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 후일담(4)
* * *
띠릭.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컥.
63구역. 펜데일 호텔 앞.
무인 택시의 AI가 인사와 함께 깔끔히 차려입은 애쉬가 문을 열고 차량에서 내렸다.
주변을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아, 답답하네.”
차에서 내린 애쉬가 괜히 불편한 바짓단 따위를 슬쩍 당기며 중얼거렸다.
검은 셔츠에 마찬가지로 까만 슬랙스. 팔에는 겉옷을 대충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 가벼운 티와 청바지 따위의 편안한 옷차림으로 다니던 모습과 대비됐다.
굳이 불편한 옷을 입은 모습이 어찌나 보기 힘든지 그의 외출차림을 본 샤인이 훈련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크게 놀랐을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애쉬 스스로 이런 불편한 차림을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애쉬는 호텔의 정문을 통과해 가드의 인사를 받으며 로비를 통과했다. 유흥가에 있는 곳이라지만 가격대가 좀 있는 제대로 된 호텔이었기에 가드도 제법 훈련받은 테가 났다.
그뿐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도 꽤나 신경을 쏟았는지, 검은 대리석으로 된 바닥과 벽에 걸려있는 그림 따위가 흥취를 살린다.
이곳 도시 외곽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정말 괜찮은 곳이었다.
‘라운지 바에서 만나자고 했었지.’
로비를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애쉬는 레이라와 잡은 약속을 떠올렸다.
통화를 통해 들려오던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내일 오후 7시. 펜데일 호텔 라운지 바에서 봐.
60구역에 위치한 어느 호텔의 라운지 바에서 만나자던 그녀의 제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단숨에 승낙한 애쉬였지만, 직후 이어진 레이라의 말은 그의 잔뜩 좋아진 기분을 조금 깎아먹었다.
드레스 코드가 있는 호텔이니까 저번 ‘베이론’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입으면 들어오지 못할 거야.
불편한 옷을 좋아하지 않아 집에 정장 한 벌 없는 그에게 드레스 코드가 있는 호텔이라니.
드레스 코드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린 이상 위치를 바꾸자고 하기도 뭐했다.
결국 그날 애쉬는 늦은 저녁까지 괜찮은 옷가게를 찾아 헤매다 옷을 구입했고, 지금 이렇게 입고 있다.
전날 그런 수고가 있었지만, 애쉬는 그다지 짜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를 안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상대방, 레이라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만한 미인의 처음을 갖는 일은 무척이나 소중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그녀도 생에 첫 경험을 아무렇게나 보내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계약의 대가로 받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녀의 처음을 장식하는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수고도 감내할 수 있었다.
띠링. 1층입니다.
녹음된 여성 목소리의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애쉬는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내린 뒤 탑승해 층을 살폈다.
고급 호텔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엘리베이터 내부도 신경을 썼는지, 층을 선택하면 그 층의 부조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홀로그램이 떠올라 안내했다.
애쉬는 그 중 약속 장소, 라운지 바가 위치한 24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적지인 24층에 도착했다.
띠링. 24층입니다.
스르륵. 엘리베이터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은근한 재즈가 들려온다. 열린 문 밖으로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연주가들이 보였다.
레이라가 약속 장소로 정한 라운지 바는 나름의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와 너무 밝지 않은 주홍빛 조명.
각자의 테이블에 앉은 연인, 혹은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런 모습들마저도
한데 잘 어우러져 하나의 정경을 그려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애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약속 상대인 레이라를 찾았다.
현재 시각은 오후 6시 46분. 레이라의 성격을 봤을 때 진작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면 있었지, 결코 약속시간에 늦을 사람은 아니다.
호텔의 라운지 바는 꽤나 넓어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었다.
애쉬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찾았고, 곧 바텐더를 정면에 두고 바 테이블에 앉은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행 분께서 오실 때까지만 잠시 어울려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다만 옆에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가 추근대고 있는.
‘저것 봐라.’
애쉬가 임자 있는 여성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를 보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레이라 특유의 아우라는 제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그녀는 스쳐가는 뒷모습만 봐도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이었다.
솔직히 남자들이 추근거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애쉬 자신이라고 해도 어딘가에서 저런 미녀를 발견한다면 마음이 혹할 테니까.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발소리도 죽이고 레이라에게 다가간 애쉬는 그녀에게 수작을 부리는 남자의 어깨에 툭 손을 얹었다.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손을 느낀 남자가 그를 돌아봤다.
“거긴 내 자리인데 비켜주지 그래.”
*
“언제 도착했어?”
“십 분 정도 전에.”
“일찍도 왔네. 추근거린 것도 저 남자가 처음은 아니지?”
“…두어 번 정도 더 있었지.”
레이라는 귀찮게 굴던 남자를 쫓아낸 뒤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어오는 애쉬에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지금보다 이른 오후 6시 30분 정도.
애쉬가 쫓아낸 남자 외에도 몇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 옆자리에 앉거나 말을 걸어왔지만, 일관적으로 돌아오는 차가운 반응에 물러났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쉬는 날 어디를 나가기라도 하면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까. 귀찮은 거야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레이라의 대답에 애쉬가 픽 웃으며 반응했다.
“그럴 것 같았어. 나라도 가만히 냅둘 것 같지는 않거든.”
“그래?”
“그럼.”
그녀의 물음에 애쉬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사실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애쉬나 추근대던 남자들이나 다를 건 없었다.
이쪽이나 그쪽이나 성욕이라는 하나의 욕구에 따른 것은 같았으니까.
‘그래도 느낌은 좀 달라.’
이쪽은 별로 불쾌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조금 기대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어디서 그런 차이가 온 걸까.
레이라가 잠시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추근거리던 남자들과 달리 애쉬는 그녀 쪽에서 먼저 제안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더 잘난 외모 때문?
“그나저나 기다리면서 먼저 한 잔 하고 있었나보네? 아, 여기 딘 베넬로 한 잔.”
“예. 얼음 필요하신가요?”
“아니.”
레이라는 자신의 칵테일을 보곤 바텐더에게 주문하는 애쉬를 한 차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훑었다.
옷차림은 검은 셔츠에 검은 슬랙스.
전신을 완전히 검은색으로 무장한 패션은 다시 보아도 썩 센스가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애쉬 특유의 잿빛 은발, 진청색 눈동자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자신을 감평하는 레이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애쉬가 물었다. 그에 레이라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패션 센스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그렇게 별론가?”
“옷만 보면, 응.”
“옷만 보면?”
“그래도 전체적으론 나쁘지 않아.”
괜히 신경 쓰였는지 물어오는 애쉬에게 레이라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옷차림만 보면 꽝이었지만, 그럼에도 애쉬의 비현실적인 비율과 외모는 그마저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건 다행이네.”
레이라의 대답에 애쉬가 안심했다. 곧 바텐더가 주문한 술을 내왔다.
바텐더에게서 잔을 받은 애쉬는 곧장 그것을 레이라를 향해 들어보였다.
“자, 짠 할까.”
술자리의 친한 친구를 대하듯 가벼운 태도.
레이라는 그런 애쉬를 잠시 쳐다보다,
“후후. 그래.”
작은 웃음과 함께 반쯤 남은 칵테일 잔을 마주 들었다.
이 남자가 그렇게 싫지 않은 이유는 이런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
*
시간이 흐를수록 비어가는 잔이 많아지고, 점차 레이라의 얼굴에도 홍조가 올랐다.
애쉬는 모처럼 생긴 사적인 자리에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듣자하니 ‘뱀파이어’라는 이름의 유래가 로맨스 영화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야?”
“푸훗, 로맨스 영화에서 이름을 따온 거냐고?”
애쉬의 뜬금없는 물음에 레이라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정말로 어이가 없어 웃긴다는 듯이.
자리가 지속되며 술이 제법 들어간 그녀는 취기가 오른 것인지 평소와 달리 감정표현이 풍부해져 있었다.
평소의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과 달리 지금의 그녀는 딱 그 나이대의 젊은 여성으로 보인다.
애쉬도 그런 그녀를 보며 웃고는 물었다.
“아니야?”
“그야 당연히.”
“그럼?”
“‘밤의 귀족’이 될 거라는 의미에서 단 이름이지, 로맨스 영화라니. 후후….”
역시 헛소문이었나.
애쉬의 질문에 그녀가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애쉬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조명을 받아 은은히 반짝이는 어두운 금발과, 만지면 묻어날 것처럼 새하얀 피부.
고양이처럼 도도한 눈매, 에메랄드빛의 눈동자를 지나 오똑한 콧날을 타고 내려가면 사랑스럽게 상기된 뺨과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자리하고 있다.
평소의 그녀에게서 찾을 수 없는 그런 미소는 애쉬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충동을 끓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도 너무 길어지면 참기 힘들겠는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감정을 교류하는 자리도 좋았지만, 점차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는 애쉬의 심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입술을 훔치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처음 전화받았을 땐 장난 전환 줄 알았다니까. 갑자기 누가 전화해선…….”
“응, 당신 입장에선 그랬을 수도 있겠네.”
“그래서 다시 찾아왔을 때는 좀 놀랐어.”
………
……
…
그렇게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며 술이 오가던 중, 어느 순간 애쉬의 인내심은 한계를 맞았다.
레이라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일주일을 넘게 금욕했다. 오로지 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가뜩이나 힘이 넘치는 상황에서 술까지 들어갔으니….
사실 여기까지 온 것도 그 나름대로는 대단히 큰 참을성을 발휘한 것이었다.
“…….”
“…….”
언제부터인가 대화가 끊기고,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던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애쉬와 눈이 마주친 레이라는 그의 눈동자 안쪽에서부터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욕망을 느낀 듯 놀라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알까. 평소의 그녀에게선 찾을 수 없던, 이 자리에서만 보이고 있는 그런 갭이 오히려 애쉬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대화가 끊어진 채 술잔만 만지작거리길 십여 초.
짧지만 지나칠 정도로 길게 느껴지던 그 순간을 깬 것은 역시나 애쉬였다.
“올라갈까.”
이곳은 호텔의 라운지 바. 올라가자는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제 약속의 때가 된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술기운을 조금 가라앉힌 레이라가 물었다.
“…방은 잡았어?”
“아니.”
레이라의 물음에 애쉬가 대답했다. 호텔에 도착한 그는 뭔가 할 틈도 없이 곧장 이곳까지 올라왔다.
그런 애쉬의 대답에 레이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에 올려뒀던 숄더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
4~5cm 정도 될까. 펜데일이라는 마크와 함께 숫자가 적힌 열쇠고리를 달고 있는 카드.
바로 이곳 호텔에 위치한 어느 방의 카드키였다.
레이라가 카드키를 꺼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과감히 레이라의 부드러운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올라가자는 듯이.
“자, 잠깐.”
이렇게 급히?
술기운을 조금 가라앉히며 침착함을 되찾은 레이라가 당황할 정도로 애쉬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애쉬는 그런 그녀를 배려할 만큼 여유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그러나 처음과 달리 확실하게 레이라의 손을 당겼고,급히 숄더백을 챙긴 레이라는 생에 처음으로 타인의 손에 이끌려 움직였다.
항상 주도적으로 움직이던 그녀에게 그것은 정말 색다른 상황이었다.
‘뱀파이어’라는 거대 갱단의 보스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여자가 된 기분.
처음 겪는 일에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결코 그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상상이상으로 긴장되고 심장이 두근두근한 경험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