천여 명 이상을 완전 무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거금. 그 정도 가치라면 그녀의 순결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이 세상 어떤 여자도 자신의 처녀성을 이런 가격에 팔지는 못했을 것이다.
쪼르르륵. 호박빛 액체가 다시 빈 잔에 채워지고, 레이라는 그것을 다시 한 모금 삼킨다. 알코올의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뱃속까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잠시 조용히 바라보던 애쉬가 입을 열어 물었다.
“솔직히 끌리긴 하는데, 괜찮겠어?”
저만한 미녀의 순결. 어디서도 살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수백만 크레딧은 그에게도 큰돈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 돈이라는 것은 수단일 뿐이었다. 자신이 즐거워지기 위한.
그녀와 거래를 한다면 제 목적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니 딱 알맞은 사용처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것은 중요했다. 그게 단순한 만남이 됐든, 어떤 경험이 됐든.
특히나 타인과의 성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누구라도 자신의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냥 거래 대상으로 삼아 넘겨도 되겠는가.
애쉬가 그것을 묻자 레이라는 풋, 하고 작게 웃었다.
“날 걱정하는 거야? 신사적이네.”
매일같이 유흥가 밤거리를 즐기는 남자가 한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걱정하지 마. 이쪽은 당신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 않으니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가장 비싸게 팔아넘길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일지 몰랐다. 마침 상대방은 그녀의 취향에 맞는 미남자인데다 그 능력 또한 검증됐다.
또, 그쪽 경험도 많을 테니 남녀 간의 관계에 궁금증을 갖고 있던 그녀에게도 나쁜 상대는 아니었고.
사실 그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좋아. 받아들이지.”
애쉬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그녀의 진심을 느끼고 말했다. 여기서 상대방에게 더 묻는 것은 오히려 실례되는 일이다.
그런 애쉬의 답에 레이라가 눈가를 곱게 접으며 물었다.
“후후, 그래. 그래서 얼마야? 당신이 내게 매긴 가치는?”
* * *
“사장님, 커피 드세요.”
“그래, 고맙다.”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던 애쉬에게 샤인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애쉬는 작게 고맙다 인사하고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자신이 받아온 의뢰의 의뢰서를 작성하고 있으니, 그의 머릿속에 레이라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선금은 크레딧으로 줄게, 당신이 원하는 대가는 후불이야.’
전날 애쉬는 그녀와 의뢰의 조율을 마치고 아무 일도 없이 헤어졌다. 그녀가 먼저 내건 대가는 일을 끝마치면 준다는 말과 함께.
내심 기대했지만 선금을 그 자리에서 곧장 받기도 했고, 그쪽에서 그렇게 하길 원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사장님. 바깥에서 의뢰 받아오셨어요?”
“어. 이번에도 한 번 나가면 며칠은 바깥에 있을 것 같으니까 사무소 잘 지키고 있어라.”
“네. 그런데 웬일로 이렇게 연달아서 일을 하세요?”
애쉬의 말에 그가 의뢰서를 작성하는 것을 지켜보던 샤인이 물었다.
애쉬는 한번 의뢰를 해결한 뒤 못해도 며칠은 쉬다가 다음 일거리를 잡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며칠 출장을 다녀오더니 또 외부 출장 의뢰를 받아온 것이다.
애쉬가 이렇게 연달아 일거리를 받는 것은 2년 가까이를 함께한 샤인의 기억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의아한 듯한 샤인의 물음에 애쉬가 가볍게 답했다.
“의뢰인이 미인이라.”
“아….”
“…왜 진짜 믿는 거냐, 꼬맹아.”
자신의 말에 샤인이 납득했다는 듯 넘어가려하자, 오히려 애쉬가 그걸 걸고 넘어졌다.
의뢰인이 진짜 미인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열심히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냥 농담 한번 한 건데,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줄이야.
샤인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지 대충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냥 알아볼 게 생겼는데, 마침 의뢰가 잘 맞물려서 바로 가는 거야.”
“네에.”
그가 뒤늦게 설명했지만, 샤인은 믿는 것 같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에 무어라 한마디 더 하려던 애쉬는 그냥 입을 다물고 의뢰서의 작성에 집중했다. 더 얘기해봐야 자신만 이상해질 뿐이다.
“아, 사장님. 최근 의뢰가 많이 쌓였는데 그럼 그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네가 볼 때 중요해 보이는 건 좀 더 보관하고, 나머지는 그냥 폐기해.”
“네.”
잠시 애쉬가 작성하는 의뢰서를 보던 샤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서류 분류를 시작했다.
척 봐도 백여 장 이상은 쌓인 저 서류들이 전부 지난 몇 주일 새 들어온 의뢰서였다.
그것을 잠시 지켜보던 애쉬는 다시 시선을 의뢰서로 돌렸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그가 떠올린 것은 전날 레이라에게 들었던 얘기들이었다.
‘베이론’과 63구역 경찰들 간에 일종의 유착 관계가 있을 것이라던 그녀의 얘기.
그녀는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고, 애쉬에게 한 의뢰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100%로 만들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아마 ‘뱀파이어’가 ‘베이론’의 영역에 들어가 조사한다면 갱단의 대규모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의뢰한 것이겠지.
애쉬에게는 마침 잘 된 일이었다. 사실 그도 레이라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난 게 있었기 때문이다.
63구역 경찰들과 ‘베이론’이 유착 관계에 있고, 무언가 뒤가 구린 것을 숨기는 과정에서 그의 의뢰에 끼어든 것이 전부라면 차라리 괜찮겠지만, 애쉬에게는 레이라에게 들은 얘기 외에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에게 의뢰를 걸었던 ‘달의 꽃’, 정확히는 그곳의 마담인 한세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세연은 슬럼의 나태한 경찰들에게 덜미가 잡힐 정도로 허술한 인간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의뢰를 경찰들에게 들켰다는 것.
너무도 미심쩍은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레이라에게 유착 관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일부러 그의 의뢰에 유착 관계에 있는 경찰들을 끼워 넣어 무언가의 흔적을 처리한다.
애쉬는 한세연의 의뢰부터 이어진 모든 것이 의도된 것은 아닐지 한번쯤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레이라의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한세연에게 한번 화를 낸 것을 끝으로 그냥 넘어갔겠지.
그러나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의심하게 된 이상 결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갈 수는 없었다.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은 분명 선인은 아니다.
당장 유흥가 근처의 갱단들을 정리하며 제 손으로 죽인 인간의 숫자만 몇이던가.
비록 상대가 사회의 쓰레기들이라고는 해도 살인 행위는 사회 통념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피를 손에 묻힌 애쉬에게도 나름의 선은 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은 건들지 않으며, 뒤가 구린 의뢰는 절대 받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인간으로서 지키는 최소한의 선이다.
하지만 레이라의 얘기를 듣고 되돌아본 ‘달의 꽃’의 마담, 한세연의 의뢰에서는 시궁창 쓰레기마냥 썩은 내가 풀풀 풍겼다.
한세연은 그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선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그를 속이고 이용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경찰들의 의뢰 난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배신행위였다.
"아니면 좋겠지만."
애쉬는 자신의 이런 의심이 틀리길 바랐다. ‘달의 꽃’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안식처였으며, 마담 한세연은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기에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뒤가 구린 짓에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기우일 뿐이었는지.
그리고 확인 결과 만약 정말로 한세연이 그를 속인 것이라면…….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줘야겠지.”
그가 친구라 생각했던 한세연도 그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할 것이다.
* * *
다음 날.
애쉬는 새 의뢰에 들어가기 전, 정비를 위해 71구역 구석에 위치한 어느 곳을 찾았다. 멀리 있음에도 웅웅 울려오는 소리의 근원지.
“여긴 언제 와도 여전하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친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애쉬는 자신의 목적지가 여전하다는 것을 알리는 그 반가운 소리에 작게 웃으며 걸어갔다.
땅! 땅! 땅!
위이잉!
“거기! 온도 제대로 조절 안 해!!”
“옙! 죄송합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열기가 대기를 끓게 만들고, 기계 금속음과 고함소리가 울려 퍼진다.
현대에서는 찾기 힘들어진 대형 대장간.
애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이 찾던 인물을 발견했다.
“옳지! 그렇게 하란 말이야!”
연로하여 하얗게 샌 머리. 그러나 용광로의 열기에 옷을 풀어재낀 몸은 그 나이에 맞지 않게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건장하다.
어찌나 기운이 넘치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도제들에게 지시하고 있는 노인.
그가 바로 애쉬가 이곳을 찾게 만든 장인, ‘에리히 슈만’이었다.
애쉬는 발걸음을 가까이 하며 큰 목소리로 노인을 불렀다.
“영감!!”
“으잉?”
노인, 에리히 슈만은 자신의 귓가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주변을 돌아보다, 이내 애쉬를 발견하곤 눈에 불을 켜고 다가왔다.
“아니, 이 후레자식이! 또 하나 해먹은거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