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35)
* * *
63구역 유흥가에 우뚝 솟은 8층짜리 전각. 처마와 기와지붕, 동양풍의 커다란 건물은 오늘도 손님으로 붐볐다.
“어서 오십시오!”
“입장 하셔도 좋습니다.”
입구의 가드들이 손님을 구분하고 들여보낸다. 그곳에 애쉬도 발을 디뎠다.
“뭐, 뭐야? 피야?”
“손에는 무슨 전자 기어를….”
옷에 땅거미 부대와 갱들의 피를 뒤집어 쓴 애쉬가 발걸음을 향하자 손님들이 그를 슬슬 피하며 속닥거렸다.
저 도시 안쪽 구역이었다면 진작 경찰에 잡혀갔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몰골.
하지만 이곳 63구역 유흥가의 경찰들은 순찰도 잘 돌지 않았기에 아무런 일도 없이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애, 애쉬 님?”
손님들의 시선이 쏠리자 함께 고개를 돌린 가드들이 애쉬를 발견하고 곧장 알아봤다.
상징적인 그의 외모는 차림이 어떻든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애쉬가 자신을 알아본 가드들에게 말했다.
“지금 마담 안에 있지.”
“아, 예. 계시긴 합니다만 그런 차림으로는 입장이 조금 힘드실 것 같은데….”
“그럼 그쪽 옷 좀 빌리자.”
“예?”
애쉬의 말에 가드가 진심이냐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애쉬는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금방 돌려줄 테니까 외투만 벗어서 줘.”
“….”
얼결에 정장 재킷을 뺏기게 된 가드가 애쉬를 바라봤다. 애쉬는 안면에 철판을 깔고 그런 시선을 무시하며 ‘달의 꽃’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챠르르륵. 무언가 부드럽게 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아, 어서 오세요 애쉬 씨!”
다른 손님을 맞이하다 애쉬를 발견한 카운터의 여성이 인사했다. 일전에도 카운터를 맡고 있던 연한 노랑빛의 금발과 흰 피부의 소유자. 다이애나였다.
애쉬도 그녀를 알아봤다.
“오늘도 네가 카운터 쪽이네.”
“네. 어쩌다보니 오실 때마다 이쪽을 맡고 있네요.”
“마담은 어딨어?”
“잘은 모르지만 아마 언제나 있는 곳에 계실 거예요.”
“밑으로 내려오지는 않았다는 거지?”
“네.”
“그래, 고마워.”
다이애나의 대답을 들은 애쉬는 가벼운 감사 인사와 함께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를 통하지 않고 계단을 박차 오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낭비였다.
애쉬의 신체능력으로 뛰듯이 계단을 타오르자 한세연의 지배인 사무실이 위치한 8층까지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안녕 하십…?”
“지나간다.”
애쉬는 계단을 지키는 가드를 그대로 통과해,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애쉬님! 잠시…!”
“금방 나갈 거야!”
가드가 정장 재킷 안쪽으로 숨겨진 피 묻은 차림을 보고는 급히 뒤따랐지만 그런다고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드 하나를 뒤에 단 애쉬는 곧 또다른 가드가 지키는 한세연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터럭, 탁!
사무실 안에서는 무언가 급히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애쉬를 가드가 막아섰다.
“애쉬 님. 지금 지배인님께서는 손님을 맞기 위한 준비 중이니 잠시….”
“손님을 맞기 위한 준비 중이라고? 도망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비켜.”
웃기지도 않은 시간 끌기용 변명에 애쉬는 가드를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나름의 사명감이라도 있는지 가드는 겁도 없이 몸으로 그를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지배인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애쉬님이라도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후욱…. 애쉬 님!”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계단을 지키던 가드도 뒤에서부터 애쉬의 어깨를 잡아챘다.
더 이상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막아?”
애쉬가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가드의 행동에 그냥 가만히 그들을 바라봤다. 정말 그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에 대해 알 만큼 아는 놈들이 직접 손을 대며 막아설 줄이야. 이쯤 되면 직업 정신이 투철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잠시 고민하던 애쉬가 팔을 올려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목을 콱 쥐었다. 그러자 가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애, 애쉬 님!”
설마 항상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애쉬가 억지로 뚫고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당황한 다른 가드의 목소리.
애쉬는 그런 가드에게 자비롭게 말했다.
“너흰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
63구역 ‘달의 꽃’ 8층. 지배인인 한세연의 사무실.
항상 조용한 분위기와 향긋한 커피 향이 감돌던 그녀의 방은 엉망으로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무실의 주인, 한세연으로 인해서.
터럭. 탁!
“빠, 빨리.”
커다란 캐리어 하나에 보안이 필요한 몇몇 문서들과 옷가지 몇 개를 급히 쑤셔 넣는다. 마음은 너무도 급했으나, 한세연의 떨리는 몸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따라주지 못했다.
불과 몇 분 전 받은 연락 하나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파견 나온 특수대가 애쉬 론모어 하나에게 몰살당했다는 직전의 소식에 어찌나 놀랐던가.
그러나 그보다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한 것은 그 다음으로 뒤늦게 도착한 메시지 하나였다.
‘십여 분 전 애쉬 론모어가 현장을 벗어나 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애쉬 론모어가 그저 어딘가로 떠났다는 한 문장의 메시지 그게 전부였다.
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까지는 밝혀지지도 않았으나, 모든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세연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가 ‘달의 꽃’을 향하고 있다는 한세연의 직감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아무리 그가 땅거미 부대를 몰살시키고 얼굴을 확인했다 한들, 그들이 과거 한세연의 의뢰를 같이한 경찰 대원들임을 안다 한들 한세연이 ‘회사’의 관계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고 있을 것인가.
설령 감을 잡고 있다고 할지라도 심증이 전부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세연은 불안에 떨며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애쉬가 가진 것은 기껏해야 심증이 전부일 것이라는 걸.
그렇다면 그냥 변명하고 계속해서 잡아떼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으나, 그보다 더욱 크게 울리는 것은 얼마 전 애쉬가 했던 경고였다.
‘그 변명이 진짜든, 아니든. 그냥 넘어가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의 의뢰에 억지로 땅거미 부대를 끼워 넣었을 때 들었던 경고. 그때 느꼈던 압박감.
그것들이 그녀의 모든 이성적인 생각을 찍어 누르며 불안에 떨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급히 짐을 챙겨 바깥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쿠웅!
“…!”
갑작스럽게 사무실의 문을 울리는 소음에 한세연은 꼴사납게 움찔하며 놀라고 말았다.
침착한 평소였다면 눈도 깜빡 않았을 일이었으나 지금 그녀가 보인 태도는 그녀의 불안감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녀는 설마, 설마 하며 사무용 책상의 수화기를 들고는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 가드. 무슨 일이시죠?”
지, 지배인님. 애쉬 님께서 갑자기….
그만. 내가 말할게.
겨우 새어나오는 듯한 가드의 목소리를 태연한 남자의 목소리가 끊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한세연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바깥에서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한세연에게 전해졌다.
마침 안에 있어서 다행이야, 마담. 문 좀 열어 봐. 보여줄 게 있으니까.
“애, 애쉬 님. 너무 갑작스럽게….”
어떻게 하지? 새하얗게 변한 한세연의 머릿속에 그 한 가지 생각만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그녀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현장에서 벗어난 애쉬 론모어가 향하던 곳은 다른 곳이 아닌, 그녀가 위치한 ‘달의 꽃’이었다.
63구역에서 출발한 지 기껏해야 십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도 벌써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건 미안한데 진짜 좋은 걸 구했다니까.
바깥의 남자, 애쉬 론모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한세연의 귀에는 얼마 전 화가 잔뜩 났던 그 목소리보다도 지금의 목소리가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마담? 아직 있지? 빨리 안 열어주면 뚫고 들어간다. 사암…, 이이…….
심장을 조이는 듯한 카운트 다운. 한세연은 무어라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발악하지도 못했다.
이일…. 땡. 안 되겠네. 안 열어주면 이쪽에서 열고 들어간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발소리가 뚜벅 뚜벅 멀어진다. 그러다가….
콰앙!!
“꺄악!!”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금속으로 된 문짝의 중심이 찌그러졌다. 한세연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콰앙!!
다시 한번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크게 흔들리며 기운다. 애초에 벙커용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며 잠금장치에 고정된 게 전부인 미닫이문이 버틸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문이 찌그러지며 생긴 틈새에 붉게 물든 손이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잠금장치가 달린 미닫이문을 완력으로 뜯어내듯 밀었다.
끼기기긱.
소름 끼치는 금속 소리와 함께 찌그러진 문이 강제로 개방된다.공포에 질려 있던 한세연의 눈에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잿빛 머리칼의 남자, 애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가드도.
문을 연 애쉬가 한세연에게 웃으며 말했다.
“대답이 없길래 벌써 어디 가버린 줄 알았잖아, 마담. 문 좀 열어주지 그랬어. 괜히 손만 찢어졌네.”
“애, 애쉬 님.”
“뭐, 괜찮아.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게 문제지. 그보다 캐리어?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고 했나봐?”
“그게 아니라….”
“괜찮아, 괜찮아. 여행이야 갈 수 있지. 내가 뭐 마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통제하는 사람도 아니고.”
한세연은 웃으며 자신의 말만 늘어놓는 애쉬를 보며 졸도할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애쉬는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그녀를 보고 말했다.
“아, 그보다 내가 좋은 걸 구했다고 했잖아.”
“예, 예…?”
“자.”
애쉬가 두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한세연에게 보였다. 공포심에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던 한세연은 그제서야 그것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피 묻은 전자 기어. 그리고 낯익은 데이터 팩 하나.
“그, 그건 설마…!”
“아, 마담은 모르지. 내가 아는 녀석한테 받은 건데, 이름이 ‘헤븐즈 게이트’라고 하더라고.”
설마 하는 그녀의 의심을 확정짓는 이름. 한세연은 죽음보다도 끔찍한 무언가를 보여주며 웃는 애쉬를 보고 당장 무릎을 꿇어 빌었다.
“아, 안됩니다. 애쉬 님! 속여서 죄송합니다! 제발!!”
애쉬가 저 위험하고도 위험한 물건들을 이곳까지 가져온 이유는 명백했다.
저것들을 그녀에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헤븐즈 게이트’를 발견한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잡스런 변명도, 아니라고 잡아뗄 여유도 모조리 사라졌다.
애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비는 한세연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응? 왜 그래. 내가 아는 놈이 그러더라고. 모르는 사람한테 받아봤는데, 사용하니 진짜 천국에 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마담도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않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애쉬 님!”
“아니. 누가 죽인데? 좋은 건 나눠야지. 가만히 있어. 내가 잘 해줄 테니까.”
“아, 아…. 아아아……!!”
가까워지는 애쉬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이 절망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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