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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33화 (33/230)

〈 33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24)

* * *

뒷세계의 인간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멍청한 일이다.

그것은 레이라 플로리스, 불과 20여 년 남짓한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도 몇 번이나 직접 체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타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지닌 능력을 ‘신용’할 뿐.

때문에 이번 일에 있어서도 약간의 배신감은 느꼈지만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빌레이 포튼, 그조차도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리도 허망한 것이다.

잠시 내려놓은 수화기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리엔, 내려갈 테니까 준비해줘요.”

“네? 하지만 사장님…!”

“그리고 전에 맡겨둔 옷. 그것도 꺼내오세요.”

“아, 안돼요! 지금 밑이 얼마나 위험한데…!”

전화가 끝나고 일어선 레이라의 말에 비서가 기겁하고 그녀를 말렸다. 아래층이 전쟁통이 된 지금 어딜 내려간다는 것인가.

비서들이 아는 레이라는 언제나 사무실이라는 온실에서 관리되고 있는 난초였다. 어째서 그 험악한 갱들이 그녀를 보스라고 모시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하지만 레이라 플로리스라는 사람은 비서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연약한 아가씨가 아니다.

그녀가 뒷세계에서 일을 한 지도 무려 15년이 넘게 지났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 살 때부터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

15년 전만 해도 소매치기,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던 여자아이가 지금은 거대 갱단의 보스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무력적인 충돌이 없었겠는가.

뒷세계는 일반인들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하고도 험악한 곳이었고, 특히 여자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레이라는 자신에게 뻗어오는 악의의 손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는데 성공했기에 이 자리에 있다.

여태껏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끊은 목숨의 수만 세 자리 수.

그녀가 아무런 무력도 없이 눈요기에만 좋은 여자에 불과했다면 이 거대 갱단의 보스가 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겉보기에야 곱게 자란 듯 보이겠지, 그렇게 보이기 위해 관리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온실의 난초보다 야생의 들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비서들이 기겁하며 말리는 이유는 이해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귀찮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엔.”

듣는 사람마저 차분하게 만드는 레이라의 낮은 목소리가 비서의 이름을 불렀다.

안절부절 못하던 비서는 레이라와 눈을 맞추고 잠시 후, 조금 침착해져선 레이라의 명령에 따랐다.

“…여기 있습니다, 사장님.”

비서가 수납장에서 레이라가 말한 옷들을 챙겨왔다. 예전 레이라가 맡겨놨던 그것은 일종의 전투복이었다.

레이라가 현장에서 일할 때만 착용하던.

“…조심하셔야 돼요.”

레이라가 그것을 받자 옷을 챙겨온 비서가 당부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레이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옷을 건네받은 뒤 잠시 그런 비서를 바라봤다. 그녀가 혐오하는 뒷세계의 인간이 아닌, 일반인.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의 심약한 비서였지만, 레이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느꼈다.

‘조심하라는 건 날 위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일자리와 안정을 위한 걸까.’

‘뱀파이어’의 빌딩에서 근무하는 일반인들은 슬럼에서 찾기 힘들 정도로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당장 뒷골목만 잘못 들어가도 큰 위험을 겪을 수 있는 슬럼이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이름 앞에 잡다한 양아치들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근무지인 빌딩 자체가 안전한 것은 당연했고, 운 없이 양아치들에게 물려도 ‘뱀파이어’에서 근무하는 것을 알린다면 오히려 그쪽에서 슬슬 피할 정도.

게다가 급여까지도 제법 높은 편이었으니 사장인 레이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 그 모든 것을 잃는다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질 것이다.

레이라는 자신의 그런 의문을 직접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뒷세계에서 살아오며 평생 겪어온 것이 배신이었지만, 그로 인한 인간불신이 일반화 되어선 안 된다.

설령 지금 비서가 걱정하는 것이 그녀 자신의 앞날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레이라의 안전을 염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역시 빌레이의 배신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배신자의 얼굴을 한 차례 떠올렸던 레이라는 입고 있던 정장을 하나하나 벗고, 전투복을 걸쳤다.

사실 생긴 것은 원래 입고 있던 정장과 색감 말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라면 그 무게감.

평소에 입고 있는 정장은 일반적인 소재로 만들어져 가벼웠으나, 지금 입고 있은 전투복은 특수 방탄 처리가 된 것이라 그 무게가 못해도 수배는 무거웠다.

오랜만에 전투복을 챙겨 입은 레이라는 그 무게감에 답답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이래서 평소에는 일반 정장만 입고 다녔는데.

“진짜 가시려구요…?”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자 비서가 걱정스런 눈으로 다시 물었다. 레이라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권총 두 자루와 탄창 몇 개를 챙겨 품에 넣으며 대답 대신 당부했다.

“문만 잘 잠가놓으면 폭발물이 없는 이상 쉽게 뚫리지 않을 거예요. 무슨 소리가 나도 안에서 기다리세요.”

“…사장님.”

레이라는 비서들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스르륵.

“조심하세요, 사장님!”

관리를 잘 된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떠나가는 사람을 배웅하듯 그녀의 뒤에서 비서가 외쳤다.

문 밖으로 나선 레이라는 사무실 안의 비서들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눈짓하곤 문을 닫았다.

투욱.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일이 터지자마자 불러 모았습니다, 보스.”

“…바로 내려가자.”

“예.”

레이라가 앞장서고,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시켜둔 직속 부하들이 뒤따른다.

이제는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 갱단의 보스로 돌아갈 때였다.

* * *

투다다다!!

“대, 대체 저놈들은 뭐야…!”

1층, 2층, 3층. 어느새 1층 로비를 지나 이곳 3층에서까지 격발음이 울린다. 벌써 전선이 여기까지 밀린 것이다.

“아하하핫!!”

“야! 적당히 날뛰어! 복면 안 벗겨지게 조심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서 온 놈들이길래 저런 괴물들이!!”

‘뱀파이어’의 갱들은 광소를 터뜨리며 날뛰는 검은 복면을 보며 총 든 손을 떨었다.

싸움은 분명 대등하게 시작했다.

쏟아지는 총탄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었고, 현실이었으니까.

양측 모두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쓰러뜨리는 상황의 연속.

그렇게 계속 되면 분명 배신자 측보다 숫자가 많은 ‘뱀파이어’ 측이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구경만하다 뒤늦게 참전한 검은 복면들에 의해서.

‘뱀파이어’ 측의 간부, 케인은 검은 복면들이 심상치 않은 실력자들임을 단숨에 알아챘다.

그들의 폭발적인 움직임과 몸놀림. 그것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진짜배기들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확연한 격차는 검은 복면들이 슬럼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부품을 이식한 깡통 로봇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값비싼 물건들을 장착한 사이보그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때문에 그들의 참전 직후 불과 십여 분 만에 3층까지 전선을 당겨온 것이다.

3층은 복도가 좁아 회피 기동할 공간이 부족했기에 검은 복면들 같은 실력자라 할지라도 총탄으로 쉽게 견제할 수 있었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아직도 위쪽에서 연락은 없나?!”

케인이 무전을 들고 있는 갱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무전을 맡고 있는 갱이라고 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아직 없습니다!!”

“씨발, 위쪽에선 뭘 하고 있는 거야!!”

케인이 욕지거릴 내뱉었다. 3층의 좁은 복도를 이용해 적을 견제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벌이에 불과했다.

건물의 입구를 쥐고 있는 것은 배신자 측이었고, 이쪽은 새로운 탄을 공급할 수단이 없다. 총탄이 무한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뚫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쏴재껴!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일반인들은 위로 피신시켜!!”

“예!!”

“씹, 망할!!”

케인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욕설과 격발음이 쏟아졌다. 본사에 위치한 갱들도 나름 많은 전투를 겪은 베테랑들이다. 지금 이 상황이 지속되면 어찌 될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갱들이 전선을 유지하고 일반 직원들은 겁에 질린 채로 위층으로 피신한다.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이 정리 됐을 때였다.

“천천히 전선을 물려! 한 층 더 위로…!!”

“케인 님! 위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

무전을 맡던 갱의 목소리가 울렸다. 케인의 모든 청각이 총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볼륨을 최대로 키워둔 무전기에 집중됐다.

­ ……스께서 직접 ……시니 조금만 더 버텨라!

온갖 소음에 뒤섞여 잘 들리지도 않았으나 케인은 중간 중간 알아들은 단어들을 조합해서 문장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케인이 무전을 통해 전해들은 얘기를 외쳤다.

“보스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니 좀만 더 버텨!!”

“오, 오오!!”

“보스가 직접 행차 하신단다!!”

“좀만 더 시간 끌어!!”

그 전보에 갱들이 한층 더 바쁘게 움직였다.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총탄을 갈기고, 수류탄 따위를 까 던진다.

갑자기 격해진 저항에 배신자 측은 조금 당황하는 듯 했지만 곧 그들 또한 공세를 몰아붙였다

뱀파이어 측에서 외친 목소리는 반대편, 배신자 측에서도 들었다. 처음에는 술렁이는 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검은 복면들’의 실력을 직접 보았다.

아무리 보스라고 한들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언제 움찔했냐는 듯 배신자 측에서 기세를 살리기 위한 조롱이 들려왔다.

“그래! 그 망할 년도 내려오라고 해! 잡히면 내 좆으로 아주 씹창을 내줄 테니까!!”

“그럼 그 다음 순번은 나다!”

“난 뒤!!”

그리고 뱀파이어 측 갱들의 뒤쪽에서부터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들이 울렸다.

이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도 존재감을 발하는 무게감 있는 소리가.

그에 돌아본 ‘뱀파이어’ 측의 간부, 케인은 한 순간 전장의 모든 소리가 멎은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당당한 발걸음, 눈먼 총탄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 꼿꼿이 세운 허리.

조금은 어두운 빛깔의 금발을 늘어뜨린 전장의 여신이 배신자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어떻게 해주겠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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