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25)
* * *
“보, 보스…!”
그녀를 발견한 배신자 측 누군가의 입에서 레이라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다른 배신자 측 갱 하나가 소리쳤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보스는 뭔 보스야! 우리 보스는 저쪽이 아니라고!”
“아, 그, 그랬지.”
“정신 똑바로 차려! 저건 그냥 적이니까!”
그렇게 외쳤지만 어느새 쏘아내던 총탄은 점차 멎어갔다. 그녀를 발견한 배신자 측 갱들이 사격을 조금씩 줄여간 것이다.
그렇게 적의 공격이 멈추자 응사하던 ‘뱀파이어’ 측도 사격을 멈췄고, 전장으로 이용되던 복도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뚜벅, 뚜벅.
그때였다. 조용해진 복도에 앞으로 나서는 발걸음 소리 하나가 울렸다. 홀로 앞으로 나선 레이라의 것이었다.
“보스! 위험합니다!”
“괜찮아.”
그런 그녀에게 부하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간단히 대답하곤 기어코 몇 걸음 더 나서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배신자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 배신자 측 갱 몇몇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 그들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레이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심하게 뭐하는 짓이지, 벡메일 맥핀.”
벡메일 맥핀. 이따금 얼굴을 봐왔던 간부였다. 그녀가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인 걸 보면 최소 중위급 이상의 간부였을 텐데, 왜 저쪽에 가담한 것일까.
그녀에게 이름이 불린 배신자 측의 간부, 벡메일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다, 닥쳐! 이 개 같은 년!”
“뭐? 저 새끼가 감히…!”
보스를 향한 모욕에 레이라 측 간부들이 분노를 터뜨리며 일어났지만 레이라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곤 배신자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어?”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냐고?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그래.”
분노에 찬 물음에 레이라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는 뒷세계의 인간들을 혐오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충분한 대우를 해줬다고 생각한다.
타 갱단에서는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말단들에게마저 나름의 복지를 제공했고, 그에 많은 부하들이 만족했었다. 특히나 간부들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문제여서 배신자 측에 붙었을까. 레이라는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벡메일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개년, 망할 년…!”
“똑바로 대답해.”
“이익…!”
자신들의 위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평소 아랫것 대하듯 명령하는 차분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순간적으로 그런 분위기에 눌렀던 벡메일은 분노에 잇소리를 내고는 곧 소리쳤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난 ‘뱀파이어’의 초기 멤버라고! 그런데 막상 싸움이 나면 도망치고 오줌 지리는 것밖에 못하는 저 머저리들의 명령을 들으라고?! 그딴 걸 어떻게 참으란 말이냐!!”
엄폐물 뒤에 숨은 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는 일반인 직원들을 가리키는 손끝, 불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그들을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듯하다.
그런 분노와 살기를 직면한 일반인 직원들이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레이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게 전부야?”
“아니! 그 외에도……!”
벡메일은 그들 배신자들이 평소 품고 있었던 불만들을 쏟아냈다. 듣자하니 뻔한 얘기였다.
돈, 일반인, 자존심…….
천천히 듣고 있던 레이라는 중간부터는 그냥 흘려들었다. 어차피 처음과 다를 게 없는 얘기들의 반복이었으니까.
일반인이니 자존심이니 잡다한 타령을 하고 있지만 저들은 그저 레이라가 정한, ‘뱀파이어’가 향하고 있는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레이라는 ‘뱀파이어’가 완전히 양지로 올라가진 못하더라도 그 형식만큼은 덮어씌우고 싶어 했으나, 저들은 여타 쓰레기 갱단들처럼 제 구역의 왕처럼 행세하고 싶어 했다.
말하자면 레이라와 그에 따르는 부하들이 추구하는 것은 기업형 갱단이고, 저쪽이 바라는 것은 주먹구구식 양아치 갱단으로의 회귀다.
거기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레이라에게는 야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코 여타 평범한 갱단들처럼 운영해서는 안됐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레이라는 계속해서 열변을 토하는 벡메일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놈은, 그리고 이곳에 쳐들어온 배신자들은 저런 얘기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겠지.
지금 떠들고 있는 얘기도 레이라와 간부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고 싶어 하는 얘기처럼 들린다.
‘저급하네.’
레이라는 배신자가 떠드는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 넘기며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배신자들은 일반인 직원들을 보고 머저리니 뭐니 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그들 자신이야말로 머저리였다.
정말로 하찮은 욕망에 가득 차 당장의 눈앞만 바라볼 줄 아는 머저리들.
이런 수준이니까 멍청하게 이용이나 당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 세력까지 끌고 들어와선.
레이라는 저 옆에 위치한 검은 복면들은 둘째 치고, 배신자들을 둘러보며 몇몇 인물들을 특정했다. 대충 배신자들의 머리 정도로 보이는 놈들을.
그리고 놈들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말하며 신경을 분산시킨다.
“그래, 그쪽 생각은 잘 알았어.”
“알았다고?”
“응.”
그녀는 돌아온 대답하며 양 손을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어찌나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던지 그녀가 홀스터에 꽂힌 권총 손잡이를 붙잡기 직전까지는 배신자 측의 누구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단 한 명, 검은 복면을 쓴 쪽의 하나를 제외하곤.
“어…”
타앙!!
“…라?”
검은 복면의 천진난만한 듯 가벼운 목소리가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권총 그립에 닿은 두 손이 빛살처럼 움직이고, 장내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가 늦은 배신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털썩.
그런 그들의 중심, 머리에 작은 구멍이 뚫린 놈들에게서 피가 울컥 쏟아지더니 그대로 픽, 하고 쓰러졌다.
벡메일을 비롯한 배신자 측의 대가리 여섯.
들려온 것은 단 한발의 총성이었지만 여섯이나 되는 인간이 죽어 나자빠졌다.
레이라는 멍청한 표정의 배신자들에게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너희들이 구제 못할 멍청이들이란 걸 알았어.”
“갑자기…!!”
“지금이다! 쳐!!”
그제서야 기습을 눈치챈 배신자들. 그들의 표정이 분노로 바뀌어갔지만, 레이라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부하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놈들 중 몇이 쓰러짐과 동시에 소리친 ‘뱀파이어’ 측 간부가 총구를 배신자들에게 향했다.
반사적으로 뒤따르는 부하들.
레이라가 엄폐물 뒤로 몸을 던짐과 동시에 총탄의 비가 쏟아졌다.
투다다다다!!
*
뒷세계는 험악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지닌바 재능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무력이 그것을 받쳐주지 않으면 꽃을 활짝 피울 수 없었다.
슬럼이란, 그리고 갱들과 온갖 해결사들, 용병들이 활동하는 뒷세계란 그런 곳이다.
그렇다면 그런 세계에서 특히나 무시당하는 여성이 수천을 밑에 둔 거대 갱단의 보스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지금 레이라가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와아. 이런 곳에는 쓰레기만 있는 줄 알았더니, 되게 예쁜 보석도 있네요.”
“괜히 시간 끌면서 놀 생각은 하지 마라, 아뎀.”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가야하니까. 아뎀이라 불린 검은 복면이 감탄을 터뜨리자 다른 검은 복면이 작게 경고했다.
하지만 경고한 쪽의 검은 복면도 ‘뱀파이어’의 보스, 레이라 플로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외모도, 몸놀림도 모두 하나의 예술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씹! 죽어!!”
투웅. 불법 개조에 의해 구경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권총이 불을 뿜는다. 반동에 팔이 크게 들릴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탄은 곧게 날아갔다.
그러나 레이라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총구가 가리키는 곳을 이미 피한 뒤였다.
총탄은 허공에 펼쳐진 금빛 머리칼만을 꿰뚫고 지나간다. 레이라는 곧장 자신을 향해 발포한 배신자 측 갱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커업!”
그녀는 가볍게 몸을 놀려 피했지만 육중한 갱은 그러지 못했다. 목에 구멍이 뚫린 갱이 그곳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당장 죽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곧 죽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금방 정리되겠는데….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상황을 보던 검은 복면이 중얼거렸다. 이쪽도 숫자는 나름 많이 남아 있었지만 교환 비를 봤을 때, 수십 분에서 한 시간 내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갱단의 보스인 여자와 그쪽 정예로 보이는 인물들이 합류한 뒤로 판이 기울었다.
결국 리더 격의 검은 복면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가자.”
“옛 썰!”
1층 로비를 밀어낸 뒤로는 전력을 아끼고 있던 검은 복면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혼잡한 상황 속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라 레이라도 곧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곧장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복면을 쓴 놈들은 간부진이 막아! 심상치 않은 놈들이니…읏!”
“안녕하세요!”
사악. 이질감이 드는 밝은 인사와 함께 예리한 기운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명령을 내리던 레이라는 그 섬찟한 기운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검은 복면의 남자.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이 활짝 웃고 있다.
무광 처리된 검은색 단검을 역수로 들고 있는 그를 보는 레이라의 근육이 긴장에 당겨졌다.
방금 눈앞을 스쳐간 그것,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단숨에 두 눈을 베여 실명했을 것이다.
“아뎀! 그 여자는 죽이지 마라! 주인이 정해져 있으니까!”
“네에~! 걱정 마세요!”
뒤쪽에서 들려온 검은 복면의 목소리에 레이라의 정면에 선 검은 복면, 아뎀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모습이었으나 레이라는 여전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아뎀이라 불린 검은 복면에게서 순간적으로 느껴진 기운. 그것은 어디인가 ‘애쉬 론모어’라는 해결사와 닮아 있었으니까.
검과 단검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쓰는 무기조차도 냉병기라는 것이 같았다.
순간 ‘베이론’의 아지트 하나를 홀로 무너뜨린 애쉬와 비견될 만한 괴물일까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런 초인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것은 눈앞의 검은 복면, 아뎀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일 것이라는 것.
뒤쪽의 검은 복면에게 대답한 아뎀은 다시 고개를 돌려 레이라를 보고 말했다.
“들으셨죠?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잡혀주세요!”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