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9화 (19/230)

〈 19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10)

* * *

‘네가 그 유명한 미친 칼잡이냐?’

‘그쪽은 누군데.’

‘난 이 대장간의 주인이다.’

‘그래서.’

‘이걸 받아라.’

갱들의 피에 젖어 있지만 귀화 같은 청안을 빛내고 있던 애쉬와, 오랜 노예생활에 비쩍 꼴고 지저분한 상태였음에도 그 눈빛만큼은 맹수처럼 빛나던 에리히 슈만.

그때 에리히 슈만은 애쉬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칼을 넘기며 ‘오마르의 망치’에게 복수를 부탁했고, 당시 해결사도 아니던 애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해결사 사무소를 개업하기도 전, 기념비적인 첫 의뢰의 의뢰인이 바로 에리히 슈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시 그런 과거를 떠올렸던 애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쯤 만들어 줄 수 있는 거야? 영감이 말한 최고의 검은.”

“것도 재료가 있어야 만들지. 네가 재료를 구해오면 내 곧장 작업에 들어가서 최고의 검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마.”

“분명 그때 의뢰 대가는 최고의 검이라는 말이 전부였는데, 이젠 나보고 재료까지 구해오라네.”

‘에리히 대장간’의 사정을 아는 애쉬였지만 괜히 한번 투덜거렸다.

첫 만남 당시 애쉬가 에리히 슈만에게 받았던 의뢰 대금은 에리히 슈만이 노예생활 중 힘겹게 만들었던 고철 검 한 자루와 언젠가 최고의 검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뿐이었다.

그러나 최고의 검을 만들어주겠다는 에리히 슈만의 약속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시 정부의 미움을 받은 ‘에리히 대장간’에 특수 금속 등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 정부에서는 자신들이 세운 기준을 넘어가는 합금의 제조와 그 재료가 되는 희귀 금속류를 철저히 관리했고, 대장간 따위에서 그것을 사용하려면 당연히 허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시 정부 고위직의 원한을 산 에리히 슈만에게 그런 허가가 떨어질 리가.

비밀리에 희귀 금속류를 구하는 게 가능했다면 몰래 만들 수라도 있었겠지만, 관련 물자를 취급하는 기업들에서 모두 ‘에리히 대장간’에 공급을 피하는 상황이었다.

에리히 슈만도 내심 미뤄진 약속에 미안함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애쉬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에게 배운 기술을 보였다. 얼굴에 철판 깔기.

“그렇다고 아무 걸로나 만든 검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냐. 그럼 기다려야지.”

“허, 영감. 나보고 뻔뻔하다니 뭐니 하더니.”

“너한테 배운 거다, 이놈아.”

“프흐, 거 좋은 거 배웠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애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나 저래나 이쪽 역시 그와는 오래 알아온 사이였고, 나이에 상관없이 이제는 절친한 친구처럼 막역한 느낌이 있었다.

애쉬와 에리히 슈만은 잠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에리히 슈만이 슬슬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나도 일하러 가야하니 너도 일보러 가봐라.”

“손님을 이렇게 쫓아내네.”

“불만이면 업무 시간 지나서 와라. 하루 종일 이 늙은이 말상대나 할 자신이 있으면 말이다.”

“그건 좀.”

애쉬가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쁜 여자도 아니고 근육질 영감 말상대나 하루 종일 할 자신은 없었다. 애쉬는 받은 검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이건 얼마나 주면 돼?”

“20만.”

새로 받은 검을 가리키며 묻는 애쉬의 말에 에리히 슈만이 대답했다. 당연히 단위는 크레딧이었다.

“전 것들보다는 확실히 비싸네.”

“당연하지. 그것도 재료값에 내 술값 조금 더한 게 전부다.”

불과 3.5kg 남짓한 검 치고는 상당한 고가였지만 애쉬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처음 듣는 재료로 만들어진 데에다 에리히 슈만은 진짜배기 장인이다. 생김새와기술뿐 아니라 사고방식마저도 그린 듯한 장인.

그런 인물이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사기를 칠 리가 없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알겠어. 그럼 항상 보내던 그 계좌로 보낸다.”

“그래.”

“다음에 또 봐, 영감.”

“다음번에도 이런 꼴로 만들어 오면 다시는 네 제작 의뢰는 안 받을 줄 알아라.”

“이번엔 진짜 바빴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잘 있어.”

“오냐.”

애쉬가 손질해달라며 가져온 폐품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에리히 슈만. 애쉬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에리히 대장간’을 벗어났다.

새로운 검도 챙겼겠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이제 다음 날, 도시 외곽의 의뢰 목적인 ‘베이론’이 위치한 74구역에 돌입하는 것만 남았다.

* * *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네가 발각된다 해도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다.”

“하, 괜한 걱정 말고 빨리 통과나 시켜.”

거구와 흉터의 남자, 빌레이 포튼의 당부에 애쉬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날 ‘에리히 대장간’에 다녀온 그는 다음날인 현재 73구역, ‘뱀파이어’의 영역과 74구역, ‘베이론’의 영역 사이에 걸친 검문소에 있었는데, 기분이 영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도 당연했다. 애쉬는 내심 ‘뱀파이어’의 보스, 레이라가 마중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정작 나온 것은 험악하게 생긴 근육덩어리인 것이다.

기대가 깨지다 못해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으니 그의 기분이 좋으려야 도저히 좋을 수가 없었다.

“흐, 그래. 그 대단한 해결사님이 신분이 없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자신을 보고 인상을 구기는 애쉬를 보며 빌레이가 비릿하게 웃었고, 애쉬는 말려 올라가려는 주먹을 참았다.

일단은 의뢰인의 부하인데 이걸 후려팰 수도 없고.

애쉬는 이 세상에 떨어지며 사라진 자신의 신분에 다시 한번 짜증을 느꼈다.

이왕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질 것이면 게임에서처럼 신분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지구에서 정당한 신분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무국적자의 입장이 되고 나니 그 불편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도시 내부에 있는 구역과 도시 바깥에 있는 74~76구역은 여타 구역들을 이동하는 것과는 그 과정이 크게 달랐다.

거대한 도시국가, 웨인 시의 국경선은 모조리 드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것은 한때 도시로 구분조차 되지 않았던 74구역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

원래 도시 바깥이었던 74~76구역이 도시로 편입되었음에도 장벽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장벽을 넘어가려면 여전히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야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국경 검문소는 입출국자들의 신분은 물론이고 기타 이력까지 엄격히 확인하는 곳.

애초에 신분이 없는 애쉬는 그곳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막말로 때려 부수고 가려면 갈 수야 있겠지만, 애쉬가 받은 의뢰는 어디까지나 ‘베이론’과의 전쟁이 아니라 조사였다. 국경 검문소를 박살낸다는 대난리를 피웠다간 위험인물로 찍혀 조사는 물거품이 될 터.

결국 그는 ‘뱀파이어’에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뱀파이어’의 간부인 빌레이 포튼이 직접 나와 그를 돕고 있었다.

“선생, 오랜만입니다.”

“오, 빌레이 씨 아닙니까. 무슨 일이시죠?”

“다른 건 아니고 인사라도 할 겸….”

빌레이는 그 흉악한 얼굴에 맞지 않게 검문소 요원에게 다가가 정중히 말을 걸었고, 검문소 요원도 그런 그를 알아본 듯 반갑게 맞이했다.

“……해서 이번에 한 친구가 바깥에 일을 보러 가야해서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얼마 전에 제 와이프도 잘 챙겨주셨는데, 어려우실 때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죠.”

“하하, 고맙습니다.”

애쉬는 잡담을 나누다 본론으로 들어간 둘을 바라봤다.

확실히 ‘뱀파이어’는 여타 갱단들과는 달랐다.

다른 갱단들도 지자체와 공권력에 로비를 하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부드럽게 다가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결국 범죄자 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공직자들은 갱들을 외부 지갑으로만, 그리고 갱들은 공직자들을 귀찮은 모기로만 취급했는데, 뱀파이어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른 듯 이런 공직자들도 반기는 것이다.

분명 저들도 처음에는 다른 갱들처럼 무시당했을 텐데, 저런 관계를 형성한 것을 보면 엄청난 돈과 노력이 필요했을 터였다.

애쉬는 지난번 유흥가 업소에서 가졌던 빌레이에 대한 인상이 조금 바뀌는 것을 느꼈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제가 먼저 찾아뵙지요.”

“흐, 안 그래도 짠 공직자 월급에 여유가 있으시겠습니까.”

“그 동안 얻어먹은 술이 얼만데, 저도 한 번쯤은 사야죠.”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얼마든지요. 아, 제가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군요. 지나가시죠.”

“그럼.”

빌레이는 검문소 요원과 대화를 마치고 애쉬에게 돌아왔고, 그와 함께 자연스레 검문소를 통과했다.

“왜 그렇게 보지?”

“아니, 신기해서. 생긴 건 공무원이고 뭐고 다 때려죽이게 생긴 놈이 선생 선생하면서 높여주는 게.”

“…어디까지나 필요에 따른 일이다.”

태연한 얼굴로 말한 빌레이였지만, 대답이 한 박자 늦는 것이 자신도 창피하긴 했던 모양이다.

애쉬는 그걸 보고 픽 웃으며 놀렸다.

“알지, 그럼.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일이었으니까. 안 그래? 덩치 선생.”

“……됐다. 난 여기까지니 앞으로는 알아서 가지.”

“오, 삐졌나? 잘 가쇼, 선생.”

애쉬가 다시 한번 놀렸지만, 빌레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검문소 방향으로 돌아갔다. 애쉬는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는 빌레이를 잠시 바라보다 그가 검문소를 통과해 73구역으로 돌아가자 자신도 발걸음을 옮겨 74구역 안쪽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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