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47화 (47/230)

〈 47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 ­ 후일담(3)

* * *

“사장님, 드디어 끝이 보여요….”

레이라는 비서, 기운이 쭉 빠진 리엔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자들, 그리고 ‘회사’라는 세력에서 파견된 땅거미 부대로 인해 발생한 피해의 뒤처리가 드디어 거의 다 끝난 것이다.

벌써 며칠 째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던가.

좁은 소파에 몸을 누이고 쪽잠을 자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게, 아무리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그녀라고 해도 이런 강행군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 이제 퇴근할 수 있는 건가요?”

“이번 일만 마치면 며칠 정도 휴가를 줄 테니 쉬고 오세요.”

눈 밑에 그림자가 늘어진 다른 비서의 얼굴에 레이라가 대답했다.

현장이야 무너지고 부서진 것들을 복구하느라 바쁘겠지만, 이제 레이라와 비서들이 처리해야 할 일도 거의 마무리 되었다.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조금 한가해질 테니 고생한 비서들에게 그 정도 포상은 줄 수 있었다.

그런 레이라의 말에 비서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요?!”

“와아!”

“리엔! 내일 같이 쇼핑이나 갈까요?”

“좋아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아이들처럼 기뻐하는 비서들.

그러나 그런 그녀들과 달리 레이라는 아직 쉴 수 없었다.

‘63구역도 남았고….’

애쉬와 경찰들이 싹 정리한 63구역. 외부에서 그곳에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한다.

당연히 그것을 관리하는 것도 레이라 자신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외부 활동을 책임지는 ‘그’가 있었을 테니 믿고 맡길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는 없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끝을 맺었으니 말이다.

‘빌레이 포튼.’

그녀가 무의식중에 가족처럼 의지했던 남자도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욕망에 고뇌하고, 또 끝내는 그 욕망에 져버린.

레이라는 그가 마지막에 자신에게 내놓았던 대답을 떠올렸다.

‘네 모든 걸 갖고 싶었다.’

사랑인지, 아니면 성욕인지 모를 추잡하지만 순수한 욕망.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라가 자신에게 가진 감정에 이성을 향한 것은 없으며, 부모나 형제, 자매처럼 가족을 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레이라는 그 어리석은 배신자를 떠올리며 잠시 서류를 내려놓았다.

빌레이 포튼, 그 한 명의 부재는 제법 컸다.

그는 비록 배신자였지만 능력 있는 부하기도 했다.

외부 활동 외에도 ‘뱀파이어’의 최고위 간부로서 제법 많은 일에 손을 대고 있었는데, 이제 그가 없으니 레이라 자신이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빌레이가 만들어놨던 외부의 끈도 다시 정리해야했고,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배신자들의 정리도 남았다.

서류 작업이 모두 끝난 뒤에도 한동안은 바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또 시간을 내야하는 일이 있었다.

그 모든 일이 끝난 뒤 벌써 일주일도 더 지났다.

이제 슬슬 애쉬 론모어에게 미뤄뒀던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다.

이렇게 인내심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연락 한번 않고 기다려준 그에게 줄 대가를 더 미룰 생각은 없었다.

빚은 진 채로 시간을 끄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리엔. 내일은 일정을 모두 비워두세요.”

“아, 네, 사장님.”

레이라의 말에 비서가 대답했다.

결정은 느렸지만, 결심한 이상 행동은 빠를수록 좋았다. 바로 다음 날 일정을 모두 비운 레이라는 휴대폰을 들어 미리 기억해둔 번호를 찍었다.

애쉬 론모어, 그의 번호였다.

­ 뚜루루루.

귓가에 들려오는 신호음을 들으며 레이라가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

그 남자와의 관계가 어쩌면 지금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수도 있지 않을까.

* * *

가로 세로의 길이가 못해도 십여 미터는 넘어가는 거대한 벽면.

그곳을 가득 채운 홀로그램 화면 속에는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다.

어느 ‘유명한 가문’의 특징인 화려하다 못해 찬란하게까지 보이는 황금빛 금발과 눈동자.

시원시원하게 뻗은 콧대와 그 흔한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피부의 미남자.

언뜻 보기만 해도 귀티가 흐르는 황금의 미남자는 자신이 띄워진 벽면을 향해 반쯤 엎드려 떨고 있는 이들을 향해 가볍게 물었다.

­ 내가 지금 잘못들은 건가? 더스크(Dusk, 땅거미)가 생존자 하나 없이 전멸했다고?

“대,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들으신 바가 맞습니다….”

남자의 물음에 반쯤 엎드려 있던 이들의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정면, 고품질의 홀로그램으로 투사되고 있는 남자는 그 따위가 감히 눈을 마주칠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현대 사회에 신분제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간접적으로 대체하는 사회적 위치는 있었다.

홀로그램 속 남자가 과거 황제의 자식, 황위 계승 후보자 쯤 되는 위치라면 그의 위치는 일개 상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말실수 한 번이 자신의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물리적, 사회적으로 모두.

그러니 불편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그와 그 부하들이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지닌 대략적인 힘과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알고 있기에.

홀로그램 화면 속의 남자는 그들이 자신을 보며 덜덜 떨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 어떻게 당했지? 겨우 연방의 쓰레기통에서 당할 전력은 아니었는데.

“그게….”

대표 격의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들은 내용은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보고해도 될까?

홀로그램 속 남자의 눈치를 보며 고민하던 대표는 자신이 감히 남자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장 결심했다.

일단은 있는 그대로 보고한다. 그런 보고를 받은 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상대방이 할 일이었다.

“해결사 하나가 더스크 전원을 몰살시켰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영상은 구하지 못했으나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과격한 총격전 중에 CCTV가 파괴되어 찍힌 영상은 없었다. 그러나 전후 상황 상, 그리고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을 따르자면 그러했다.

그들, ‘회사’의 최정예 부대 하나를 밑바닥의 해결사 하나가 처치한 것이다.

­ 그 해결사에 대한 정보는 구해놨겠지?

“무, 물론입니다! 보고서를 올리며 함께 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홀로그램 화면 속 남자는 대표의 말을 의심조차 않고 물었고, 대표는 다급히 대답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 주변의 조사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그러나 가끔은 그런 것도 넘길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해결사, ‘애쉬 론모어’에 대한 조사를 마쳐놓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

홀로그램 속 남자 쯤 되는 ‘회사’의 최고위 인물과 대면하여 보고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 해결사라는 인물에 대한 소문에 너무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아서 어느 정도나 신빙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터무니없다?

대표의 염려에 남자가 물었다. 대표는 대답을 바라는 남자에게 곧장 답했다.

“예.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게 없어 주변을 캐거나 소문 등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땅거미를 홀로 상대한 그 해결사가 내츄럴(순수인간)이라느니,

상처를 입지 않는 무적이라느니,

연방에서 키워낸 비밀병기라느니,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 외에도 소문은 많았지만, ‘애쉬 론모어’에 대한 소문들은 정말 하나같이 헛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잡다한 얘기들로 가득했다.

땅거미 부대는 ‘회사’ 바깥으로 나갔을 때 도시 전체를 뒤져도 상대를 찾기가 힘든 괴물들이었다.

‘회사’에서 막대한 돈과 수 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최고의 인간병기들.

그런 그들을 혼자 몰살시켰다는 것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심지어 그런 놈이 내츄럴이라는 소문이 돈다?

신빙성을 따지기 전에 헛소문으로 치부하는 게 당연했다.

땅거미 부대의 전멸과 관련된 이번 보고도 모든 목격자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다면 아마 안건에 올릴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 흐음….

그런 대표의 보고를 들은 남자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대표와 그 부하들은 가만히 그런 남자가 생각을 마치길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 시선을 다시 대표와 부하들에게로 돌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모조리 챙겨서 보고하도록 해.

“티끌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대표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홀로그램 화면 속의 남자는 잠시 그런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표는 그런 시선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보고는 대충 끝나는 분위기. 하지만 이제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았다.

바로 이번 실패에 대한 문책이었다.

대표는 이번 실험과 그 뒷일을 책임지는 이였고, 그 일들의 실패는 곧 그의 실패였다.

­ 이번 일로 생긴 손실이 제법 커.

“예, 예.”

땅거미 부대는 남자가 손안에 두고 있는 전력 중에서도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전력을 이런 상상도 못한 일로 잃은 것은 정말로 뼈아픈 타격.

그것은 어떻게든 곧 남자의 경쟁자들에게 알려질 것이었고, 그로 생길 손실은 지금보다도 더욱 커질 터였다.

­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아야겠지.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대표의 사죄는 남자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겉보기엔침착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사실 그는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그저 그것을 겉으로 표하지 않고 있을 뿐.

관계자들을 처벌해봤자, 남자의 손실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화풀이 거리가 필요했다.

­ 조만간 사람을 보낼 테니 기다리고 있도록.

“예? 자, 잠시…!!”

남자가 말한 사람을 보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챈 대표가 다급히 일어서며 말했지만, 이미 홀로그램으로 투사되던 남자의 모습은 사라졌다.

반대편에서 연락을 끊은 것이다.

“안 돼….”

대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런 대표를 위로하지도, 그렇다고 무어라 말을 걸지도 못했다.

이제는 모습을 감춘 남자에게 저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그들 또한 알고 있었기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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