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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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택시의 저급 AI가 인사한다. 73구역에서 72구역에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애쉬는 곧장 ‘뱀파이어’의 아지트로 향하며 자신에게 걸려왔던 전화 내용을 떠올렸다.
‘해결사 님! 도와주세요!!’
‘…뭐? 누구야?’
‘사장님이 위험해요! 도와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쏟아지는 여성의 목소리.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며칠 전 보았던 레이라의 비서 중 한 명이었다. 갑작스럽게 전화를 건 그녀는 애쉬에게 급히 사정을 전달했다.
현재 ‘뱀파이어’의 본사 건물이 내부 배신자들에게 공격받고 있으며, 그것을 처리하겠다고 직접 내려간 레이라, 그리고 그녀의 부하들이 위급한 것 같다고.
처음에야 그 철두철미해 보이던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냐 싶었던 애쉬였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에게 넘긴 물건들을 떠올리자 급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USB의 보안을 뚫는 데 며칠 정도가 걸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침 지금이 딱 그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단순한 내분이라고 하기는 그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이미 거대 갱단 하나를 장악했던 배후 세력. 그들이 ‘뱀파이어’에 전해진 물건들의 존재를 알았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에도 알려져선 안 될 정보일 테니 아주 철저하게 움직이겠지.
상대방은 이쪽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었지만 이쪽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다.
“분명 저 건물이었지.”
애쉬가 중얼거렸다.
슬슬 ‘뱀파이어’의 아지트가 눈에 보인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희미한 총소리와 함께 주민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 대낮부터 무슨 일이냐….”
“몰라. 일단 자리나 피해. 괜히 고래 싸움에 등 터질라.”
가는 길에 마주치는 주민들은 모두 불안해하며 애쉬의 목적지인 ‘뱀파이어’의 아지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게 중에는 혼자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애쉬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따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와. 저기 ‘뱀파이어’ 아지트 아니야? 저길 무슨 배짱으로 공격했대.”
“그러니까. 숫자는 좀 돼 보이긴 하는데 ‘뱀파이어’도 인원만 보면 몇 천은 되잖아.”
“그러니까…응?”
골목에 숨어 불난 집 구경하듯 떠들어대는 두 남자가 보인다. 애쉬는 그들을 보고 좀 더 빠르게 내달렸다.
“뭐, 뭐야?”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애쉬를 보고 두 남자가 당황했다.
하지만 애쉬의 목표는 그들이 아니었다.
타닷, 가볍게 발끝을 튕겨 두 남자의 머리 위로 담을 훌쩍 뛰어넘는다.
애쉬가 자신들을 향해 뛰어드는 듯하자 몸을 움츠렸던 남자들의 얼빠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였다면 쫄지 말라고 장난이라도 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담을 넘자 정면에 ‘뱀파이어’의 빌딩이 나타났다.
“아, 나도 안쪽에 들어가서 좀 놀고 싶은데.”
“어차피 주변에 있던 놈들은 다 도망이나 가던데, 여길 지킬 필요가 있나.”
“야, 헛소리 좀 하지 마라. 방금 빌레이도 왔는데 잘못 걸리면 머리통 터지는 거 몰라?”
멀쩡한 유리창이라곤 없는 1층 로비의 입구. 그곳에는 열댓 명 정도 되는 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탄피, 구멍이 숭숭 뚫린 벽재.
수십은 되는 시체들과 거기서 흘러나온 피로 젖은 바닥까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다.
로비에 자리하고 있는 갱들의 대화를 들은 애쉬는 잠시 의문에 빠졌다.
입구를 막고 있는 것과 안쪽에 들어가서 놀고 싶다는 말만 들으면 저쪽이 배신자 쪽 같았는데, 그들의 입에서 애쉬도 아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빌레이.
풀네임은 ‘빌레이 포튼’.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레이라의 부관과 같은 존재의 그것이었다.
단순한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으나, 머리통이 터진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 애쉬가 아는 인물과 동일인물 같다.
애쉬가 생각했다.
‘…그 녀석이 배신자였다고?’
비서는 분명 본사가 내부 배신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했다. 그 배신자가 빌레이 포튼, 그 남자라고 한다면 이 상황도 이해가 됐다.
그는 애쉬의 의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애쉬가 가져온 물건들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으니까.
‘뱀파이어’의 보스인 레이라의 최측근, 빌레이 포튼마저 내통자였다면 ‘베이론’을 쥐고 흔들었던 배후 세력의 손길은 대체 어디까지 닿아있는 거지?
애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뱀파이어’의 본사 건물로 향했다.
그가 다가오자 로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갱들이 그를 발견하고 총구를 겨눴다.
“어이! 오늘 여긴 영업 안하니까 갈 길이나 가!”
“빨리 안 꺼지면 엉덩이에 빵꾸난다!!”
“푸하하하! 빨리 도망가라고~!”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총구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온다. 이미 여럿 이런 식으로 쫓아낸 듯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여태껏 그들에게 쫓겨났던 이들과 애쉬는 달랐다.
애쉬는 갱들의 같잖은 행위를 지켜보다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 비키면 죽인다.”
* * *
“후욱, 후욱.”
“진짜 잘 피하시네요! 그럼 어디 이것도!”
짧은 칼날이 갑자기 턱 아래에서부터 솟구쳤다. 레이라는 벅차오른 숨을 어떻게든 가다듬으며 허리를 뒤로 빼 피하곤 상대방의 목젖을 향해 오른손에 쥔 컴뱃 나이프를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칼끝에 걸리는 감각은 없었다. 피한 것이다.
레이라는 뺨을 타고 흐르는 자신의 피와 땀을 느끼며 검은 복면, 아뎀을 경계했다.
아뎀은 이곳저곳 살갗을 베이고 잔뜩 지친 레이라와 달리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실력 차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자꾸 버티시면 진짜 아픈 꼴을 볼 수도 있다니까요?”
“…닥쳐.”
아뎀의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모를 말에 레이라가 거칠게 대꾸했다.
이미 그녀가 쓰던 권총들의 탄은 바닥난 지 오래. 그녀의 부하들도 여전히 싸우고 있긴 했지만 그쪽에도 한계가 보였다. 사실상 전투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순순히 포기하고 목숨이라도 살려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올 터였으니.
분명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비이성적인 감정에 빠져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어떡해요? 손목이나 팔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아뎀은 레이라가 포기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곤란하다는 듯 뒤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에 레이라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녀와 아뎀의 싸움을 투기장 보듯 구경하고 있는 둘에게.
그곳에 있는 검은 복면의 남자가 자신의 옆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저항이 거세서 멀쩡히 제압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이쪽도 시간이 많지 않아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는 기다려 줄 수 없구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의사는 준비시켜 놔라. 곧장 붙이면 괜찮겠지.”
보통 사람의 두세 배는 될 듯 커다란 몸. 온갖 흉터에 험악한 얼굴.
‘빌레이 포튼’.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라를 마주보며 그가 대답했다.
그에 옆에 위치한 검은 복면이 말했다.
“들었지? 팔 하나까지는 괜찮으시단다. 그만 놀고 빨리 끝내자.”
“네!”
아뎀이 힘차게 대답했다. 검은 코팅의 단검이 다시 치켜 올려졌다.
레이라는 무어라 말할 기운도 아낀 채 그저 곧 있을 공격만을 대비했다.
곧 검은 칼날이 춤췄다. 노리는 곳은 그 자신이 말했던 대로 손목. 빌어먹을 정도로 정직한 공격이다.
그만큼이나 그녀를 아래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이라는 그 굴욕감과 분함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채 몸을 움직여 피하고, 쳐내고 막아냈다.
채앵!
컴뱃 나이프와 검은 단검이 맞부딪혀 큰 소리를 낸다. 레이라는 순간 팔에 힘이 풀려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진짜 한계다.
“아아, 진짜!”
끝까지 버티는 레이라에게 짜증이라도 난 듯 아뎀이 소리치며 단검을 내질렀다.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한다. 팔뚝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칼날이 스친 것이다.
지칠수록 느려지는 몸에 점차 생채기와 상처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끝이다. 이제는 진짜 항복하지 않으면 손목이나 팔이 잘려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고 싶지 않아.’
레이라가 아뎀의 칼날을 받아내는 와중에도 빌레이를 노려봤다. 그의 우묵한 눈이 레이라를 내려다보듯 보고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레이라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이성적인 무언가가 자꾸만 끓어오른다.
그래, 이제 인정할 건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비서들과 부하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동료, 빌레이의 배신은 그녀에게도 뼈아픈 일이었다.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 일은 그녀의 감정적인 부분 때문에 일어났다.
배신자의 처분은 처형이다.
빌레이의 배신에 대해 감을 잡았을 때. 아니, 반쯤이라도 확신을 가졌을 때 곧장 움직였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그 모든 의심과 확신이 100%가 되기 전까지는 그가 배신했단 사실을 믿기 싫었으니까.
어릴 적, 조직 생활을 할 때부터 함께했던 빌레이는 그녀에게 있어 어쩌면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어째서.’
채앵!
단검이 다시 한번 부딪혔다. 레이라의 손에 잡혀있던 컴뱃 나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손아귀에 힘이 풀린 것이다.
‘어째서 배신했어…?’
하지만 잔뜩 짜증이 난 상대방의 칼날은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손목하나, 팔 하나는 잘라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혼 좀 나봐야겠네요!"
‘믿었는데.’
더 이상은 피할 기운도 없었다. 레이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칼날을 알면서도 빌레이를 바라봤다. 무광 처리된 검은 칼날이 그녀의 손목을…….
퍼억!
“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빛살처럼 날아온 무언가가 꽂혀들었다.
아뎀이 부러질 듯 울리는 손목을 붙잡고 물러나고, 레이라의 빛을 잃은 눈동자가 벽에 꽂힌 물건, 기다란 장검을 바라봤다.
검의 손잡이가 눈에 익다. 그녀도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검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검의 주인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봐, 그게 무슨 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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