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3. 빌헬름 메이젤(막간)
* * *
“아, 잘 먹었다. 역시 햄버거에 콜라, 감자튀김은 최고라니까요.”
패스트푸드를 모조리 처리한 빌헬름이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렸다.
레이라와 연락처를 거래할 때는 기운이 없었으나 시간이 좀 지나자 이제는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
빌헬름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기운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가볼까요?”
“어딜?”
“이대로 그냥 지나가기엔 아쉽잖아요. 흐흐, 절 곤란하게 해줬으니 선물은 주고 가야죠.”
음침하게 웃던 빌헬름은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전원 불빛이 들어오는 손가락 두 개만 한 단말기 몇 개.
빌헬름이 꺼내든 물건을 알아본 애쉬의 눈빛이 변했다. 빌헬름과 일할 때 몇 번 사용한 적이 있었던 물건이다.
멀리서부터 신호를 송수신하여 원거리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빌헬름의 특제 단말.
처음부터 저걸 사용했다면 여기까지 애쉬를 불러내며 구원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뭐야. 그것도 가져왔었어?”
“이건 어딜 가도 챙겨 다니는 물건인데요.”
“그럼 처음부터 그거나 쓰지, 왜 안 써서 날 여기까지 오게 하냐.”
처음부터 저걸 통해 원거리로 조작했다면 걸린 순간 쉽게 몸을 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단말기 하나쯤이야 잃을 수도 있었겠지만, 안전 여부의 차이는 매우 컸다.
그런 애쉬의 지적에 빌헬름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야 저도 그렇게 빨리 걸릴 줄 몰랐죠. 게다가 이건 직접 연결하는 거에 비해 전송 속도가 절반도 안 된다구요. 오늘 이걸로 작업했으면 60%는커녕 20%나 겨우 넘겼을 걸요?”
“그래서 죽을 뻔 했고?”
“네.”
“잘~한다.”
“안 죽었으면 됐죠, 뭐.”
애쉬가 비아냥거리고 빌헬름은 뻔뻔하게 받아넘긴다. 잠깐 얘기를 주고받던 둘은 금세 뜻을 맞추고 일을 계획했다.
“목표는 당연히 그 츠미모톤가 뭔가 하는 스시 그룹이지?”
“당연하죠. 계속 캐온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찔러볼 만한 게 몇 보여서요.”
내부의 비리나 회사 차원에서 실행된 불법행위 등. 본사가 아니라 외곽 지사였음에도 확인되는 게 너무 많다.
빌헬름은 자신이 봤던 것들 중 몇몇을 생각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에 애쉬도 동조하며 씩 미소 지었다.
“한 번 제대로 엿을 먹여주죠.”
“프흐, 재밌긴 하겠네.”
“…아직 츠미모토 주변에는 보안 요원들이 쭉 깔려 있을 텐데?”
둘의 얘기를 듣던 레이라가 지적했다.
빌헬름과 애쉬가 그곳에서 빠져나온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보안 요원들이 벌써 수색을 포기하고 그 주변을 비웠을 리가 없었다.
“놈들을 건들면 상당히 성가셔 질 거야.”
사실 츠미모토의 보안 요원들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놈들을 어떻게 하면 즉시 튀어나올 공권력이 있었다.
이곳은 53구역. 나름 도시 내부에 위치한 곳으로, 시 정부에서 반쯤 손을 놓은 외곽의 슬럼과는 치안의 수준이 달랐다.
만약 이곳에서 슬럼에서와 같은 소란이 벌어진다면 즉시 무장한 경찰들이 벌떼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런 레이라의 지적에 빌헬름이 대답했다.
“물론 저희 목표는 츠미모토 사옥이 아니에요.”
빌헬름도 레이라가 지적한 부분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지금 츠미모토 53구역 지사의 보안 요원들을 건드려봐야 좋을 건 없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목표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해하는 게 아니었다.
“전광판이 달린 빌딩들을 찾아볼까요? 이왕이면 큰 게 달린 곳으로.”
놈들의 민낯을 까발려 보자. 당장 내려받아온 츠미모토 53구역 지사의 자료 일부분만으로도 그들을 엿 먹이기엔 충분했다.
빌헬름은 다른 둘에게 계획을 설명했고, 애쉬는 적극적으로, 레이라는 어쩌다보니 거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
레이라는 빌헬름이 넘겨준 소형 단말기를 들고 어느 고층 빌딩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 쪽이라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이걸 꽂으면 된다고 했지.’
빌헬름이 설명한 계획은 간단했다.
빌헬름 자신과 애쉬, 레이라가 소형 단말기를 회로에 잘 꽂으면 그것을 통해 빌딩에 달려있는 대형 전광판을 해킹하고, 츠미모토 53구역 지사의 비리를 전광판에 띄운다.
레이라가 해야 할 것은 그냥 이곳에서 맞는 회로를 찾아 단말기를 꽂고 자리를 피하는 것. 그것 밖에 없었다.
주변 CCTV는 다 처리해뒀으니까 단말기만 잘 꽂아주세요.
어.
신경 통신을 통해 말하는 빌헬름과 대답하는 애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획 수립자인 빌헬름도, 거기에 동의한 애쉬도 수십에서 수백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각자 다른 빌딩에 선 상황.
무슨 비리를 터트려볼까~
“…….”
앞으로 벌어질 일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꺼려하던 레이라의 존재조차 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빌헬름.
곧 그가 대기하고 있던 레이라와 애쉬에게 말했다.
준비 끝났어요. 지금 바로 꽂아주시면 돼요.
오케이.
“확인했어.”
애쉬와 함께 대답한 레이라가 미리 찾아뒀던 회로 단자에 소형 단말기를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피했다.
남은 건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
“준비 끝났어요. 지금 바로 꽂아주시면 돼요.”
오케이.
확인했어.
신경 통신을 통해 돌아오는 대답과 함께 다른 두 곳에서도 신호가 잡히기 시작한다. 그것을 확인한 빌헬름은 통신을 끊은 뒤 눈을 감고 외부 신호들을 받아 신경 인터페이스에 로드했다.
[Loading…….]
“어디 한번 수준 좀 볼까?”
뚜둑. 가볍게 목을 꺾으며 집중한다.
곧 인터페이스를 통해 눈이 빠질 정도로 복잡한 문자의 배열이 떠올랐다. 방화벽이었다.
[CF684KEOAKSPAIQPOWQAMO8091KL2871AJSLWJ……….
…….
…]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무규칙해 보이는 패턴.
그러나 빌헬름은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보고 씩 웃었다.
“아, 역시 쉽다 쉬워. 역시 거기가 이상한 거였다니까.”
츠미모토만 한 대기업과 일반 보안업체가 관리하는 빌딩들은 비교할 수도 없다.
빌헬름은 동시에 떠오른 세 개의 방화벽을 단숨에 공략하고 안쪽으로 나아갔다.
‘이건 아니고, 이건… 내부 인트라넷?’
방화벽을 해치고 들어가면 건물 전체에 퍼져있는 전산망이 잡힌다. 빌헬름은 그 중에서도 전광판을 통제하는 회선을 찾아 헤맸다.
“찾았다.”
애쉬 쪽의 전광판 라인을 잡은 빌헬름은 다른 두 곳에 집중했고, 나머지 두 곳의 전광판도 금방 장악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여전히 상대가 알아챈 기색은 없다.
어중간한 해커들이라면 하나만 붙잡아도 소요 시간이 수 시간은 들어갈 일들이었는데, 동시에 세 곳을 공략하면서 순식간에 처리한 것이다.
빌헬름은 공략을 끝내자마자 츠미모토의 데이터를 담은 개인 단말에서 정보를 뽑아냈다.
단말기와 연결된 손목 파츠로부터 문자의 강이 흘러들어온다.
그것을 지켜보던 빌헬름이 곧 있을 츠미모토의 반응을 상상하자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날 겁먹게 한 벌이다.
* * *
“저거 뭐야?”
“…고발?”
츠미모토의 본사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몇 km떨어지지 않은 53구역 번화가. 길을 가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웅성거렸다.
[고발합니다.]
[츠미모토 53구역 지사의 지사장 아도라 베덴은…….]
거대한 전광판.
거기에 입체적으로 떠올라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이미지와 붉은색 문자들 때문에.
그리고 번화가의 길거리 외에도 난리가 난 곳이 더 있었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당장 내리라고 해!!”
츠미모토의 53구역 지사 최상층에 위치한 사무실. 금발 여성의 악에 찬 목소리가 찢어질 것처럼 울렸다.
그녀가 바로 아도라 베덴. 지금 번화가의 대형전광판들에 떠올라 있는 고발문의 주인공인 츠미모토 53구역 지사의 지사장이었다.
그런 그녀의 분노에 비서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게 시스템이 완전히 뒤집혀서 당장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합….”
짜악!!
“억!”
대표로 나서서 말하던 비서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뺨을 맞고 반쯤 날아가듯 쓰러졌다.
쓰러진 비서의 입에서는 피와 함께 부서진 이가 쏟아졌다.
체격이 크지 않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성인 남성을 날려 보낼 정도로 강한 근력.
츠미모토 53구역의 지사장, 아도라 베덴은 강화 시술을 받은 강화인간임에도 일반인에게 사정없이 손찌검을 하는 여자였다.
비서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음에도 아도라 베덴은 화가 풀리지 않아서는 소리쳤다.
“이건 분명 그 쥐새끼들 짓이야! 당장 나가!! 나가서 찾아오라고!!!”
“예, 옛!!”
그녀의 폭력에 놀란 비서들이 쓰러진 비서를 부축하고 다급히 지사장 사무실을 나섰다.
당장 그들에게도 지사에 침투했던 해커들을 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비서들은 갈 곳 없는 불꽃이 자신에게 번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자리를 피했다.
아아악!!
문 밖에 나선 비서들의 귀에 지사장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소리 지르며 집기 따위를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
“흐흐흐, 지금쯤이면 완전 발광하고 있을 걸요?”
“큭큭.”
“…당신들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힘들겠네.”
레이라가 웃고 있는 빌헬름과 애쉬를 보며 생각했다.
저 둘은 적으로 돌려선 절대 안 될 인간들이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