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8화 (18/230)

〈 18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9)

* * *

“프흐, 영감도 여전하네. 기운이 넘치는 걸 보니 그간 잘 지냈나 봐?”

“그래, 이놈아! 그런데 너 때문에 이제부터는 못 지낼 예정이다!”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하네.”

괄괄한 목소리.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기계음이 고막을 때리는 이곳에서도 노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에리히 슈만, 그의 나이가 여든에 가까운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그 기운이 호랑이 못지않다.

“흥! 헛소리 말고 따라 와라!”

애쉬의 말에 코웃음 친 에리히 슈만이 그를 보며 외쳤고, 애쉬는 앞장서는 건장한 노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잠깐 안에 들어갈 테니 계속해!”

“예!!”

­ 치이이익!

쇳물이 부어지고 살이 익을 것 같은 열기가 피어오른다. 구식 용광로의 겉은 용암처럼 붉게 달아올라 주변의 대기가 일렁이는 게 보일 정도.

누군가는 괴롭다고 말할 수 있을 열기만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생명력이 넘쳐나는 곳이다.

에리히 슈만. 연방에서도 인정받는 마스터 랭크의 장인이 운영하는 이 ‘에리히 대장간’이야말로 슬럼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장소 중 하나였다.

에리히 슈만과 애쉬는 그런 작업장을 지나쳐 대장간 깊숙이 들어갔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덥고 시끄럽고 냄새나서 힘들었는데.

몇 분 정도 걸어 대장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무실까지 들어간 애쉬가 허락을 받기도 전에 아무 의자나 빼 앉으며 말했다.

그 예의 없는 모습을 본 에리히 슈만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곧장 애쉬를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또 내 새끼를 분질러 먹어서 온 거겠지. 이리 내놔라.”

바깥과 달리 조용한 사무실에서는 그의 목소리도 다소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세가 있었다.

애쉬는 이 그린 듯한 장인의 모습을 한 노인, 에리히 슈만에게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온 검을 넘겼다.

“부러뜨린 건 아니고, 그냥 손질 좀 해달라고 온 거야.”

“퍽이나!”

에리히 슈만은 애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손길이 필요 없을 정도라면 애쉬가 이곳까지 찾아왔겠는가?

항상 애쉬가 찾아올 때는 그가 직접 두드리고 날을 벼린 검이 엉망이 된 뒤였다.

그리고 그런 에리히 슈만의 예상대로, 그가 뽑아본 검의 상태는 이미 반쯤 폐품이 된 뒤였다.

이가 완전히 나간 검날과 온갖 흠집에 패인 자국이 가득해 성한 부분을 찾을 수 없는 검면.

이건 이미 손질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녹여서 재활용해야할 판.

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검을 매번 이렇게 만들어 온단 말인가.

탁!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에리히 슈만이 그것을 들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손질해달라고?”

“응.”

“이이….”

에리히 슈만의 물음에 애쉬가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자 잠시 화를 참는 듯한 에리히 슈만의 얼굴이 울긋불긋 달아오르더니 곧 폭발하듯 그가 포효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내가 몇 번이나 이 꼴이 되기 전에 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윽.”

콰아아! 무슨 폭풍이라도 불 듯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에 휘몰아쳤다. 애쉬는 고막이 터져나갈 듯한 그 포효에 귀를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청력이 지나치게 좋아 문제였는데, 면전에서 이런 포효를 들으니 그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

한 차례 포효를 쏟아낸 에리히 슈만은 귀를 틀어막은 애쉬를 향해 잔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이 검을 며칠 동안 만든 건지 알고도 이런 꼴을 만들어 온 거냐! 이………!”

이 나이쯤 되면 기운이 빠질 만도 한데, 어째 이 영감은 날이 갈수록 더 거세지는 것 같다.

귀를 틀어막아도 골이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인상을 쓴 애쉬는 그가 몇 분 동안 실컷 잔소리를 쏟아낸 뒤에야 겨우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릴 수 있었다.

“거, 영감한텐 미안하게 됐어. 근데 이번엔 진짜 들를 틈이 없었다니까.”

잔소리를 모두 쏟아낸 에리히 슈만에게 애쉬가 변명했다.

실제로 이번 의뢰는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계속돼서 대장간에 들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애쉬의 변명은 에리히 슈만의 분노만 돋울 뿐이었다.

“매번 똑같은 소리! 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똑같은 소릴 하지 않았더냐!”

“그때도 진짜 바빴다니까.”

사실 전에는 여유가 있었음에도 귀찮아서 안 오다 깨먹은 것이었지만, 애쉬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잔소리를 하며 화를 조금 가라앉힌 에리히 슈만이었지만, 저런 태도를 보면 다시 분노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 슈만이 애쉬를 노려봤다.

“칼질로 먹고 산다는 놈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겨가지곤 아주 기름칠을 잔뜩 한 것 마냥 이리저리 빠져나가려고 하는구나.”

“어차피 나 아니면 칼은 장식품으로밖에 안 만들면서.”

애쉬가 에리히 슈만의 매서운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대꾸했다.

요즘 시대에 칼을 실전에서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것도 중세에나 사용했을 법한 장검을 말이다.

애쉬는 진심으로 돈 좀 있다는 놈들 집안 벽걸이 장식품으로 썩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처럼 거칠게 쓰고 부러뜨려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부자들의 장식품이나 만드는 것을 무척이나 혐오하는 에리히 슈만도 공감하는 바였지만,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면 괜히 인정하기 싫어지는 법이다.

에리히 슈만은 애쉬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래. 내가 네놈이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됐다.”

진작 그럴 것이지. 괜히 화만 내면 수명도 줄어든다던데.

애쉬는 에리히 슈만이 들었다면 다시 한번 뒤집어졌을 말을 가슴 속으로 삼켰다. 만약 애쉬가 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면 다시 한참동안 성질 고약한 노인네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애쉬는 그런 얘기 대신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용무를 다하기로 했다.

“영감, 그럼 이건 다시 못 고치나?”

“네가 다시 한번 봐라. 고칠 수 있을 수준인가.”

툭. 애쉬는 에리히 슈만이 말하며 가볍게 던진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슬쩍 잡아 뽑아 날의 상태를 살폈다.

불법 개조된 총기에서 쏘아진 총탄을 쳐내고 베며 생긴 여러 흠집과 패인 홈. 단단한 사이보그의 기계 신체와 부딪히며 이가 나간 칼날.

애쉬가 봐도 고치기엔 이미 늦어버린 상태긴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는데, 역시 답이 없는 모양이다.

그럼 이건 포기해야 할 듯 한데….

애쉬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럼 새로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그거랑 비슷한 수준이면 못해도 사흘은 걸린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그럼 그렇게 되기 전에 왔어야지!”

애쉬의 말에 에리히 슈만이 다시 한번 분을 터뜨렸다. 애쉬는 슬쩍 에리히 슈만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피하며 물었다.

“내일 또 일이 잡혀 있는데 뭔가 방법은 없을까?”

“없다!”

에리히 슈만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가 덧붙였다.

“…고 말하고 싶지만 이럴 줄 알고 미리 만들어 둔 게 있지.”

“오, 진짜?”

“흥. 난 거짓말 같은 건 안한다.”

애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꼬장꼬장한 영감이 웬일로 자신을 위해 이렇게 준비를 해뒀단 말인가.

“잠깐 기다려라.”

“얼마든지!”

에리히 슈만이 애쉬에게 줄 검을 가지러 갔고, 애쉬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곧 에리히 슈만이 손에 기다란 장검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받아라.”

“그럼 어디.”

돌아온 에리히 슈만이 애쉬에게 검을 넘겼고, 애쉬는 그것을 받자마자 곧장 검집에서 뽑아들어 검을 살폈다.

약 1.4m에 달하는 서양식 장검. 무게는 어림잡아 3.5kg정도 된다.

빛깔부터가 이전에 있던 검과는 다른 게 일반적인 강철이 아닌,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강철로 만든 검보다 다소 무거운 편이었지만 애쉬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검을 살피던 애쉬는 시퍼런 예기를 발하는 검날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오오….”

“이번에 구한 R­27 합금으로 만든 물건이야. 아마 기존 것들보다는 튼튼할 거다.”

“딱 봐도 그래 보여. 날도 아주 제대로 세워놨는데?”

“이 몸이 직접 몇 시간 동안 숫돌에 갈았다.”

“영감. 내가 이번에 일 끝나고 오면 술이라도 한번 살게.”

평소에는 자신에게 신경도 안 쓰는 듯하더니 이런 걸 준비해두다니. 다음에는 비싼 술이라도 챙겨 와야 할까 싶었다.

“흥, 술은 됐으니 멀쩡할 때 가져오기나 해라, 이놈아.”

애쉬가 조명에 날을 비춰보며 검면을 손으로 쓸어보는 것을 내심 흐뭇하게 보던 에리히 슈만이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 어쩔 수 없었다니까. 아무튼 앞으론 그렇게 할게.”

“말은 잘하는구나.”

이 고마움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애쉬는 진심이었다.

애쉬는 이번만큼은 완전히 맛이 가기 전에 손질 받아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검을 집어넣고 허리춤에 찼다. 그 묵직함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한 차례 검병을 쓰다듬은 애쉬가 에리히 슈만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요새는 어때?”

“뭐가 말이냐.”

“뭐긴, 시 정부 윗대가리 눈에 찍혔다며. 아직도 그쪽은 꿍해있나?”

“헛. 그 머저리들은 알 바 아니다!”

에리히 슈만이 애쉬의 물음에 그쪽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홱 고개를 털었다.

에리히 슈만. 게으른 애쉬가 몸소 찾아온 이 노인은 연방에서도 인정받는 마스터 랭크의 장인이었다.

그것도 애쉬가 받은 서양식 롱소드 같은 도검류 뿐 아니라, 정밀부품이 필요한 첨단 총기까지도 제 손으로만 제작이 가능한 진짜 장인.

그런 대단한 장인이 어째서 이 도시 외곽의 슬럼에 와있는가.

그 원인은 시 정부와의 마찰에 있었다.

애쉬가 겪은 바와 같이 에리히 슈만은 깐깐하고 꼬장꼬장하며 그 이상으로 곧은 위인이었고, 단순히 실력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이 더러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애쉬는 그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 윗사람에게 옳은 소리라도 했다가 쫓겨난 것이겠지.

규모가 크지 않은 개인 사업가의 경우, 시 정부의 노골적인 견제나 방해에 당할 수 없다.

특히나 이런 대장간의 경우에는 시 정부에서 공격할 수 있을 약점이 너무도 많았다.

소음부터 시작해서 온갖 공해, 있지도 않은 주민들의 불만과 민원 따위를 조작하는 건 시 정부에게 너무도 쉬운 일이었고, 끝내 그들의 협잡질에 이기지 못한 에리히 슈만과 그 도제들은 이곳 슬럼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에리히 대장간’은 슬럼에 자리 잡고 다시 일을 시작하나 싶었지만, 그들이 밀려나온 슬럼에도 압제자는 존재했다.

바로 슬럼 각 구역을 지배하는 거대 갱단들. 이 71구역의 경우에는 ‘오마르의 망치’가 그것이었다.

애쉬는 에리히 슈만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과거, ‘오마르의 망치’가 아직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무렵.

에리히 슈만과 그 도제들이 운영하는 ‘에리히 대장간’은 ‘오마르의 망치’에게 점거당해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빛만큼은 지금보다도 뜨겁게 살아있었다.

언제고 기회를 틈타 방심한 적의 뒷덜미를 물어뜯을 맹수의 눈빛.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이의 눈빛이었다.

애쉬가 ‘에리히 대장간’에 있는 갱들을 공격할 무렵 몰래 무기를 만들어온 에리히 슈만과 도제들은 안쪽에서 그들을 공격했고, 끝내 ‘오마르의 망치’를 쫓아내고 자유를 되찾았다.

그때부터였다. 애쉬와 장인 에리히 슈만, 그리고 ‘에리히 대장간’의 인연이 이어진 것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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