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43화 (43/230)

〈 43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34)

* * *

“…….”

레이라는 조용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빌레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했다.

“네 눈동자, 머리칼, 그 향기로운 숨결까지. 모든 걸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배신했고, 지금은 이딴 꼴이 됐지.”

“…….”

“네가 신임했던 부하는 이런 놈이다. 어때, 실망했나? 응? 레이라.”

빌레이는 괜히 레이라를 자극했지만 이번에도 레이라의 반응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그런 그를 내려 볼 뿐이었다.

“자. 원하는 대답은 줬다. 편히 보내준다는 약속은 지키겠지.”

그에 빌레이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 약속했던 대로 답했으니 그쪽도 약속을 지키라는 듯이.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를 내려다보던 레이라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연초를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후우, 한 차례 연기를 내뿜은 후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흐흐, 고맙군.”

연초를 문 레이라가 뒤따라온 부하에게 눈짓했다. 부하는 자신이 들고 있던 권총을 레이라에게 넘겼다.

철컥.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을 가득 채운다. 레이라는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권총의 무게감에 느릿하게 총구를 배신자의 머리에 겨눴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잘 가. 멍청한 배신자.”

타앙!

상황이 정리된 장내에 최후의 총성이 울렸다.

배신자, 빌레이 포튼은 그 총성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

배신자 우두머리에 대한 처형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뒤처리를 시작했다.

시체를 끄집어내고, 흐른 피를 닦는다.

부서진 집기와 무너진 벽, 그리고 뜯겨나간 문짝 따위를 치우고 정리한다.

“후우….”

레이라는 부하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연초만 태웠다.

그에 한동안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애쉬가 물었다.

“이봐. 좀 괜찮아?”

“…딱히 문제는 없어.”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지금 제자리에서 태운 연초만 반 갑에 가깝다. 그러니까 열 대 가까운 연초를 이어서 태운 것이다.

절대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연초를 물고 있는 모습도 섹시하긴 했지만, 그것도 이렇게나 계속되면 조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최측근이었던 빌레이의 배신은 그녀에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침착한 것인지, 아니면 멍한 것인지 부하들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는 레이라에게 애쉬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할 일 없으면 내 볼 일이나 도와주지 그래.”

“볼 일?”

“어. 전에 넘겼던 USB. 그 보안은 뚫었겠지?”

“응.”

애쉬가 넘긴 ‘방화광 루이스’의 USB. 그녀는 이미 그것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였다.

빌레이도 그 내용물을 보고 다급히 움직인 게 아니던가.

“그럼 그거나 보여줘. 난 오늘 나온 김에 더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알겠어. 따라와.”

툭, 툭. 레이라는 엉망이 된 복도에 대충 담뱃재를 털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본사 내 전산실.

오늘 일어난 일의 원인이 되었던 장소이자, 애쉬가 가장 원하는 모든 정보가 위치한 곳이었다.

“보스.”

“수고해.”

레이라가 발걸음을 옮기자 부하들이 알아보고 예를 표했고, 그녀는 가볍게 치하하며 걸었다.

거대한 집단의 정점에 있는 여자답게 당당한 걸음걸이였지만, 뒤따르는 애쉬에겐 어쩐지 그 뒷모습이 조금은 위태로워 보였다.

*

“전에 가져왔던 물건, 그 내용물을 이 남자한테 보여줘.”

“예.”

전산실에 도착한 레이라는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부하에게 명령했고, 부하는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고 거기에 따랐다.

전산실은 배신자들과 땅거미 부대가 올라오지 못한 위층에 있어 멀쩡했기에 애쉬는 곧장 USB의 정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물류의 이동 방향, ‘헤븐즈 게이트’의 출처, 그리고 공급책들에 대한 상세한 조사까지.

방화광 루이스가 말했던 모든 정보가 그곳에 있었다.

“‘베이론’도 생각보다 깊이 파고들고 있었어.”

레이라가 USB의 내용물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방화광 루이스’는 정신이 나간 놈이라는 그 악명과 어울리지 않게 철저한 남자였다.

도시 외부 구역에서는 구하기 힘든 도시 내부의 정보들까지 싹싹 긁어모은 뒤 통합 후 깔끔하게 정리하여 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애쉬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배후 세력, 그러니까 ‘회사’에 관한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좀 더 나중에 봐도 된다. 확인하는 걸 늦춘다고 정보가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가장 급한 건 바로 그가 레이라의 의뢰를 받아들였던 이유. ‘달의 꽃’과 그곳의 마담인 한세연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한세연이 이곳에서 있었던 일과 그 결과를 알게 된다면 몸을 뺄 수도 있었으니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애쉬는 기타 잡다한 정보들을 넘기고 레이라의 부하에게 물었다.

“그보다 통화 기록 같은 것도 있지 않았어?”

“그런 것도 있긴 했습니다만. 목소리만 갖고 대상을 특정하긴 힘들…….”

“됐고, 그거나 빨리 틀어 봐.”

“예, 예.”

레이라의 부하가 애쉬의 재촉에 통화 기록들이 들어있는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첫 번째 것부터 재생하기 시작했다.

애쉬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레이라는 그런 그를 지켜봤다.

­ 제대로 찾아 본 거겠지?

­ 확실합니다. 도시 내부의…….

“다음.”

잠시 내용을 듣던 애쉬가 말했다. 부하와 루이스가 나눈 통화 내용이었다. 애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정보들을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애쉬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공급자’라던 여자와 한 통화였다.

­ 그럼 다음 번에는 그런 식으로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 윗분께서 그렇게 정하셨…….

“다음.”

­ 그래서…….

“다음.”

연이어 흘러나오는 통화 기록들. 루이스가 저장해둔 통화 내역은 총 백여 개에 달했는데 그 중에 ‘방화광 루이스’가 증오하던 공급자의 것도 있을 것이었다.

“다…, 아니. 잠깐. 지금 거, 처음부터 다시 틀어봐.”

계속해서 통화 기록을 넘기던 애쉬는 무심코 넘길 뻔한 기록을 다시 돌리도록 했다. 레이라의 부하가 통화 기록을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 끄으윽! 이, 개 같은 년! 어디야!! 죽여 버리겠어!!

정체를 숨기기 위함인지 잔뜩 뭉개진 여성의 목소리와 낯익은 목소리, ‘방화광 루이스’가 소리친다.

애쉬는 해당 통화 기록에 한층 더 집중했다.

­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지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이 힘드실 텐데.

­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찾아서 네년을 찢어 죽이겠다고오!!

놀리듯 말하는 목소리와 계속해서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발작하듯 소리치는 ‘방화광 루이스’.

지금 듣고 있는 통화 기록은 ‘방화광 루이스’가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 통화 같았다.

‘이거다.’

저 뭉개진 여자의 목소리가 분명 공급자의 것일 터였다. 이 통화 기록이 애쉬가 찾던 그것이었다.

“이대로 계속 재생해.”

“예.”

통화 내용은 계속해서 재생됐다. 대화 내용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목이 나갈 정도로 악에 받친 목소리로 분노하는 루이스, 그리고 그것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는 공급자.

제발 살려줘. 날 이 지옥에서 끄집어내 줘…. 뭐든,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내일 물건이 전달될 겁니다. 그것을 받아 제가 말하는 대로 따르시면 됩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분노로 시작하여 막바지에는 흐느끼기 시작한 ‘방화광 루이스’. 공급자는 느릿한 목소리로 자신의 명령을 전달했고, 루이스는 몇 번이나 그리 하겠다고 확답했다.

내려진 명령은 갱단 전체를 ‘헤븐즈 게이트’로 천천히 잠식시키라는 것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돌려봐.”

“예.”

애쉬는 몇 번이나 그 통화 내용을 반복해서 들었다. 뭉개진 목소리만으로는 대상을 특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말투.

저 말투는 그에게 무척이나 귀에 익은 것이었다.

애쉬가 열 번도 넘게 돌려 듣고 있을 때였다. 레이라가 그에게 물었다.

“이런 게 의미가 있겠어?”

회의적인 물음이었다. 이런 통화 내용만 들어서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목소리라도 뚜렷했다면 모를까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잔뜩 뭉개놓은 상태였기에.

하지만 그것을 계속 듣던 애쉬는 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

“당연히 있지.”

대답한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이라에게 말했다.

“내가 전에 가져온 ‘헤븐즈 게이트’. 그거 아직 있지?”

“…그야 아무한테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물건을 레이라가 자신이나 자신의 부하에게 사용할 리가 없다. 그런 대답에 애쉬가 말했다.

“그럼 그것 좀 돌려받자.”

“…어디에 쓰려고?”

“테스트를 좀 하게. 아, 그리고 저것도.”

애쉬가 손으로 전산실에 위치한 전자 기어를 가리켰다.

신경 인터페이스를 동기화하는 기계. 그것은 ‘헤븐즈 게이트’를 사용할 때 쓰기도 했다.

“설마 당신이 쓰려는 건 아니겠지?”

“말했잖아. 테스트를 좀 해보려고 한다고.”

당연히 그 대상이 애쉬 자신은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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