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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29화 (29/230)

〈 29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20)

* * *

방에 들어서자 레이라의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애쉬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봤다.

‘제법 본격적인데.’

사무실은 고급스런 원목 가구로 치장되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사무용 책상, 책장, 접객용 테이블,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 비서 둘…….

같은 건물의 다른 사무실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만큼은 정말 누가 봐도 평범한 회사 사무실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할 모습이다.

아마 애쉬도 이곳이 ‘뱀파이어’의 아지트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냥 사무실인가보다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거기 편히 앉아. 리엔, 마실 것 좀 준비해 줄래요?”

“네, 사장님.”

읽던 서류를 내려놓은 레이라의 말에 비서 하나가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애쉬와 빌레이에게 물었다.

“두 분, 마실 것은 어떤 게 좋으신가요?”

“난 괜찮습니다.”

“이쪽은 커피.”

“네, 그럼 그렇게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부사장이라는 직위를 갖고 있음에도 정중히 답하는 빌레이와 가볍게 툭 던지는 애쉬.

리엔이라 불린 비서는 그런 애쉬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비서가 마실 것을 준비하고, 빌레이와 애쉬는 접객용 테이블 앞에 앉았다.

곧 레이라도 자신의 사무용 책상에서 일어나 애쉬와 빌레이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에 자리했다.

가까이서 그녀의 모습을 쭉 살핀 애쉬가 작게 감탄했다.

“오. 어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인데?”

기성품이 아니라 맞춤형인지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검은색 캐주얼정장.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는 흰 와이셔츠는 맨 위 단추 두어 개를 풀어놨고, 검은 정장 바지는 그 잘빠진 각선미를 살리고 있다.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갱단의 젊은 여자보스라는 느낌보다는 성공한 사업가와 같이 자신만만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애쉬의 말에 레이라도 상대방의 옷차림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들려주었다.

“그래? 당신 차림은 슬럼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인데.”

당연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칭찬은 결코 아니었다. 너덜너덜한 코트와 어디서 주워 입은 건지 잔뜩 구겨진 셔츠. 그리고 버릴 때가 지나도 한참은 지난 것 같은 빛바랜 청바지까지.

아무리 슬럼이라도 저런 건 구하기도 힘들 텐데 어디서 주워 입고 왔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런 그녀의 감상에 애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도 지금 내가 무슨 꼴인지 잘 아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지.”

“풋, 그래.”

그런 애쉬의 말에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곧 비서가 레이라의 것과 애쉬의 마실 것 두 잔을 가져오고, 둘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74구역으로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벌써 의뢰를 마친 거야?”

“어. 덕분에 고생 좀 했지.”

사실 단순한 고생 정도가 아니긴 했지만 굳이 거기까지 얘기하진 않는다. 애쉬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조만간 여기서도 들을 수 있을 걸.”

“뭘?”

“‘방화광 루이스’가 죽었다는 소식.”

“…뭐?”

애쉬의 말을 들은 빌레이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레이라가 대화하고 있는 중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그 치고 눈에 띄는 실수였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상급자, 레이라도 거기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애쉬의 말에 크게 놀라고 있었으니.

레이라는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었다.

“자세하게 얘기해주겠어?”

“물론.”

의뢰 진행 과정에 대한 보고. 보통은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만한 대가가 걸린 일이라면 할 수도 있다. 애쉬는 입을 열어 천천히 설명했다.

74구역에 들어선 직후 말단 갱 하나를 잡아 심문한 이야기.

‘베이론’의 아지트에 숨어든 이야기.

‘방화광 루이스’와의 만남. 그리고 함정.

마지막으로 수백의 갱들과의 전면전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애쉬 론모어라는 해결사가 홀로 ‘베이론’의 아지트 하나를 무너뜨리고, 그곳의 보스인 ‘방화광 루이스’와 간부들까지 처치했다는 것을.

그것은 사실상 혼자서 ‘베이론’이라는 거대 갱단을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다.

“그런 일이 있긴 했는데, 그래도 물건은 무사히 잘 챙겨왔지.”

“…사실이냐?”

“뭐, 그럼 거짓말이라도 했을까봐?”

빌레이의 물음에 애쉬가 픽 웃으며 되물었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밝혀질 일이었다.

아무리 도시 내부와 거리가 있는 74구역이라곤 하지만 ‘뱀파이어’의 영역과 딱 붙어있는 이상 소문이 도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어쩌면 벌써 퍼지기 시작했을 수도 있고.

조사를 하라고 의뢰했더니 수뇌부를 모조리 쳐 죽이고 왔다는 애쉬의 말에 머릿속을 정리하던 레이라가 물었다.

“…가져왔다는 물건은?”

“여기.”

애쉬가 품속에서 USB와 데이터 팩을 꺼내 놓았다. 루이스가 개인적으로 모아왔다는 정보들과 ‘헤븐즈 게이트’.

레이라가 눈빛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애쉬는 그녀에게 미리 경고했다.

“일단 뭔지 설명하기 전에.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얘기가 될 텐데, 들려줘도 되겠어?”

이곳에 위치한 비서들, 그리고 그녀의 측근인 빌레이까지. 그들 모두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런 물음이었다.

애쉬의 진중한 목소리에 레이라가 잠시 고민했다.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가벼운 분위기에 기분파. 그럼에도 저런 경고를 미리 한다는 것은 분명 중대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 터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 위치한 모든 이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고민하던 레이나가 비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빌레이는 남고, 나머지는 잠시 쉬었다 오세요.”

“네, 사장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비서들은 군말 없이 자리를 비켰다. 비서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주제를 넘는 정보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안위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비서들이 나가고 사무실에는 애쉬, 레이라, 빌레이 셋만이 남았다.

“꽤나 신임 받고 있는 모양이네.”

애쉬가 빌레이를 보며 놀리듯 말했다. 빌레이는 그에 뭐라 대꾸하지 않았지만, 레이라가 대신 대답했다.

“‘뱀파이어’를 거의 처음부터 같이 일궈왔으니까.”

그녀가 빌레이와 함께 일을 한 지도 거의 십년에 가깝다. 빌레이는 항상 행동대장으로서, 그녀의 오른팔로서 활동해왔기에 그런 그조차 신용할 수 없다면 레이라가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 그건 좀 부럽네.”

그 짧은 대답에서 느껴지는 신뢰에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 자신은 누군가를 저렇게 믿을 수 있던가.

그나마 그와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이 론모어 사무소의 꼬맹이 샤인이었는데, 녀석은 신뢰할 수 있는 동료라기보다는 보살펴야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사실 잘 보살피지도 않긴 하지만 말이다.

잠시 샤인을 떠올렸던 애쉬가 데이터 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그것의 정체를 말했다.

“‘헤븐즈 게이트’라고 하더라고. 이게.”

“‘헤븐즈 게이트’?”

“어.”

애쉬의 말을 레이라가 한 차례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곧이곧대로 직역하자면 천국의 문이라는 뜻이었는데, 저 데이터 팩에게 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레이라의 명민한 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헤븐즈 게이트’, 천국의 문이라는 이름을 지닌 데이터 팩.

‘베이론’과 공권력의 유착 관계. 지난 사건들에 있었던 그들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을 돌아보며 잠시 생각하던 레이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갔다. 분명 무언가의 감을 잡았다는 듯한 분위기다.

그런 표정 변화를 본 애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

“호, 이름만 듣고도 알아챈 거야?”

“…전자마약, 이라는 거야?”

돌아온 추측성 대답에 애쉬가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머리가 좋은 여자다.

갱이라고 해서 모두 빈 깡통처럼 머리에서 텅텅 소리가 나는 인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운영 방식이나 기타 특이성들을 봤을 때 나름의 수완이 있는 여자라고는 생각했었는데, 이름만 듣고 바로 맞춰낼 줄이야.

그런 레이라의 추측을 애쉬의 대답이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맞아. 그것도 꽤나 강력한 놈 같더라고.”

애쉬는 비서들이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던 얘기들을 꺼냈다.

애쉬가 그곳에서 보았던 것과 들었던 정보들.

전자마약에 의해 뇌가 맛이 가버린 ‘베이론’의 기행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인육의 가공과 섭취에 대해서.

“미친놈, 미친놈 하더니 진짜 미친놈들 집단이던데?”

“대체….”

애쉬의 말을 모두 들은 레이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만약 정말로 공권력이 그만한 거대 갱단과 유착 관계를 갖으며 전자마약의 거래를 했다면, 그리고 그 정보를 ‘뱀파이어’가 습득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이것은 정말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전자마약의 제조는 걸리는 순간 무조건 사형 이상의 극형을 받는 최악의 범죄 중 하나.

당연히 범인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자 할 것이었고, ‘뱀파이어’가 알아챘다는 게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위협을 제거하려 들겠지.

그 순간이 ‘뱀파이어’의 사상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 전, 어떻게든 놈들의 꼬리를 잡아서 머리에 총구를 겨눈 뒤 협상을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헤븐즈 게이트’라는 전자마약 하나만을 증거품으로 들고 있는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이쪽에 죄가 전가되었으면 되었겠지.

“그럼 이 USB는 뭐지?”

고심하던 레이라의 귓속에 빌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쉬가 꺼내놓은 다른 한 물건. USB의 정체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런 빌레이의 질문에 애쉬가 대답했다.

“아, 그게 전자마약보다 더 중요한 물건이야. 그쪽한테나 나한테나.”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이번 의뢰의 목적, 그리고 내가 거기까지 직접 찾아간 이유가 거기 다 들어있거든.”

이번 의뢰의 진짜 목적. 그것은 분명 ‘베이론’과 공권력 간의 연결 관계, 거기에 대한 증거품을 찾는 것.

사실 ‘헤븐즈 게이트’라는 전자마약의 존재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던 수단이었지, 공권력과 ‘베이론’이 엮여있다는 사실에 대한 물증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USB. 저것만큼은 달랐다.

‘베이론’의 보스인 ‘방화광 루이스’가 자신에게 작업을 친 흑막을 찾기 위해 2년 동안 칼을 갈며 모아왔던 모든 정보들의 집합체.

저것은 정말이지 크나큰 단서가 되어줄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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