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28화 (28/230)

〈 28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19)

* * *

“…진짜 위험했네.”

­ 부스스스, 쿠웅.

돌덩이를 치워내자 흙먼지가 쏟아진다. 피에 잔뜩 젖어있던 상태에서 흙먼지를 뒤집어 쓴 애쉬는 봐주기 힘든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화광 루이스’의 자폭은 애쉬로서도 몸을 피하는 것 외에는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최후의 한 수였다.

고통을 참고 못 참고 이전에 부상당하고 지친 몸으로는 평상시처럼 움직일 수 없었고, 수십 갈래로 나뉘어 불타고 있는 도화선은 하나라도 놓친다면 기껏 잘라서 막아놓은 다른 폭탄들까지 연쇄적으로 터트릴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루이스도 필사적으로 도화선을 지킬 텐데, 그것을 정면에서 뚫는 위험을 부담하기보단 그냥 자신의 몸 하나만을 빼내는 쪽이 훨씬 안전했다.

애쉬는 그냥 루이스를 직접 처리하는 걸 포기하고 그의 자폭을 피해 몸을 던졌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다.

안 그래도 건물의 중심이 터져서 기울던 아지트는 마지막 자폭과 함께 폭삭 무너졌지만, 애쉬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그 여자는 죽었겠군,’

몸에 엉겨 붙은 피와 흙먼지들을 털어내던 애쉬는 자신이 잠시 잠재워 뒀던 여자를 떠올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재우기보다는 차라리 입단속만 시켜놓고 오는 게 살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그냥 뒀다면 고깃덩이가 되어 ‘베이론’의 미치광이들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을 테지만, 괜히 자신의 판단 때문에 여자가 죽은 것 같아 괜히 뒷맛이 찜찜했다.

잠시 속으로 여자에게 애도를 표한 애쉬는 사격과 폭발에 휩쓸려 여기저기 구멍 뚫리고 너덜너덜해진 코트 안주머니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상태는 멀쩡하고.”

그것은 손바닥만 한 데이터 팩, ‘헤븐즈 게이트’와 ‘방화광 루이스’가 넘긴 USB였다.

둘은 흠집 따위가 조금 생기긴 했으나 대체로 멀쩡한 상태였는데,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그것들이 들어있는 안주머니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고생을 했는데 결과물마저 부숴먹는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챙겨온 증거품들의 상태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애쉬는 그것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꼴을 되돌아보았다.

역할 정도로 진한 피비린내와 연이은 폭발들 때문에 찢어지고 난리가 난 옷차림.

이런 상태로 검문소를 통과하려다 잡혀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 돌아가기 전에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애쉬가 어두운 하늘을 올려봤다. 새까만 하늘에는 별도 없이 흐릿한 달 하나만 자리하고 있었다.

*

“…갈 때와는 꼴이 전혀 다른데?”

“닥치고 안내나 해.”

다음날.

연락을 받고 검문소를 통과시켜주기기 위해 찾아온 빌레이의 말에 애쉬가 대꾸했다.

빌레이의 말대로 애쉬의 차림은 전날 74구역에 발을 들이기 전과는 전혀 달랐다.

낡아빠진 셔츠와 구멍 뚫리고 너덜너덜해진 코트. 그리고 일부러 데미지를 준 것인지, 아니면 진짜 찢어진 것인지도 모를 청바지까지.

분명 깔끔한 차림으로 들어왔었으나 불과 하루 만에 반쯤 거지꼴이 되어 돌아가고 있다.

혹시 몰라 슬쩍 냄새를 맡아본 빌레이가 말했다.

“다행히 냄새는 안 나는군.”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깔끔하고 냄새나지 않는 것들로 고르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찾아다녔다. 그런데 냄새가 났으면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빌레이의 말을 무시한 애쉬가 발걸음을 옮겼다. 검문소를 통과한 뒤, 곧장 뱀파이어의 아지트로 향해 물건을 전달하고 한동안은 쉴 생각이다.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의뢰를 벌써 완수했나?”

“했으니까 널 불렀겠지.”

애쉬 론모어의 사전에 의뢰 포기란 없다. 그가 의뢰인을 다시 찾는 것은 언제나 의뢰를 끝마쳤거나, 특이사항이 있을 때 단 둘 뿐이었다.

애쉬가 품속에서 자신이 구해온 USB와 데이터 팩을 꺼내보였다. 그것을 본 빌레이가 눈을 빛냈다.

“그것들이 ‘베이론’과 공권력의 유착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인가 보군.”

“그래.”

“어떤 내용이지?”

“USB는 대충 얘기만 들었지 나도 몰라. 그리고 데이터 팩은….”

순간 애쉬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헤븐즈 게이트’라는 전자마약의 존재. 이걸 이 녀석한테 말해도 되나?

잠시 고민해봤지만 역시 이 녀석에게까지 말할 건 아닌 것 같았다.

대답하려던 애쉬가 곧장 방향을 틀었다.

“뭐, 궁금하면 너네 보스랑 같이 듣던가.”

이 물건들의 주인이 될 것은 애쉬가 아니라 ‘뱀파이어’의 보스, 레이라였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같이 들어도 되겠다 싶으면 알아서 허락하든 말든 하겠지.

어차피 그녀에게 직접 설명도 해야 했으니 그때 같이 들으면 될 일이었다.

“…알겠다.”

그런 애쉬의 말에 빌레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흉악한 범죄자상의 얼굴과 달리 머리는 돌아가는 놈이라 애쉬의 그런 생각을 대충 읽은 것 같았다.

둘은 곧 검문소에 도착했고, 빌레이가 나섰다.

“어제 나갔던 사람과 돌아왔습니다.”

“아, 예. 통과하시죠.”

애쉬는 빌레이와 함께 검문소를 통과했다. 그리고 곧 그가 몰고 온 차량에 올랐다. 차량의 운전석에는 빌레이의 부하로 추정되는 남자가 한 명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갱이 물었다.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빌레이 씨.”

“어디로 가지?”

“의뢰 결과부터 보고 해야지.”

빌레이의 물음에 애쉬가 답했다. 그것을 알아들은 빌레이가 부하 갱에게 말했다.

“바로 아지트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차가 출발하고 창밖의 풍경이 흘러간다. 애쉬는 차를 몰고 있는 부하 갱이나 빌레이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애쉬에게 빌레이가 말을 걸었다.

“보스하고 뵐 건데, 그렇게 입고 갈 건가?”

“뭐 어때. 어차피 오늘은 날도 아닌데.”

애쉬가 대답했다. 어차피 USB의 보안을 뚫으려면 시간도 좀 걸릴 것 같은데다, 피곤하기도 해서 그녀의 즐거운 시간을 갖기에 좋은 날은 아니었다. 엄청 큰 부상은 아니지만 몸을 회복할 시간도 조금 필요했고.

‘뱀파이어’에도 해커 같은 인력은 있을 테니 며칠 정도 쉬고 오면 USB의 보안도 다 뚫어놓겠지.

그 뒤에 USB 내용물을 확인하여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고, 의뢰의 착수금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 그쪽이 괜찮다면야.”

빌레이는 애쉬가 말하는 그 날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대답에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그렇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애쉬에 의해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차는 ‘뱀파이어’의 아지트가 위치한 72구역에 도착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차를 몰던 부하 갱이 말했다. 그에 애쉬가 정면으로 시선을 향해 ‘뱀파이어’의 아지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시 안이라 그런가, 확실히 여긴 느낌이 다르긴 하네.’

‘뱀파이어’의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그것이 일개 갱단이 사용하는 아지트라고 생각하긴 힘들 정도로 멀끔하고 좋은 건물이었다.

반짝이는 창으로 뒤덮여있는데다, 그 층수는 못해도 30층은 되어 보인다. ‘베이론’의 아지트도 각 층의 층고가 높아서 결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뱀파이어’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외관이 차원이 달랐다.

말하자면 ‘뱀파이어’의 아지트는 이 슬럼이 아니라 저 도시 안쪽 테크노밸리에나 위치해 있을 법한 건물이었다.

“그럼 저는 주차 후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내리지.”

부하에게 대답한 빌레이가 말했고, 애쉬도 차에서 내렸다.

‘뱀파이어’의 아지트에는 멀쩡한 주차장도 있었는데, 거기에도 차량들이 제법 많이 차있어 다시 봐도 갱단의 아지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회사 건물 같은데.”

“그래? 그거 다행이군. 보스가 양아치 아지트처럼 보이는 걸 싫어해서 말이지.”

애쉬의 말에 빌레이가 대답했다.

빌딩의 디자인이나 외부 구조 같은 것도 레이라의 감각에 의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애쉬가 과거 한번 쳐들어갔던 ‘오마르의 망치’의 아지트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말 관리가 잘 되고 있다.

“따라와라. 보스의 사무실까지 안내하지.”

“어.”

빌레이가 앞장서 걷고, 애쉬가 그 뒤를 따랐다. 둘은 회전문을 지나 금방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애쉬의 눈에 깔끔하고 널따란 로비가 들어왔다.

“아, 부사장님! 어서 오세요!”

“그래, 고생해.”

둘이 건물에 들어서자 로비의 카운터에 자리하고 있는 여성 직원이 밝게 인사했다. 아무리 봐도 일반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인사에 빌레이도 가볍게 인사하곤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를 뒤따르던 애쉬가 빌레이를 부른 명칭에 의문을 표했다.

“부사장님?”

“‘뱀파이어’는 일반적인 기업처럼 운영하고 있다. 형식상 내 직책은 부사장이지.”

“…부사장이라고? 네가?”

“어울리지 않는 건 나도 안다. 그래서 외부에서 주로 활동하고, 본사엔 자주 오지 않는 편이야.”

애쉬가 빌레이의 겉모습을 다시 한번 살폈다. 여전히 흉악하게 생긴 얼굴.

웬일로 정장차림을 하고 있는가 했더니, 이곳 아지트…인지 본사인지 모를 곳에 찾을 때는 형식을 차려 활동하는 모양이었다.

­ 띵! 1층입니다.

간부용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빌레이가 먼저 올라타고 애쉬가 뒤따라 타며 물었다.

“그럼 저 여자 같은 직원들은 여기가 갱단 아지트인 걸 모르나?”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진 않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빌레이의 얼굴만 봐도 평범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뱀파이어’의 간부들은 대부분 이곳 건물에 상주하곤 했는데, 그들 또한 숨기지 못하는 기질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보스이자 사장인 레이라의 명령에 의해 저런 일반인들을 건드는 것이 엄금되었고, 약간의 두려움만 참는다면 이곳처럼 안전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슬럼에서 찾기 힘들었으니까.

애쉬는 그런 설명에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여태껏 봐왔던 갱단들은 모두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깡패집단에 불과했는데, 이곳은 좀 다르다.

“저런 일반인들은 얼마나 되지?”

“3분의 1 가까이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좀 많네.”

“…많지.”

어디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갱단을 꽤나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 띵! 32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알림과 함께 멈추었다. 말없이 빌레이가 앞장섰다.

애쉬는 계속해서 내부를 구경하며 따라갔고, 곧 가장 큰 사무실 하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빌레이가 그곳의 문 옆에 달린 인터폰을 들고 어느 버튼을 눌러 안쪽에 방문을 알렸다.

“보스, 해결사와 도착했습니다.”

­ 툭. 들어와.

낯익은 미성. 레이라의 목소리가 짧게 대답하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빌레이와 애쉬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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