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 후일담(1)
* * *
“이, 이이 망할 놈이!!!”
모든 일이 끝나고 찾은 73구역 외곽의 에리히 대장간.
포효와도 같은 노익장의 분노에 미리 귀를 막고 있던 애쉬가 몸을 움찔했다.
솔직히 지금 애쉬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없었다.
온갖 잔소리를 들으며 칼을 받아간 지 불과 보름. 그런데 또 하나를 해먹은 것이다.
그것도 방심하고 적과 놀아준답시고.
그 검의 희생 덕에 애쉬는 무사했지만, 그걸 보고 화내는 에리히 슈만에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히 밀어붙일 만큼 양심이 없진 않았다.
에리히 슈만이 손잡이만 남은 검을 보며 소리쳤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뭘 했길래 이 꼴이 돼!!!”
“아니, 뭐…. 그냥 주먹질 받다가 부러졌는데….”
“이 개놈의 자식!!”
“진짜야.”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게 그냥 주먹질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빨랐다는 게 달랐지만.
“잠깐만. 그건 부러뜨려 먹었는데, 대신 다른 걸 좀 챙겨 왔어.”
애쉬는 불같이 화를 내는 에리히 슈만에게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들고 온 상자의 뚜껑을 열어 재꼈다.
거기엔 예의 무광 처리된 검은 단검들이 담겨 있었다.
“…이건 뭐냐?”
검은 단검들이 조명 빛을 받아 은근한 광택을 뽐냈다.
애쉬가 직접 칼을 맞댈 때도 느낀 것이지만, 척 보기에도 보통 물건 같지는 않아보이는 자태다.
분노한 표정의 에리히 슈만도 그것들을 보고는 잠시 화를 가라앉혔다.
“이번에 그 칼 부숴먹은 놈들이 쓰던 단검인데, 잘 안 잘리더라고.”
“잘 안 잘렸다고?”
“어. 내 칼질 알지? 근데 몇 번을 버티더라니까.”
“…흐으음.”
애쉬의 말에 에리히 슈만이 침음을 흘렸다.
애쉬의 칼 솜씨. 아니, 그걸 칼 솜씨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도 애쉬가 쓰는 칼이 어떤 위력을 보이는지는 잘 알았다.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해 몇 번이나 실험했던 적이 있었던 만큼 애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는지 에리히 슈만보다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한 강철로 정련된 검 한 자루로 어지간한 합금도 무 베듯 단숨에 썰어재끼는 게 애쉬 론모어라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런 놈의 칼질을 몇 번이나 버텼다고?
그 말에 분노보다 커진 흥미가 에리히 슈만의 장인 정신을 자극했다.
그가 만든 검도 애쉬가 휘두르는 검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걸 몇 번이나 버텼다니 흥미가 안 생길 수 있겠는가.
“잠깐 줘 봐라.”
“자, 여기.”
애쉬가 상자를 에리히 슈만에게 넘겼다. 못해도 수십 킬로그램은 되는 상자였으나, 에리히 슈만은 그것을 거뜬히 받아냈다.
자신의 옆에 상자을 둔 에리히 슈만이 단검 하나를 꺼내 살폈다.
“이건….”
“뭔가 알겠어?”
무언가 알아본 듯한 에리히 슈만의 태도에 애쉬가 물었다. 저걸 녹여서 잘 써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가져온 단검들이 ‘회사’에 대한 단서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리히 슈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런 애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정보였다.
“이건 공장제다.”
“…응?”
“인간의 힘으로 만든 게 아니야. 인간은 이런 구조로 만들 수 없다.”
“아, 그런 뜻이었어.”
에리히 슈만의 말에 애쉬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냈다. 하지만 에리히 슈만은 단검이 인상 깊었는지, 그런 애쉬에게 화도 내지 않고 단검만을 살폈다.
“날을 보니 검은색으로 칠한 것도 아니군. 광택만 조금 줄인 건가?”
“…….”
에리히 슈만의 조사인지 뭔지 모를 행위는 몇 분이나 계속됐다. 애쉬는 그런 에리히 슈만을 앞에 두고 가만히 기다렸다.
노인장이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길 잠시. 에리히 슈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중하던 것을 멈추고 애쉬에게 물어왔다.
“이건 어디서 구한 거냐.”
“아까 말했잖아. 칼 부러뜨려 먹은 놈들이 가지고 온 거라니까.”
“칼을 부러뜨려 먹은 놈은 이놈아, 너잖느냐. 됐으니 어서 대답이나 하거라.”
“…나도 잘 몰라. 알아보곤 있는데 ‘회사’라나 뭐라나. 왜?”
노인장의 핀잔에 애쉬가 물었다. 그에 에리히 슈만이 단검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이 단검의 소재는 LQ013이라는 금속으로 보이는데, 그건 연방과 시 정부에서 관리하는 7급 통제물품이다. 이쪽 업계에서도 특별한 자격이 없는 이상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는 물건이야.”
“그래?”
“아마 그 ‘회사’라는 곳은 금속 자재를 취급하는 곳일 게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걸 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것도 규모가 꽤나 있는 곳. 이곳에 있는 단검만 수십 자루였는데, 시 정부에서 이런 날붙이나 만들라고 허가를 내려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다른 사용처에서 몰래 빼돌려 만든 것일 터였다.
그럼 그 주 사용처는 분명 규모가 상당한 곳이겠지.
그런 에리히 슈만의 추측에 애쉬가 물었다.
“근데 영감은 어떻게 알아봤대?”
“내가 예전에 이런 걸 다뤘었다.”
에리히 슈만은 다섯 개 도시의 연방 전체를 뒤져도 몇 없는 마스터 랭크의 장인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금속의 종류만 수백 수천 종은 될 정도로 온갖 금속을 다 다뤘었고, 애쉬가 가져온 물건도 그 중 하나였기에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데서 나올 리가 없는 물건이라 긴가민가했는데, 네가 얘기한 걸 생각하니 확실해 보이는구나.”
“그렇단 거지….”
금속 자재를 취급하는 회사. ‘회사’라는 배후 세력의 단서를 하나 찾았다.
애쉬는 그것을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애쉬가 에리히 슈만에게 물었다.
“그럼 이걸로 칼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 남은 건 다 가져도 돼.”
원래 이곳을 찾아온 주목적이 이것이었다. 이 심상치 않은 단검들을 녹여 자신의 검을 만들기 위함. 정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애쉬의 그런 물음에 에리히 슈만이 인상을 썼다.
“잘못 걸리면 이쪽도 손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걸로 검을 만들어달라고?”
시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물품들은 그 중요도에 따라 총 1~9의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에서도 7등급이라면 최상위 직전에 속한 물건이었다.
그보다 위에 있는 물건들은 일정 이상의 고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는 등의 특수 자재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사실상 이것이 일반적인 물품 중에서는 최고위라고 봐도 좋았다.
시 정부에 밉보여 귀천당하다시피한 이곳에서 다루다 걸린다면 상상이상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애쉬는 그런 에리히 슈만의 물음에 뻔뻔하게 대답했다.
“안 걸리면 되잖아.”
“…이놈이 자기 일 아니라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아, 그러고 보니 이걸로 영감이 말했던 최고의 검은 못 만드나?”
어영부영 넘어가려하기는. 그렇게 생각한 에리히 슈만이었으나,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도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사라져 있었다.
에리히 슈만이 애쉬에게 대답했다.
“흥. 이런 걸론 꿈도 꾸지 마라. 그건 적어도 8등급의 이상의 소재는 있어야지.”
* * *
모든 일에 있어 마무리라는 것은 중요하다. 어쩌면 일의 시작과 진행 과정보다도 말이다.
며칠 전 에리히 대장간에 다녀온 후 슬슬 정보도 어느 정도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레이라의 연락을 기다리던 애쉬였지만, 지금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그렇게나 중요한 끝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모든 게 사라졌어.
“대체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관리는 철저했어. 나도 이번 일의 중요성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철저했는데 흔적도 없이 모든 게 사라졌다고?”
…….
전화를 통해 돌아오는 무언의 긍정. 그에 애쉬는 미간을 구겼다.
아침부터 걸려온 레이라의 연락은 지난 사건의 마무리와 하루의 시작을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설명해봐.”
애쉬는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눌러 되돌리며 말했다. 그에 레이라가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아마 일이 터진 건 오늘 새벽이었을 거야. 어제 저녁까지는 분명 멀쩡했으니까.
그녀는 평소에도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활동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일이 벌어진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원채 잠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또 최근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내부의 분열과 그로 인해 생긴 피해에 대한 보고들, 그 후처리.
배신자, 빌레이 포튼은 과감하게도 레이라가 위치한 72구역의 ‘뱀파이어’ 본사를 치며 타 구역의 외부 지사들까지 동시에 기습했고, 그로 인해 본사에서 일어난 일에도 외부 지원이 빠르게 찾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레이라만 사로잡는다면 ‘뱀파이어’내에 존재하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용해 그대로 뱀파이어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행동이었지만, 실패한 지금은 뒤처리를 해야 하는 레이라에게 수많은 서류더미를 떠안겨주는 결과로 돌아왔다.
당장 밀린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일이 끝난 뒤라고 그녀가 마음 편히 쉴 수 있었겠는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펜이나 끄적일 수밖에.
오늘도 그렇게 시작하는 듯 했다. 사무실에서 깨어난 그녀가 버릇처럼 ‘한세연’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태를 확인하려고 연락을 했는데 회신이 없었어.
애쉬는 ‘헤븐즈 게이트’를 사용한 뒤 거품을 물고 기절한 한세연을 ‘뱀파이어’에 맡겼다. 그의 사무소에는 그녀를 따로 가둘 만한 공간도 없었고, 레이라 측도 그녀에게서 정보를 캐내길 원했기 때문이다.
레이라는 애쉬에게서 인계받은 한세연을 지하에 가두고, ‘헤븐즈 게이트’의 부작용이 오기 전 멀쩡한 상태에서 심문하며 그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 및 관리했다.
한세연은 ‘회사’의 마지막 남은 꼬리였으니 그것을 어떻게든 꽉 잡고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당연했다.
‘뱀파이어’ 내에서도 그녀의 직속으로 있는 정예들만이 그것을 지켰는데, 갑자기 연락이 닿질 않는다?
레이라는 아무런 회신이 없자 다급히 직접 한세연을 가둔 지하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방만을 발견했다.
전부 없어졌어. 내 부하들도, 놈들의 시체도, 한세연도. 그리고 전산실과 내 개인 단말기에 백업해뒀던 USB의 정보들까지.
“그렇다는 말은….”
아마도 ‘회사’ 측에서 손을 쓴 거겠지. 제대로 된 해커까지 동원하면서.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몇 시간 사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뒤늦게 CCTV 영상까지 확인해본 레이라였지만 그마저도 한세연이 들어온 며칠 전부터의 모든 영상이 완벽히 조작되어 있었다.
어떤 해커의 짓인진 알 수 없었지만 말 그대로 귀신같은 솜씨였다.
“놈들의 꼬리를 잡을 다른 방법은 없어?”
당신이 넘겨줬던 USB의 정보는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 게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해.
꼬리를 잡기는커녕 결정적인 증거를 잃어버린 이상 이쪽이 역으로 토벌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레이라의 말에 애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론은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엔 뒷맛이 너무도 구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애쉬의 한숨에 레이라가 무겁게 말했다.
변명할 생각은 없어. 결과적으로는 이쪽에서 놓쳐버린 게 맞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아, 됐어. 어쩔 수 없지.”
애쉬가 책임을 논하려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무렇지 않게 ‘뱀파이어’쯤 되는 거대 갱단의 본진을 헤집고 다는 놈들이다.
그 모든 것을 조작하고 흔적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레이라의 목숨 또한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번 일의 주체인 레이라에게까지 직접 손을 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쪽은 그냥 적당히 손 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회사’ 측에서 벌인 이번 일은 꼬리 자르기이면서도 일종의 경고처럼 보였다. 대놓고 위치가 드러난 데다 애쉬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제 몸 하나는 간수할 수 있지 않은 이상 그녀가 건들기엔 위험한 일 같다.
회사 측에서 파견됐다던 땅거미 부대만 해도 애쉬가 없었다면 ‘뱀파이어’의 본사 정도는 가볍게 정리했을 것이다.
애쉬가 직접 보고 느낀 그들의 무력은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대규모 갱단의 보스, 혹은 최고위 간부 수준이었다.
특히나 그가 상대했던 아뎀 같은 경우에는 그런 그들과도 차원을 달리했고.
그만한 무력집단이 몇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가 끝은 아닐 것이다.
“뭐, 아무튼. 그 얘기는 됐고, 약속했던 의뢰금은 받아야지. 설마 일이 이런 식으로 끝났다고 떼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하아…. 지금은 뒤처리 때문에 바쁘니까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볼게.
멋대로 자신의 행보를 정해버리고는 말을 돌리는 애쉬에게 레이라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를 걱정하기에 하는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끝내야만 하다니.
결국 이번 일로 그녀와 ‘뱀파이어’가 얻은 건 수많은 인적, 재산적 피해와 책상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인 서류더미 뿐이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연락 달라고.”
알겠어.
애쉬와 레이라는 그 뒤로도 일이 분 정도 잡다한 대화를 나누다 통화를 끊었다.
그럼 다음에.
“어.”
툭. 통화를 끊는 것도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듯 짧은 인사말처럼 깔끔하다.
그녀와의 통화를 끊은 애쉬는 바로 번호를 눌러 다른 곳에 연락했다.
레이라에게는 손을 떼라고 말한 그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여기서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뚜르르르. 신호가 가기 시작하고, 상대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아, 빌헬름. 난데,너 혹시‘회사’라고 아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