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30화 (30/230)

〈 30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21)

* * *

“듣자하니 보안이 걸려있다고 하던데, 해커가 필요할 거야.”

“…그것도 놈이 알려준 건가?”

“어. 아주 친절하게도 가르쳐주던데.”

그 뒤엔 발밑에 폭탄이나 터뜨렸지만.

애쉬는 최후의 최후까지 화려하게 간 남자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빌레이는 그런 애쉬를 보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솔직히 믿기 힘들군.”

‘방화광 루이스’가 직접 설명까지 하며 이 USB를 넘겨줬다고? 그걸 어떻게 믿고 의뢰금을 지불하지?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빌레이의 말. 애쉬도 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애쉬야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그 억눌린 분노와 공포, 절망과 복수심을 느꼈으니 거의 믿고 있었지만, 단순히 얘기만 전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애쉬는 그런 의심에 가볍게 대답했다.

“뭐,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만일 저게 가짜라면 다시 ‘베이론’의 영역으로 넘어가 놈들의 아지트를 뒤지거나 의뢰를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가짜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루이스가 보였던 감정들에서는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처음부터 이걸 건넨 직후 잔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먼저 그쪽에서 확인해보고 나중에 연락 주든지 해.”

“괜찮겠어?”

“물론.”

레이라의 물음에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USB의 내용을 먼저 확인하는 것은 당연히 저쪽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USB 내용물의 존재를 숨길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애쉬는 레이라에게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잔금을 떼어먹거나 계약을 어길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만약 USB의 내용물이 설명 들었던 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이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유능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굉장히 유능한 해커 하나가.

애쉬와 레이라, 빌레이는 그 후로도 몇 분간 74구역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곧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대가는 기대하고 있지.”

“…이 안에 든 정보가 내가 원하는 게 맞다면, 얼마든지 기대해도 좋아.”

‘대가’라는 말에 레이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도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애쉬에게 계약의 대가를 치룰 날을.

대가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모르는 빌레이만이 약간의 의문을 나타냈지만, 다른 둘은 굳이 그런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조만간 연락이 갈 거야.”

“그래. 그럼 그때 보지.”

레이라의 인사에 대답한 애쉬가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떠났다.

이제 이 빌어먹을 옷 쪼가리들을 벗어던지고 멀쩡한 꼴로 돌아갈 때다.

* * *

­ 딸랑딸랑.

“나 왔다.”

“다녀오셨어요, 사장님! 말씀하셨던 것보다 일찍 오셨네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애쉬가 사무소에 들어서자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던 샤인이 고개를 번쩍 들며 인사했다. 애쉬는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꼬맹이를 보며 말했다.

“어. 생각보다 빨리 끝났지. 근데 넌 뭐가 그렇게 바쁘냐.”

“이제 월말이니까요. 그래서 사무실을 전체적으로 청소하고 있었어요.”

“…너도 참 부지런하다.”

정말 성실 그 자체인 대답. 애쉬는 자신이 직원을 잘 뽑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샤인이랑 있으면 때때로 그 자신이 글러먹은 인간처럼 느껴지곤 한다.

“적당히 하고 쉬어. 나도 한동안 쉴 거니까.”

“네! 고생하셨어요.”

애쉬는 괜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3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제 며칠 동안은 회복 시간도 가질 겸 적당히 틀어박혀서 뒹굴거릴 예정이었다.

*

“그래, 이걸로 맛있는 거나 사먹어라.”

샤인은 함부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님에게 불평을 표하지 않고 웃으며 사무실 밖까지

배웅했다.

소년의 손에는 큰돈은 아니지만 슬럼 사람들의 하루 일당 정도는 될 팁이 쥐어져 있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밝게 인사한 샤인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온 사무실에는 정리해야 할 서류들이 제법 쌓여 있었는데, 모두 방금 왔다 간 손님의 궁금증이나 의심 따위를 풀어주기 위해 예전의 자료들을 꺼내든 것이었다.

이제 그 손님도 갔으니 깔끔하게 정리하고, 몇 시간 뒤 예약한 손님을 맞아야 한다.

“흐흥.”

샤인은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어지러진 책상 위를 정리했다.

방금 다녀간 손님은 64구역 유흥가에서 영업을 하는 손님이었는데, 어디선가 사무소의 사장인 애쉬가 영업장 보호를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온 사람이었다.

그는 곧장 돈을 들고 찾아와 샤인에게 그게 사실이냐 물었고, 샤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애쉬에게서 63구역 어느 영업장의 의뢰 잔금을 전부 받을 때까지는 적당히 봐주기로 했으니 연락이 오면 말하라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잔금을 받기 위함이었지 장기간 보호 의뢰를 수행하는 건 아니었다.

애쉬는 어딘가에 오랫동안 묶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그런 의뢰가 있더라도 100에 99는 거절했다.

대신 보호까지 받아야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은 많이 했었지.

그런 대답을 들은 손님은 처음에는 자신이 들은 소문은 무엇이냐 따졌지만 샤인은 꾸준히 웃으며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응대했고, 끝내 짜증을 가라앉힌 손님은 샤인에게 짜증내서 미안하다며 팁까지 주고 떠나갔다.

이 험악한 슬럼. 기껏해야 열 몇 살이나 됐을 법한 소년 혼자 지키는 사무소에 대한 태도치고 무척이나 신사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 손님 뿐 아니라 개업 초기 이후 찾아온 진상 손님들 대부분이 그랬다.

자신의 의뢰를 왜 곧장 받아주지 않느냐며 샤인에게 따지다가도 자신이 무시하던 꼬맹이의 입에서 사장인 ‘애쉬 론모어’라는 이름이 나오기만 하면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이다.

꼬맹이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미친 칼잡이’는 무섭다는 것이지.

처음에는 순진하게 그저 성심성의껏 응대하던 샤인이었으나 이 슬럼에는 개념이 없는 인간이 무척이나 많았고,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한없이 강한 인간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뒤의 접객 업무는 굉장히 편안했다. 제 아무리 기세등등한 사람이라도 이 사무소에 찾아와 ‘애쉬 론모어’란 이름을 듣고도 뻗댈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 또한 론모어 사무소의 사장인 애쉬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정신이 나가서 끝까지 난장판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때는 진짜 사장님을 불러 처리하면 되는 것이었고.

애쉬는 샤인이 요청하기만 하면 곧장 두들겨 패준 뒤 쫓아내곤 했다.

‘언제 다시 일을 시작하실까.’

이제 의뢰도 꽤 쌓여있는데. 서류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샤인이 생각했다.

며칠 전 연달아 외부 출장을 나갔던 애쉬는 불과 하루 만에 돌아왔지만, 돌아온 그의 모습은 나가기 전과 꽤나 크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 산 것인지 말끔한 흰 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언제나 입고 다니던 코트는 너덜너덜해져서 당장이라도 버려야 할 상태로 돌아왔다. 아마 입고 나갔던 옷도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애쉬의 뺨에는 예리한 것에 베이기라도 한 듯 작은 상처 몇 개가 생겨 있었다.

그것을 본 샤인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겉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작은 상처였지만 여태껏 어떤 위험한 의뢰를 수행하면서도 얼굴에 상처를 입는 일은 없던 애쉬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얼굴에 한 개도 아니고 두세 개의 상처를 입고 오다니.

비록 지금은 흔적도 없이 아물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애쉬가 개인적으로 받는 의뢰들의 서류는 확인하지 않는 샤인이었지만, 괜한 궁금증에 그의 책상 서랍에 시선을 주곤 했을 정도로.

아무튼 그렇게 돌아온 애쉬는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그 좋아하던 유흥가에도 들르지 않을 정도로.

샤인은 혹시나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부상이 있나 걱정했지만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은 게, 3층에 있는 애쉬의 방에 식사나 간식을 들고 찾아가면 항상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 보이니 다행이긴 하지만 일도 조금씩 하시면 좋을 텐데…….’

최근 밀린 의뢰들의 의뢰주들이 언제쯤 의뢰 수락, 혹은 거절의 연락을 받을 수 있냐고 성화였다.

하지만 사장인 애쉬는 소년에게도 편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거기에 대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다. 그럼 어쩌겠는가. 그가 스스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오늘도 몇 번째 걸려오는 손님들의 전화를 받으며 샤인은 이런 상태가 오래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샤인이 손님맞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 터벅, 터벅, 터벅.

위층에서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에서 내려올 사람이라곤 당연히 한 명밖에 없다.

샤인이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내려온 애쉬를 바라봤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굳은 표정.흰 티에 청바지. 위에는 너덜너덜해진 예전 코트 대신 새 것을 걸친 일상적인 복장이었지만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가 걸려있다.

샤인은 내려온 애쉬의 차림새만으로도 그가 급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 뿐 아니라 분위기도 평소와는 크게 다르다.

유흥가에 놀러갈 때는 챙기지도 않는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결코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가 검을 챙길 때는 언제나 무력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뿐이었으니까.

샤인이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애쉬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어. 급히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다.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

“아, 네. 다녀오….”

"간다."

애쉬는 무슨 일인지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사무소를 떠나갔다. 샤인은 빠른 걸음으로 걷다 점차 뜀박질로 바뀌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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