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3. 빌헬름 메이젤(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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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꽃’과 ‘뱀파이어’의 사건으로부터 한 달이 조금 더 지났다.
애쉬는 언제나와 같이 사무실에 출근해선 뒷세계의 다크 웹 커뮤니티, ‘게이트’을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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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63구역은 뱀파이어가 다 쳐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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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미친칼잡이가 부리고 돈은 뱀파이어가 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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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9)
익명 – 내가 미친칼잡이였으면 그냥 혼자 다 해쳐먹었는데
└ 익명 – ㄹㅇ
익명 – 비추 왤케 많냐
└ 익명(작성자) – 모기새끼들이 누른듯 ㅋㅋ
익명 – 왜 우린 63구역 후딱 안들어갔냐고 거기 걸린 돈이 얼만데
└ 익명 – 뱀파이어가 좆으로 보이냐?
└ 익명 – 뱀파이어 보스는 좆이 아니라 젖아님?
└ 익명 – 이새끼 깡좀봐라 ㅋㅋㅋ 모기새끼들한테 걸리면 바로 모가지다
└ 익명 – 아 ㅋㅋ 지들 보스 갖고 노는 게 꼬우면 찾아보던가~ 느그 보스 창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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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겁 없는 새끼 좀 봐라.”
여러 게시글들을 보던 애쉬가 중얼거렸다.
다크 웹, ‘게이트’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는 입 밖으로 꺼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소리들을 저렇게 대책 없이 지껄이는 놈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애쉬는 ‘게이트’의 보안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아는 해커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 대해 헛소리를 떠들어대는 놈들을 찾아낸 다음 직접 손봐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일정 실력 이상의 해커가 붙으면 어떻게든 허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것을 아는 놈들은 아무리 ‘게이트’내라고 해도 저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지 않았다.
우연찮게 저런 게시글을 본 당사자가 큰맘 먹고 값비싼 해커를 고용해 보안을 뚫기라도 한다면 그 날이 제삿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녀였던 그녀보고 창녀라니, 말도 안되는 모함이었다. 애쉬는 레이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겁과 개념을 상실한 익명에게 친히 댓글을 달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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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 – 아 ㅋㅋ 지들 보스 갖고 노는 게 꼬우면 찾아보던가~ 느그 보스 창녀~
└ 애쉬 론모어 – 내가 봤는데 처녀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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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중에 돌아올 반응들을 생각하며 실실 웃고 있을 때였다.
여자치고는 살짝 허스키한, 듣기 좋은 미성이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뭘 보면서 그렇게 웃어?”
“프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에 애쉬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의 화면이 바닥을 향하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
조금은 어두운 빛으로 반짝이는 금발과 열대의 바다를 담은 듯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의 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읽던 댓글에서 떠들어댄 ‘뱀파이어’의 보스, 레이라 플로리스였다.
그녀는 가끔 이렇게 그의 사무실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평소에도 그냥 이렇게 지내?”
자신의 물음에 대충 웃어넘기는 애쉬를 본 그녀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애쉬는 이상할 정도로 한가한 사무실의 분위기와 자신을 지적하는 듯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 가끔은 의뢰도 나가긴 하는데 대체로 비슷해.”
레이라의 말대로 현재 애쉬는 무척이나 한가했다.
몇 시간째 직접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그나마 오는 연락이라곤 샤인 선에서 모두 처리하고 있다.
의뢰서야 하루에도 수십씩 들어오긴 하지만 그마저도 샤인이 간략하게 정리해주니 그로서는 그것을 잠깐 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크 웹, ‘게이트’나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애쉬 당신도 대단하네.”
감탄하는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모를 레이라는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괜찮네.’
이런 허름한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게 좋은 원료를 쓴데다 꼬마 샤인의 커피 내리는 솜씨도 제법이라 그 향만큼은 까다로운 레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쉬는 그렇게 커피를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조차 그림이 되는 그녀를 보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다 네 덕분이지.”
실제로 그녀가 지난 의뢰에서 준 대금은 다른 대가를 제하더라도 절대로 적은 게 아니어서 아무리 돈을 물처럼 쓰는 애쉬라도 한동안은 일을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응.”
그런 애쉬의 반응에 레이라가 티 나지 않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애쉬는 그녀가 지불한 크레딧을 말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사고는 거기에 이어 다른 대가를 주었던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둘은 한 번 즐거운 만남을 가졌었다.
“아, 그나저나 63구역은 네 쪽에서 완전히 먹었다며.”
그 몸짓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에 레이라가 괜한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한 걸 모르는 애쉬가 물었다. 문득 ‘게이트’에서 봤던 게시글의 내용이 떠오른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춘 레이라는 애쉬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뱀파이어’는 빌레이의 배신으로 한 차례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애쉬가 63구역을 미리 정리해준 덕에 깔끔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레이라가 유일하게 ‘회사’ 놈들에게 감사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이 애쉬를 움직여준 덕분에 내부가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간단히 먹어치울 수 있었으니.
아마 앞선 애쉬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그를 경계해 63구역이 정리된 후에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외부 세력들과 한바탕 큰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슬럼 전체를 봐도 ‘뱀파이어’만한 세력은 몇 없었지만, 그들이 장님이 아닌 이상 ‘뱀파이어’에 분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달의 꽃’은 어때?”
잠시 63구역에 대한 얘기를 듣던 애쉬가 물었다.
63구역 하면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바로 ‘달의 꽃’과 한세연였다.
“글쎄….”
애쉬가 그 중 ‘달의 꽃’에 대해 묻자 레이라는 자신이 직접 들렀던 ‘달의 꽃’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았다.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어.”
한 구역에 있는 최대의 영업장이다. 63구역을 집어삼킨 그녀로서도 꾸준히 신경 쓰며 관리해야 할 대상이었기에 한 번 직접 들렀었는데, 그들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갑자기 사라진 지배인, 한세연과 가드들을 모조리 때려눕히며 그녀를 끌고 간 애쉬.
아마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최대 고객이던 애쉬가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달의 꽃’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있던 한세연이 아무런 준비나 인수인계도 없이 사라지자 영업 전체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고, 레이라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슬슬 한계에 도달했을 때였다.
“내가 갔을 때는 흔들리고 있었지.”
한세연은 레이라와 비슷하게 혼자서 많은 일을 처리하는 타입이었다.
수완이 좋았던 한세연은 혼자 대부분의 거래와 영업장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영업장이 어떻게 됐겠는가.
영업장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거래처들과 연락이 끊기자 그로 인해 서비스의 질이 하락했고, 그에 따라 손님들이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수순.
한세연이 사라진 지 불과 일주일. 우상향 곡선만을 그리던 ‘달의 꽃’의 가게부에도 하락세가 보일 정도의 위기였다.
“그럼 지금은?”
레이라의 짧은 얘기를 들은 애쉬가 물었다.
한세연을 그렇게 만들고 그 뒤로는 ‘달의 꽃’에 들르지 않은 그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서 일하던 이들에게까지 정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다이애나, 미온, 미츠미 등등. 당장 돌아보아도 기억나는 이름이 여럿이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곳을 신나게 다녔는데, 애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여성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한 짓이 있다 보니 지금은 차마 들르지 못하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 영원히 발길을 끊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
애쉬의 물음에 레이라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대로 그냥 두었다면 63구역에서 가장 화려하게 핀 꽃이라던 ‘달의 꽃’도 끝내 져버렸을지 모른다.
직원들으로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그만한 영업장을 운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대로 정상화 된 상태였다.
레이라 또한 한세연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수완을 가진 사업가였고, 기존에도 ‘뱀파이어’라는 거대한 기업형 갱단을 운영하고 있던 그녀에게 ‘달의 꽃’만한 영업장 하나를 다루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금 ‘달의 꽃’은 한세연 대신 새로운 관리자를 위임시키며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다행이네.”
그런 레이라의 대답에 애쉬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달의 꽃’에서 보았던 직원들이 싸구려 창관 따위로 떨어지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언제 한번 또 들러야겠네.’
이제 시간도 한 달이 넘게 지났으니 슬슬 회포를 풀 때가 되었다. 애쉬가 유흥가에 가지 않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건 정말 기록적인 일이었다.
“또 가려고?”
“그야 물론.”
그런 애쉬의 생각을 읽은 듯 레이라가 물어왔지만, 애쉬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 다시 한번 레이라와 밤을 보냈지만, 역시나 그녀 혼자서는 애쉬의 체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에게 메이는 건 그의 성격 상 맞지도 않았고.
레이라는 애쉬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묘한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것을 겉으로까지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럼 괜히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 것 아닌가.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대신 흘리듯 중얼거리며 그를 시험했다.
“그런 데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는데, 나도 한번 가볼까.”
“뭐? 아니, 네 자유긴 한데….”
레이라의 중얼거림을 들은 애쉬가 화들짝 반응했다. 명백히 거부감이 느껴지는 반응이다.
그녀에게 소유욕이라도 느끼는 걸까.
자기도 이쪽저쪽이랑 다 놀아나면서 그녀에게 차마 그러지 말라고는 하지 못하겠는지 직접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도가 명백히 느껴졌다.
레이라가 속이 보이는 애쉬를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그, 이왕이면 나한테 연락하지? 시간은 언제든 내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아마.”
애쉬가 말을 살짝 바꿨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그녀와의 만남을 우선시 하지 않을까?
“풋. 알겠어. 나중에 연락할게.”
레이라가 말을 흐리는 애쉬를 보며 웃었다.
처음부터 어딜 갈 생각도 없긴 했지만 저런 반응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와 애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에게 어느 정도 감정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레이라와 애쉬는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대화를 계속했고, 그것은 어느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계속됐다.
띠리리링!
조용히 둘의 분위기를 헤치지 않도록 일에 집중하던 샤인이 울리는 벨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살폈다.
전화가 온 곳은 샤인의 업무용 전화가 아니라 애쉬의 사무용 책상에 비치된 구식 유선 전화기였다.
샤인은 자신의 업무용 전화로 해당 전화를 끌어와 수신자를 살폈다.
전화를 건 상대는 WM이라 저장된 사람이었는데, 샤인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아마 애쉬가 개인적으로 저장해둔 대상 같다.
샤인은 그것을 함부로 받지 않고, 먼저 애쉬를 불렀다.
“사장님, 사장님 편으로 전화 왔어요.”
“전화?”
“네.”
“누군데?”
“수신자는 WM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 녀석이? 알겠어. 잠깐만.”
레이라와 대화를 나누던 애쉬가 곧장 샤인에게 다가와 전화를 들었다.
WM. 애쉬가 얼마 전 ‘회사’에 대해 알아볼 것을 부탁한 해커, 빌헬름 메이젤의 이니셜이었다.
뭔가 알아내면 연락해준다더니 장장 한 달 만에 연락한 것이다.
뭐라도 알아낸 것일까?
“어, 빌헬름. 무슨 일이야?”
애쉬는 수화기를 들었고, 곧 들려온 상대방의 대답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게, 제가 지금 좀 좆된 것 같은데, 도와줄 수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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