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 후일담(7)
* * *
“흐으….”
해가 중천에 뜬 것을 넘어 슬슬 기울어가기 시작하는 시간.
레이라는 메마른 목소리로 작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까무룩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안고 있던 단단한 몸과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갔나.’
방 안에 따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레이라는 그가 벌써 자리를 떠났음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아쉬움과 함께 애쉬의 부재를 알아챈 레이라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윽.”
몸을 일으키려 침대를 짚고 힘을 주던 레이라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온 몸이 욱신거려.’
깨어난 직후에는 몰랐는데, 현재 그녀의 몸 컨디션은 영 좋지 않았다.
온몸에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고, 밤새 괴롭혀진 뱃속에는 아직도 무언가가 들어있는 듯한 이물감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지금도 뭔가 들어있긴 했지만 아무튼.
밤새, 심지어는 날이 밝아온 뒤까지도 계속해서 애쉬에게 괴롭혀진 결과였다.
정말 이상해질 것 같다며 그렇게나 사정사정을 했는데, 애쉬는 끝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잠결에도 한번만, 한번만 더 하는 애쉬의 속삭임에 중간 중간 비몽사몽한 상태로 깨었을 정도다.
그래도 다행히 먼저 깨어난 애쉬가 자리를 비우며 나름의 뒤처리를 해준 모양인지,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땀과 체액에 끈적거리던 몸이 좀 상쾌한 느낌이다.
그뿐 아니라 방 전체를 환기 시키고 뭘 뿌리기라도 했는지 불쾌한 냄새도 없었다.
“지금 몇 시야?”
정말이지 다행인 사실에 레이라는 몸을 일으키길 포기하고 침대맡의 조명에 대고 물었다. 그에 조명에 달린 AI가 대답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31분입니다.
“아….”
4시 반이라고? 시간을 들은 레이라가 누운 채 이마를 짚었다. 날이 한참 밝은 것을 보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엄청난 늦잠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애쉬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잠자리를 가질지 몰랐기에 오후에는 일정이 잡혀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큰일이네.”
휴대폰을 들여다보기가 싫다. 분명 비서들의 부재중 연락이 잔뜩 와 있을 것이었다.
아마 비서들도 크게 놀랐겠지. 그녀와 일한 몇 년 동안 레이라가 이처럼 연락도 없이 결근한 적은 없었으니.
뒷일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는 그녀였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마음만큼은 이보다 더 가벼울 수가 없다.
잠시 더 누워있을까 고민하던 레이라는 결국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체 얼마나 낸 건지 밑에서 뭔가 주륵 흐르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애써 무시하고 겉옷에서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애쉬도 겉이나 닦아줬지, 안쪽까진 어떻게 해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역시나. 십여 통의 부재중 전화 표시와 수십 개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그녀의 개인 연락처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많이도 왔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부재중 통화 기록은 일단 넘긴다.
레이라는 메시지부터 살폈다.
[사장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애쉬와의 약속이 있던 것을 아는데 연락이 되질 않자 쏟아진 수십 통의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신변을 걱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레이라는 그것들을 읽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갑작스러운 결근을 한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렇게 가벼운 기분에 찾아온 비서들의 걱정은 제법 유쾌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렇게 메시지들을 읽어 내려가던 레이라는 가장 최근 도착한 메시지들을 보다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어날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한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본다.]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는데, 그녀를 위해 해줄 건 다 해주고 갔으면서도 아닌 척 툭 던지듯 투박한 말투를 보니 괜히 미소가 그려진다.
애쉬가 남긴 메시지는 안 그래도 입가에 걸려있던 그녀의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최근들이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몸은 움직일 때마다 피로와 약간의 통증을 호소했지만, 지금만큼은 그 느낌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 * *
“저, 저기….”
“왜.”
어느 영업장의 뒷골목.
뒤따르던 중년 남성, 의뢰인의 조심스런 부름에 애쉬가 인상을 팍 구기며 대답했다.
이전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벌한 기세와 눈초리. 의뢰인은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쁜 상태인 애쉬의 눈빛에 헉, 하고 말을 삼켰다.
도저히 의뢰인이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의뢰인은 그냥 말하려던 것을 포기하려 했으나, 애쉬가 그를 재촉했다.
“뭔데. 빨리 말해.”
“그게, 여기까지만 하시면 되지 않나 싶어서….”
“…여기서 끝내자고?”
“예, 예에. 이 정도면 이 녀석들도 충분히 알아먹었을 겁니다….”
“흠.”
의뢰인의 말에 애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뢰인과 그가 나온 골목길 바닥은 이미 스물에서 서른에 달하는 놈들이 타일처럼 빼곡히 깔려 있었다.
“으으으….”
“샬랴줘….”
이가 전부 나가서 발음이 새는 놈, 팔의 뼈가 완전히 조각나 축 늘어진 놈, 옆구리를 짚고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놈 등등.
모두 갱이라고 하기도 뭐한 양아치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디 한 곳 이상을 부여잡은 채 신음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은 기분이 안 좋은 애쉬였다.
“이대로 그냥 보내자고?”
“예. 어차피 제대로 된 갱도 아니고 그냥 동네에 어린 녀석들이 모인 정도인 것 같으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긴 좀 아쉬운데.”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본 애쉬가 중얼거렸고, 그런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의뢰인과 양아치들이 질린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애쉬의 말은 진심이었다.
레이라와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찾아든 연락.
의뢰인은 자신의 영업장에 다시 수십의 양아치들이 찾아왔음을 알렸고, 애쉬는 A/S를 해주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쳐 잠든 레이라를 홀로 두고 움직였다.
원래는 깨어나면 같이 식사도 하고 감정의 교류를 조금 즐겨야 했는데 말이다.
그의 이름을 듣고도 뻗댔다는 것만 들어도 진짜 뒷세계의 녀석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일이 그렇게 됐으니 당연히 애쉬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의뢰인의 영업장을 찾은 애쉬는 화풀이삼아 평소보다 손을 과하게 썼고, 스물 남짓한 양아치들을 적어도 수개월 이상 요양해야 할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돌아가면 저희가 잘 대접할 테니 이쯤 하심이….”
의뢰인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애쉬를 살살 달랬다. 아무리 자신에게 피해를 준 놈들이라고는 해도 여기서 더 가면 시체가 나올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을 치워야 하는 것은 그와 종업원들이었다.
의뢰인은 속 시원하게 두드려 패주는 정도면 됐지, 멋모르는 어린놈들의 시체를 치우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대접한다고?”
“예. 최고만 엄별해 놓겠습니다.”
애초에 애쉬에게 연락할 때부터 생각해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며 그를 유도하는 의뢰인.
평소 술과 여자는 거절하는 법이 없는 애쉬였으나,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말이었다.
“됐어. 지금 먹으면 입맛만 버려.”
레이라가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조리된 일종의 예술 요리라면, 의뢰인의 영업장에 있는 직업여성들은 동네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력 메뉴 정도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격차가 나는데 마음에 차겠는가.
“그래도, 뭐. 이쯤하지.”
그러나 애쉬는 잠시 풀어헤쳤던 검은 셔츠의 앞섶을 다시 여미며 돌아섰다. 지금의 그는 사무소에도 들르지 못해 레이라와 만났던 옷차림 그대로인 상태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술과 안주라도 준비를 해둘 테니….”
“그러던가.”
의뢰인의 첫 제안은 거절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그 자신도 일에 비해 조금 과하게 손을 썼다는 의식도 있었고, 그래도 좋은 일이 있던 날인데 더 피를 보며 기분을 망칠 이유가 없었다.
“어린 것들이 헛짓거리 하지 말고 집에서 공부나 해라.”
애쉬가 바닥을 구르는 양아치들에게 툭 던지고는 발걸음을 옮겼고, 그것을 조금은 황당하게 지켜보던 의뢰인이 뒤를 따랐다.
‘척 봐도 본인 또래로 보이는데, 그럼 본인도 공부나 해야 할 때 아닌가.’
의뢰인의 속마음.
중년에 들어선 의뢰인의 눈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양아치들이나 중후반 정도의 애쉬나 그냥 고만고만한 또래로 보였지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예정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어.”
양아치들은 그들이 떠난다는 소식에 안도했고, 속내를 숨긴 의뢰인은 애쉬를 극진하게 모셨다.
둘이 떠나가고 몇몇 양아치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만이 울리는 63구역 유흥가의 어느 뒷골목.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이곳의 일상이었다.
메인 에피소드 달의 꽃과 뱀파이어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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