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12)
* * *
“이, 개…!”
슥. 말단 갱은 애쉬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 표정 그대로 목이 떨어졌다.
아마 자신이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며 갔겠지. 그나마 유용해 보이는 정보를 건질 수 있었기에 편히 보내줬다.
애쉬는 말단 갱의 목을 벤 검을 한 차례 털어낸 뒤 다시 납검했다.
“뭐, 대충 알아낼 건 다 알아낸 것 같은데.”
‘베이론’의 아지트의 위치와 항시 상주하고 있는 대략적인 인원 수, 그리고 갱단 보스인 ‘방화광 루이스’의 생김새까지.
거기에 심상치 않은 정보까지 하나 얻어냈으니, 이제는 놈들의 아지트로 직접 찾아갈 차례였다.
어떻게 처리할까.
애쉬가 잠시 고민했다.
이제 의뢰를 본격적으로 처리하면 됐는데, 거기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정면으로 쳐들어가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박살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쥐새끼처럼 몰래 잠입해 원하는 정보들을 최대한 캔 뒤 쳐부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자를 선택하는 애쉬였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그가 이곳에 찾아온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조사’였다.
‘뱀파이어’의 보스인 레이라에게 받은 의뢰도 그랬고, 애쉬가 외부 출장 의뢰를 연달아 받은 이유도 ‘달의 꽃’과 ‘베이론’의 연관 관계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방화광’이라는 갱단 보스의 별명이 마음에 걸렸다.
불이라는 것은 한번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애쉬가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검 한 자루로 크게 번지는 불을 끌 수는 없었다.
말단 갱에게 얘기를 들어본 결과 ‘방화광 루이스’는 화염 방사기와 폭발물 따위를 주로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혹시라도 놈과 싸우는 도중 놈들의 아지트에 불이 붙어버리면 전투에서 이겨도 아무것도 건질 수 없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애쉬가 맡은 의뢰와 이곳까지 찾아온 스스로의 목적 모두를 잃어버리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역시 그냥 잠입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
고민하던 애쉬가 결정을 내렸다. 어디까지나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그 짐승들을 도살하는 게 아니라 여러 정보들을 조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단 원하는 정보를 얻고 나면 그 뒤에 놈들을 처리해도 됐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애쉬는 잠입에 용이한 어두운 시간대가 되길 기다렸고, 세상이 컴컴해지기 시작하자 행동을 개시했다.
*
어두컴컴한 저녁.
‘베이론’의 아지트를 둘러싼 높은 담과 그보다 좀 더 높게 세워진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갱들은 안달이 나서 죽겠다는 듯 떠들었다.
“아, 씨발. 내 차례는 언제쯤 오는 거야.”
“넌 이 새끼야, 세 시간 전에도 실컷 즐기고 왔으면서. 이젠 내 차례지.”
“흐으, 미치겠네 진짜.”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그리고 그런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망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그림자, 애쉬가 그들의 상태에 시선을 맞췄다. 안절부절 못하는 몸짓과 덜덜 떨리는 손, 그리고 초점을 반쯤 잃은 눈동자.
그것은 슬럼, 그 중에서도 음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무리의 특징이었다.
바로 약쟁이.
약 기운이 떨어진 마약 중독자들의 모습이 딱 저랬다.
애쉬가 몰래 엿듣고 있는 것도 모르는 갱들은 천박한 말씨로 잡담을 계속했다.
“킁, 나도 진짜 보스처럼 살고 싶다, 씨발. 하고 싶을 때 약 빨면서 섹스도 마음대로 하고.”
“나도 빨리 올라가고 싶어. 중간 직만 돼도 ‘그거’ 할 수 있잖아. 그게 진짜 천국이라는데.”
‘그거?’
그게 뭘 말하는 거지?
잠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애쉬가 일부러 직접 언급을 피하는 듯한 키워드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마약? 아니, 일반적인 마약이라면 저렇게 언급을 피할 이유가 없다.
이곳은 저들의 구역이었고, 갱들이 마약을 취급하는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질 곳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베이론’에서 직접 개발하거나 들여온 새로운 타입의 마약인가?
애쉬의 그런 의문은 다급히 동료의 입을 막은 갱의 행동 덕에 풀릴 수 없었다.
“야, 닥쳐 이 새끼야!”
동료의 입을 막은 갱은 불안한 눈치로 주변을 살피고는 함부로 입을 다른 갱에게 주의시켰다.
“미쳤냐? 간부들이 바깥에서 ‘그거’ 얘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뭐 어때. 우리 둘밖에 없는데.”
“간부들 순찰 돌다 떠드는 소리 걸리면 그 순간 둘 다 대가리에 빵꾸 뚫리는 거야. 난 아직 즐길 게 많아서 벌써 죽고 싶진 않다고.”
“크흐, 순찰은. 간부들도 다 거기 빠져 있는데.”
“좀 닥치라니까.”
“알겠다, 알겠어. 이 쫄보야.”
“아니, 씨발.”
지들끼리 티격태격하는 갱들.
애쉬는 그들의 욕지거리를 귓등으로 들어 넘기며 추측을 계속했다.
정황상 저들이 말하는 ‘그것’은 약 종류가 맞는 같다.
애쉬는 이곳에 찾아오기 전 말단 갱에게서 캐낸 정보를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보스와 간부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던 정보.
그 원인이 저들이 떠드는 약이 아닐까? 인간의 성향을 변하게 만들 정도면 약효가 상당히 강력한 물건일 것이다.
지금 보초를 서고 있는 말단 갱들의 상태도 꽤나 강한 약에 중독된 것 같았는데, 그보다 더한 물건이라면 인간 자체가 변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나저나 대놓고 조직 전체가 약에 절었다는 걸 보여주는군.’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애쉬가 생각했다.
이 시간에 보초를 서고 있는 말단들까지 약에 중독된 게 보일 정도면 저들이 떠드는 간부들의 상태도 알만 하다.
저런 약쟁이들이 가득한 것 같은데, 어떻게 조직이 유지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약을 미끼로 통제하고 있나?
거기에 대해서는 놈들의 아지트에 진입하고 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쉬는 잠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올랐던 나무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툭, 하고 그만한 성인이 뛰어내린 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만이 울렸다.
나무에서 내려간 애쉬는 망루에서 바깥으로 비추고 있는 불빛을 피해 담벼락에 접근한 뒤 그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어휴 씨발. 내가 말을 말지. 그러다 네 대가리 터져도 난 모른다.”
“네 근무 걱정이나 해라.”
‘지금.’
보초들은 여전히 자신들끼리 티격태격하고 있다.
애쉬는 그들이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발을 굴러 담에 매달렸고, 재빨리 안을 들여다본 뒤 마당에 나와 있는 갱들이 없자 그대로 뛰어들었다.
탓.
가까이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작은 소음과 함께 착지한 뒤 몸을 낮추고 주변을 살핀다.
바깥에서부터 느꼈지만, ‘베이론’의 74구역 아지트는 이 근방에서 비슷한 규모의 건물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큰 건물이었다.
뭐, 갱단원이 수천이면 이곳에 머무는 놈들도 천 가량은 될 테니 그 정도 숫자가 이용하려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담 안쪽은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건물의 창문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많았다.
애쉬는 몸을 낮춘 그대로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외벽에 붙었고, 2층에 불이 꺼져있는 창문을 발견. 그대로 뛰어올라 창밑의 홈을 잡고 외벽을 탔다.
‘누가 있나.’
고개만 내밀어 불이 꺼진 창 안을 들여다보니 다소 황량한 방 안에 떡하니 놓여있는 침대 하나.
그 위에 누군가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움직임에 미동도 없이 가슴팍만 오르내리락 하는 것을 보니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애쉬는 창문을 슬쩍 올려 걸쇠가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그극.
모래알 따위가 갈리는 듯한 작은 소음과 함께 창이 올라갔다. 다행히 걸쇠는 걸려 있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창을 천천히 열었고, 몸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 열리자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당겨 튕기듯 안쪽으로 진입했다.
일련의 행동에서 발생한 소음은 사실상 창을 열 때 나는 소리밖에 없었다.
드르릉…, 피유….
‘깨어나진 않은 것 같군.’
진입에 성공한 애쉬는 바로 귀를 기울여 잠든 갱의 호흡을 확인했고, 이내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자 칼을 뽑아들어 잠든 갱의 목을 쳤다.
비명 소리는 없었다.
침대 위로 핏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던 애쉬는 검을 한 차례 휘둘러 핏물 따위를 털어낸 뒤 다시 납검했다.
잠든 채 고통도 없이 죽었으니 짐승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갱에게는 나름 행복한 죽음일 것이다.
‘시간은 잘 정한 것 같군.’
잠든 갱을 처리한 뒤 방문에 다가가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확인한 애쉬가 생각했다.
따로 들려오는 발소리나 말소리는 없다. 마당에서 아지트 건물을 봤을 때 불이 켜진 방이 제법 많았는데, 전부 방 안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철컥. 애쉬는 문고리를 돌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방 안에서 구한 거울을 통해 복도 바깥을 비춰봤다.
‘따로 CCTV 같은 건 없나.’
복도는 그가 소리로 예상했던 것처럼 텅 비어있었고, 천장과 벽 쪽을 봐도 CCTV나 카메라 렌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겐 좋은 일이었지만, 이곳이 거대 갱단의 아지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다.
도시 내부에 위치한 타 갱단과의 분쟁이 없는 ‘베이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쉬는 방에서 나와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복도에는 나름 멋을 낸 것인지 잡다한 장식품 따위가 걸려있었다.
외벽만 보고도 느꼈지만, 내부를 봐도 ‘베이론’의 영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멀쩡한 건물이다.
애쉬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걸으며 말단 갱에게서 캐온 정보를 떠올렸다.
‘보통 방화광이 있는 곳이 맨윗층, 10층이라고 했던가.’
갱단뿐 아니라 대부분 조직이 그렇듯 위쪽으로 갈수록 직급이 높은 이들이 머무는 층일 것이다.
1, 2층에 위치한 방은 모두 말단 놈들이나 머무는 곳일 터. 이곳에서 구할 정보는 없을 것 같다.
애쉬는 복도에서 계단을 찾아 위층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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