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14)
* * *
애쉬는 일단 전자마약일 것으로 추정되는 데이터 팩을 챙겨 품에 넣었다. 그것은 ‘베이론’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데이터 팩을 챙긴 애쉬는 뒤이어 몰골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잠깐 자고 있어라.”
“네…?”
툭.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의 뒷목을 가격. 그대로 기절시켰다.
그도 인간인 만큼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 저 여자를 빼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데이터 팩을 챙긴 것으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의뢰 및 이곳을 찾아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런 물건을 챙겨오는 게 아니라 63구역과 베이론의 연관 관계를 찾는 것이었으니.
잠시 여자를 재운 애쉬는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면 구하든 말든 하기로 하고, 여자를 재워둔 방을 나섰다.
여전히 복도는 휑했다. 애쉬의 밝은 귀에는 여러 방 안의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대부분 바깥으로 나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인원이 상당할 텐데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 분명 이상하다. 애쉬는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통해 계속 올라갔고, 곧 마지막 층이자 ‘방화광 루이스’가 거주한다던 10층에 도착했다.
10층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듯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도 않고, 적막에 가득하다.
‘이거 방화광이라는 놈도 없는 거 아니야?’
애쉬가 생각했다. 이왕이면 ‘방화광 루이스’를 직접 만나 정보를 캐고 싶었는데, 놈이 없다면 지금은 놈의 방만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원하는 정보를 구할 수 있을 확률도 상당히 낮아졌다.
만약 이곳에서 만족할 만한 정보를 구하지 못한다면 75구역이나 76구역에 위치한 다른 아지트까지 찾아가 봐야 한다.
의뢰가 생각 이상으로 길어질 것 같은 조짐이 보였다.
‘여기 있었으면 좋겠는데.’
애쉬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주위를 잘 살폈다. CCTV는 없는지, 아니면 이 많은 방들 중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은 없는지.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일일이 방을 열고 다녀야 했겠지만, 애쉬는 누가 보아도 초인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신체능력의 소유자.
귀를 기울이면 어지간한 방음벽을 넘어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에 집중하면 독수리보다도 멀리 볼 수 있다.
게다가 그가 가진 12레벨의 도검류 숙련도는 단순히 칼질에만 도움을 주는 게 아니었다.
게임 내에서는 숙련도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특성 따위가 개방되곤 했는데, 그 중에는 단순 데미지 상승효과도 있었지만 기척을 느껴 벽 혹은 엄폐물 너머의 인영을 보여주거나 밤의 시야를 밝히거나 하는 등 유틸리티적인 효과를 지닌 것도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된 지금.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의 감각은 때때로 최첨단 기기 이상의 성능을 발휘했다.
자신의 감각을 통해 여러 방들을 살피며 이동하던 애쉬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고, 곧 복도의 끝에 방을 발견했다.
그 방의 입구는 여타 방들과 달리 커다란 두 개의 문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이곳을 찾아온 애쉬를 환영하기라도 하듯이.
애쉬는 단숨에 그곳이 ‘방화광 루이스’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 이것 참.”
뚜벅 뚜벅. 작은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조심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아지트 내의 갱들은 몇몇을 제외하곤 모조리 방에 틀어박혀 있질 않나, 보스인 ‘방화광 루이스’와 그 간부들이 사용할 것이 분명한 10층은 텅텅 비어있질 않나.
바깥에서 볼 때는 분명 수많은 방들의 불이 켜져 있었는데, 어떻게 복도에 돌아다니는 녀석이 없었겠는가.
애쉬가 이곳에 잠입한 몇 분 사이 모조리 잠들었을 리도 없고.
‘방화광 루이스’는 처음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예상대로 ‘방화광 루이스’의 방이 가까워지자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탁.
유리와 유리가 맞닿는 소리. 흔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들리는 소리다.
애쉬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 ‘방화광 루이스’의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음…. 왔나. 성격이 급하다더니, 진짜였나 보군.”
색소가 옅은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살짝은 붉게도 보이는 흰 피부.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인의 특징이다.
나이는 서른 중후반쯤 됐을까. 방의 중심에 위치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평상복 차림의 남자가 애쉬를 보고 인사했다.
“설마하니 당일에 올 줄은 몰랐는데, 미리 준비해 두길 잘했어. 반갑다, 애쉬 론모어.”
“…뭐, 나도 반갑긴 한데.”
여타 갱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애쉬의 감각은 이 남자가 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 이 남자가 ‘방화광 루이스’겠지.
애쉬도 다른 곳까지 갈 수고를 덜어서 나름 반가운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상당히 예상 밖이었다.
구역 내에서 갱단의 평판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던데, 그래도 ‘베이론’에 협력하고 있는 빈민들이 있었나.
“혹시 모르니 묻겠는데, 네가 ‘방화광 루이스’냐?”
이 남자가 ‘방화광 루이스’가 맞는 것 같았지만, 말 그대로 혹시 모르니 확인 차 묻는다.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애쉬의 물음에 남자, ‘방화광 루이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방화광 루이스’다.”
“‘방화광 루이스’. 듣던 것보다는 멀쩡하게 생겼네.”
“흐, 그런가.”
애쉬가 가볍게 툭 던지는 말에 루이스가 작게 웃었다.
애쉬의 말대로 루이스는 ‘방화광’이라는 악마적인 별명을 얻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모가 제법 잘생긴 남자였다.
탁한 눈빛과 다소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 평가를 깎아먹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분위기가 있는 미남.
애쉬는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루이스의 방 안을 살폈다. 대체로 일반적인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지만 구석에 놓인 커다란 가스통과 거기에 연결된 노즐이 눈에 들어온다.
노즐의 끝에는 분사기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연결되어 있고 앞에는 두터운 옷자락 같은 것이 개어져 있는 게, 저것들이 ‘방화광 루이스’가 애용한다던 화염 방사기와 방탄방열복 같았다.
그것을 본 애쉬가 말했다.
“보아하니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무장은 안하고 있네?”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저 답답한 걸 하루 종일 입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 그쪽과 같은 유명인과 만났는데 초장부터 불질이나 하고 끝내기엔 아깝지 않나.”
그 유명한 애쉬 론모어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다, 라고 덧붙이는 루이스. 탁한 눈빛으로 애쉬를 바라보던 그는 느릿한 손길로 애쉬를 향해 빈 잔을 하나 들어보였다.
“어때, 한 잔 하겠나?”
“아니, 짐승 우두머리하곤 겸상을 안 하자는 주의라.”
애쉬가 빈정대며 그것을 거절했다. 인간을 처먹는 놈들 두목이랑 술자리를 같이 한다?
루이스 본인이 인육을 먹는지 안 먹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밑에 있는 짐승들이 벌이는 짓거리들만 봐도 충분히 역겨운 일이었다.
그런 애쉬의 거절에도 기분 나쁜 티 없이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루이스가 말했다.
“그래? 그거 아쉽군.”
“그래도 잠깐 대화 정도는 하지. 마침 이쪽도 궁금한 게 있었으니.”
어차피 쳐 죽일 예정이긴 하지만 알아내야 할 게 많았다. 상대방이 물음에 진실로 답하든, 거짓으로 답하든 그 모든 것은 애쉬가 원하는 정보로 향하는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런 애쉬의 말에 루이스가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궁금한 거라. 뭐가 궁금하지?”
“63구역과의 관계.”
“63구역과의 관계? 아, 그게 궁금했나보군.”
애쉬의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겨우 그런 게 궁금했냐는 듯.
“그 정도야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지. 어디보자, 63구역과 우리의 관계라…. 뭐, 공급자와 소비자라고 해둘까? 흐흐.”
애쉬의 질문에 대답한 루이스가 웃었다. 애쉬는 그 웃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공급자와 소비자? 63구역에도 전자마약을 납품하고 있나?”
하지만 63구역에서는 전자마약의 낌새 같은 건 못 느꼈는데.
루이스의 대답에 애쉬가 물었다. 그에 루이스가 작게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물었다.
“오, 그 물건의 존재까지 알고 왔나? 역시 ‘애쉬 론모어’. 대단하군.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말이야.”
“알고 온 건 아니야. 여기 와서 안 거니까.”
“흐, 그래? 그럼 멍청한 아랫놈들이 떠들어댔나 보구만.”
교육을 시켜도 멍청한 놈들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지.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사실상의 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는 ‘베이론’과 63구역이 전자마약을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63구역과 ‘베이론’, 둘의 거래 사실은 맞췄지만 애쉬의 말에는 한 가지 틀린 점이 있었다.
자신의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신 루이스가 그것을 지적했다.
“63구역과 우리가 전자마약을 주고받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틀린 게 있어, 애쉬 론모어.”
“틀린 게 있다?”
“바로 공급의 주체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이 말이지.”
“…뭐?”
애쉬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베이론’에서 63구역에 전자마약을 넘기고 있는 게 아니라, 63구역에서 ‘베이론’에게 전자마약을 공급하고 있었다고?
그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고 있을 시 정부의 공권력이 무엇 때문에 전자마약 제작 같은 흉악 범죄를 저지른단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나? 63구역의 공권력이 전자마약을 제작하고 있다고?”
“흐흐, 글쎄. 나는 놈들이 누군지 모르지. 어쩌면 공권력이라는 놈들도 꼬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이쪽은 그냥 목줄 매인 개 신세가 돼서 끌어가는 대로 끌려갈 뿐이야.”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방화광 루이스’. 그는 혼란에 빠진 애쉬를 두고 말을 계속했다.
“아마 2년 전이었나? 그때였지, ‘헤븐즈 게이트’를 얻은 건.
정말 대단하더군. ‘헤븐즈 게이트Heaven's Gate’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굉장했어.”
어느 날 부하 놈이 가져온 전자마약, ‘헤븐즈 게이트’.
신경 인터페이스를 통해 뇌의 호르몬을 조작. 어떤 마약보다도 대단한 쾌락을 선사하는 그 물건은 이름처럼 천국으로 향하는 문만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헤븐즈 게이트’는 어떤 마약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쾌락을 주는 만큼 그 중독성마저도 여타 마약들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이름이 천국의 문이라고? 아니, 그것은 천국으로 가는 문이 아니라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문이었다.
‘헤븐즈 게이트’는 그것과 접촉한 루이스와 ‘베이론’의 앞날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총 오백 개 정도 됐나. 궁금증에 사용해본 것들이 다 떨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
모든 전자마약은 소모품이었다. 한 차례 사용하고 난 뒤에는 데이터 팩의 모든 데이터가 사라지는.
“처음에는 괜찮더군.”
다 떨어진 직후에는 약간의 아쉬움만을 느꼈다. 아직 효과가 조금은 남아있었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얘기가 달라졌다.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
아사 직전에 이른 듯한 허기.
온몸이 벌레에 갉아 먹히는 것과 같은 환상통.
어떤 마약으로도 뒤늦게 찾아온 그것들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헤븐즈 게이트’뿐.
다른 마약의 과도한 복용으로 사망하는 간부들이 속출하고, 루이스 본인도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런 와중 필사적으로 ‘헤븐즈 게이트’를 구해온 부하를 찾았지만, 그 부하는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래.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약 중독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자주 들리는, 아주 뻔한 얘기였다.
마약을 사용해 본 적 없는 일반인에게 마약을 공짜로 공급한 뒤, 공급을 끊는다. 그리고 죽을 것처럼 절박할 때 나타나 판매하는 것이다.
마약상들은 흔히 그 과정을 ‘작업’이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베이론’이라는 거대 갱단이 거기에 걸린 것.
이미 다른 마약을 생산, 정제하고 있는 ‘베이론’이었지만, ‘헤븐즈 게이트’의 약효가 다른 마약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작업을 당했구나 싶었지만, 깨달은 것은 이미 늦은 뒤.
불과 며칠. 정말 짧은 시간에 불과했으나 그 짧은 시간은 루이스의 생에 있어서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차라리 목숨을 끊을까 고민했지. 내 불에 스스로 불타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더군.”
그렇게 루이스가 진심으로 자결을 생각하던 어느 날. 그에게 연락이 하나 왔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