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18)
* * *
한 순간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다행히 몸을 돌려 착지하여 볼품없이 바닥을 구르진 않았지만, 그 충격의 여파는 뚜렷했다.
흐흐, 어떤가. 제대로 설 수는 있겠나?
화르륵. 애쉬가 폭발에 휩쓸린 것을 본 루이스가 화염방사기에 작게 불을 피워 올리며 물어왔다.
“그래, 졸렸는데 덕분에 정신이 확 드네.”
루이스의 물음에 잠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애쉬가 몸을 일으켰다. 데미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몸을 못 움직일 수준은 아니다.
다만 생각이 바뀔 계기로는 충분했다.
몇몇 갱들이 이곳에서 빠져 나간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조건 단기결전으로 끝내야 했다.
역시 애쉬 론모어! 그 유명한 해결사답군!
“후우….”
놀리듯 애쉬의 풀네임을 부르는 루이스. 숨을 한 차례 고른 애쉬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잘못하면 출고 며칠 만에 또 부러뜨려 먹을 수도 있겠는데.’
그럼 영감한테 잔소리 좀 듣겠군. 시뻘게진 에리히 영감의 얼굴을 떠올린 애쉬가 픽 웃고는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다시 놀아보자! 애쉬 론모어!!
방에서 대화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애쉬와 방독면 안에 위치한 루이스의 눈이 마주쳤다. 애쉬가 그를 보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래는 못 놀아줄 것 같은데.”
쿵! 바닥을 찍은 애쉬의 발이 그의 몸을 폭발하듯 앞으로 발사했다. 금이 간 다리에 무리가 오는 행동이었지만 단기결전을 결심한 이상 감수한다.
애쉬가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을 본 루이스가 화염방사기에서 불기둥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간부들의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안되지, 안돼!!
‘안되긴.’
루이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불기둥을 측면으로 피한 애쉬가 생각했다.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중기관총의 총구가 탄환을 쏟아낸다.
이걸 피하면 다시 화염방사기가 쫓아올 것이었다. 지난 몇 분가의 대치는 계속해서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쳐내며 앞으로 더 들어간다!
째애앵!!
쳐내…?
놀란 ‘베이론’ 간부의 목소리. 비명을 지르는 검과 함께 애쉬의 손아귀가 울렸다.
탄환은 제대로 쳐냈지만 애쉬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야.’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는 분명 더 잘할 수 있었다.
그저 힘과 속도로만 해결하려 하지 말고, 운동에너지를 날을 타고 흘려보낸다.
다시 한번.
째애앵!
다시.
째앵!
다시.
쨍!
끝없이 가속한 사고속도. 애쉬는 느려진 세계 안에서 날아오는 총탄들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검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끝에 탄환을 받을 때의 소리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채앵!!
이거다.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받아쳤을 때와 달리 확실히 맑고 가벼워진 소리. 애쉬는 그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몸은 고통을 호소했다. 금이 간 다리는 무리를 해서 그런지 점차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고, 다시 한번 폭발에 휩쓸린 탓에 입에서는 약간의 피 맛이 감돌았다.
폭탄의 충격파에 흔들린 머릿속에서는 어지러운 느낌도 돌았지만, 그럼에도 웃음이 나온다.
애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하하하핫!”
어쩌면 검이 부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틀렸다. 처음부터 그가 갖고 있는 힘과 기술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쉽잖아!”
그는 이 순간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아니,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을 좀 더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여태까지는 현재 위치에서 나아갈 필요가 없었기에 정체되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지금 이 위기야말로 하나의 기회였다. 스스로가 한 발짝씩 나아가는 게 느껴진다. 그 쾌락에 애쉬가 외쳤다.
“더! 더 쏴라!!”
이, 미친 새끼가!!
정면에 선 간부들이 방아쇠를 당겨 총탄의 비를 쏟아낸다. 그럼에도 애쉬는 계속해서 한 발짝씩 나아갔다. 자신을 향해 점차 가까워지는 애쉬를 본 어느 간부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있을 수 없어!! 이건 중기관총이라고!!!
있을 수 없다고? 그럼 지금 보고 있는 건?
애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둘의 사이 불과 몇 미터.
놈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푸화아아악!!
이쪽이 먼저다! 애쉬 론모어!
살이 익는 것 같은 열기가 옆에서 덮쳐들었다. ‘방화광 루이스’의 화염방사기였다.
“이 망할! 귀찮게 하기는…!”
애쉬는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섰다.
한 놈의 목을 더 딸 수 있는 아까운 기회를 놓쳤지만 괜찮다.
요령을 알았으니 다시 한번 가까이 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게다가 놈들의 탄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타, 탄이 다 떨어졌다!
뭐?!
이쪽도 거의 다 썼어…!
죽은 간부를 제외하고 남아있던 넷 중 하나의 총이 틱틱 공이 울리는 소리만 내기 시작했다. 탄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흐흐, 그러니까 칼을 썼어야지.”
나처럼 칼을 쓰면 탄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상황이 점차 자신에게 유리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애쉬가 간부들에게 말했지만, 상대방에겐 화를 낼 여유조차 없었다.
이미 그들도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 탄이…!
어느 간부가 루이스를 불렀지만 그라고 해서 이렇다 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루이스가 화염방사기로 접근을 막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왔다.
점화기가 과열되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을 뿐더러, 화염방사기는 연료 소모가 매우 빠른 무기. 이미 연료통의 연료도 찰랑거리며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루이스가 탄이 떨어졌다는 간부에게 외쳤다.
탄이 없으면 폭탄이라도 들고 달려들어!!
이곳에서 애쉬 론모어를 놓친다? 그럼 분명 그들에게도 피해가 올 것이다.
어쩌면 다시 한번 ‘헤븐즈 게이트’의 부작용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런 루이스의 명령에 간부가 당황해 물러섰다.
예?! 그건…!
그냥 자살행위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실행자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간부는 루이스의 말에 당황해 그를 바라봤지만, 루이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오로지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그리고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간부라도 불태워버리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헤븐즈 게이트’에 중독되기 전, 불의 악마라고도 불렸던 ‘방화광 루이스’의 진면목이었다.
루이스의 명령에 간부는 주춤주춤 한 발짝씩 움직였다.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 또한 ‘헤븐즈 게이트’의 중독자였으니까.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다시 한번 맛보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타박, 타박, 타다닷!
한 발짝씩 떨어지던 간부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뜀박질이 되었다. 그는 품에서 꺼낸 폭발물에 점화하고는 애쉬를 향해 달려왔다.
내달리는 발걸음에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목소리가 더해지고, 루이스의 번들거리는 눈이 희열에 젖었다.
으아아악!!
그래! 그거다!!
애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간부와 그것을 지켜보는 갱들. 그러나 애쉬에게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달려와서 누가 당해주겠어?”
사악.
단 한번. 예리한 칼로 종이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한 순간에 그어진 십여 번의 참격.
간부는 목이 떨어졌으며, 그가 들고 있던 폭발물들의 불붙은 심지는 모조리 잘려나갔다. 그냥 개죽음이 된 것이다.
나자빠진 간부의 시체를 본 루이스가 화염방사기를 그 시체로 향했다. 심지가 없다면 바깥에서부터 화염으로 뒤덮으면 된다. 그런 생각이었다.
“어딜.”
하지만 비슷한 짓거리에 한 번 당했던 애쉬가 같은 것을 또 당해줄 리가.
화르륵!
화염방사기에서 불이 뿜어졌지만 애쉬는 이미 그 자리에서 벗어난 지 오래.
콰아앙! 불붙은 간부의 시체는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나 사방에 흩뿌려졌다.
“끝이네?”
폭발에 몸을 피했던 애쉬가 씩 웃는 얼굴로 루이스와 간부들을 바라봤다. 하나가 더 죽으며 균형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아직까지 살의에 번뜩이는 루이스의 눈과 달리 현실을 직시한 간부들의 눈에는 절망이 차올랐다.
살아있는 간부 셋의 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보스인 루이스의 연료 또한 마찬가지.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확정된 죽음밖에 없다.
애쉬가 반쯤 손을 놓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에 간부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그것을 본 루이스가 소리쳤다.
어차피 이곳에서 놈을 놓친다면 또 그 빌어먹을 지옥행이다! 차라리 폭탄을 끌어안고 뒈져라!!
‘지옥행’. 그 단어 하나에 간부들의, 아니 이곳에 있는 갱들 전체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헤븐즈 게이트’의 부작용. ‘베이론’의 갱들은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천국에서 추방되어 지옥으로 떨어지는 지옥행이라고.
마, 맞아. 그 지옥에 다시 떨어지느니 난 그냥 죽겠어.
한 간부가 말하자 다른 간부들도 거기에 동조했다.
그래, 차라리.
그냥 저 놈을 죽여 버리면 될 거야…!
간부들의 눈에 절망을 대신해 세 가지 감정들이 가득 차올랐다. 분노와 자포자기, 그리고 더 큰 공포.
그것을 본 애쉬가 생각했다.
‘대체 그게 어느 정도 길래?’
분명 방금 전까지는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분위기였으나, 지옥행이라는 말 하나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기에 저런 쓰레기들조차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거지?
분위기가 반전되자 루이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방독면과 화염방사기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외쳤다.
“크하핫! 그래! 여기서 다 같이 죽자!! 너희도!!”
루이스가 주변에 있던 갱들을 불러들였다. 무장이 충실했을 때도 어떻게 하지 못했는데, 지금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렇기에 그들 중 상당수는 그런 말에 따르지 않고 물러났으나, 반대로 상당수는 동조해 애쉬를 향해 모여 들었다.
아마도 따르지 않은 자들은 ‘헤븐즈 게이트’의 중독자가 아닐 것이고, 따르는 쪽은 중독자일 것이다.
애쉬는 자신에 대한 공포에 움찔거리면서도 그보다 더한 ‘지옥행’의 공포에 떠밀려 움직이는 갱들을 바라봤다.
무기를 버리고 폭발물 몇 개만 들고 있는 간부들과 권총, 나이프 따위를 뽑아들고 있는 갱들은 다소의 부상이 있는 지금의 상태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은 그냥 목숨을 내던지는 행위였다.
“그런다고 봐주진 않아.”
처음부터 이곳을 완전히 박살낼 생각이었으니까. 애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놈들을 보며 날에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루이스가 외쳤다.
“놈을 죽여라!!”
“으아아아아!!”
“죽여!!”
“찢어 죽여 버려!!”
도망친 갱들을 제외하고도 백에 가까운 갱들이 애쉬를 향해 좀비 떼처럼 달려들었다.
애쉬도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며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목. 팔. 다리. 손목. 어깨. 가슴. 허리.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인간을 두부처럼 토막 낸다. 애쉬가 지나가는 곳에는 몸이 토막 난 시체가, 혹은 팔 다리가 떨어진 갱이 울부짖으며 바닥을 굴렀다.
그럼에도 갱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겐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까.
제발 한 대만 맞아라, 한 번만 꽂혀라. 그런 열망에 찬 눈빛들이 애쉬를 향했지만 그런 바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백에 가깝던 갱들의 숫자는 어느새 반. 반의 반. 그리고 또 그 반으로 줄어들었고, 곧 세 명의 간부들조차 쓰러지자 루이스와 애쉬.
단 둘 만이 멀쩡히 서있게 되었다.
“으으….”
“살려, 줘….”
사방에서 사지가 떨어져나간 갱들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양쪽 모두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후우…. 피곤한데 슬슬 마무리 하자.”
애쉬가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피 중 그 자신의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다고 해도 살짝 스쳐 상처 난 곳에서 흐르는 한 방울 정도.
사실상 백여 명을 상대하며 입은 상처라곤 그것 하나가 전부였다.
루이스는 그런 애쉬를 바라보며 웃었다.
“흐흐흐, 모두 나보고 괴물이라고들 하더니, 여기 나보다 더한 괴물이 있었군.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어.”
“괴물? 적어도 나는 인간은 잡아먹지 않는데.”
“하지만 우리 중 누구보다도 많은 인간을 죽였겠지.”
애쉬의 말에 루이스가 대답했다. 당장 이곳에서 죽인 숫자만 300에 달한다. 그럼 지난 시간동안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이 살해한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못해도 네 자릿수. 일천이 넘어갈 터였다.
그만한 숫자의 인간을 죽인 남자가 괴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애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루이스를 향해 걸었다. 루이스도 그를 향해 걸어오며 상의를 풀어 헤쳤다.
그의 상체에는 척 봐도 폭발물처럼 보이는 원통형 물체들이 빼곡히 감겨있었다.
“어때. 멋지지 않나?”
“…미친 새끼.”
끝내 애쉬가 질린 듯 대답했다. 온몸에 저런 것을 감고 있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불을 다루는 놈이 저런 걸 감고 있다니. 별명이 방화광이라더니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그런 기색의 애쉬를 보며 웃던 루이스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라이터에 불을 피우며 말했다.
“흐흐, 시작과 끝은 화려해야지.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난 너 같은 미친놈이 아니라서.”
“그런가? 뭐, 아무래도 좋아.”
루이스가 몸에 감고 있는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최후에 다다라 타오르는 자신의 생명력을 보여주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 의뢰는 잘 부탁하지.물론!”
여기서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면 말이야!!!
콰아아아앙!!!
그의 광기어린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
불꽃을 동반한 충격파가 반경 수십 미터를 휩쓸며 일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