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4. 유성 그룹(1)
* * *
“흐아암….”
이른 아침, 간만에 사무실에 일찍 출근한 애쉬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TV를 켰다. 무려 18,000 크레딧을 주고 구매한 최고급 제품이었다.
깨끗하고 선명한 화질의 홀로그램 영상이 투사되어 형태를 이룬다.
애쉬가 적당히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바라봤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20분.
시간을 본 애쉬가 중얼거렸다.
“…일찍도 일어났네.”
최근 애쉬는 빌헬름과 ‘회사’에 대한 단서를 찾아다니거나 잡다한 의뢰를 처리하는 등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시간에 사무실로 내려온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
그럼에도 오늘은 이렇게 일찍 일어난 이유가 있다.
“사장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어.”
아침에도 여전히 기운 넘치는 샤인이 물어와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슬럼도 말이 빈민가지 돈만 있으면 대부분의 물건은 구할 수 있었다. 슬럼이라고 물품 배송이 오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슬럼의 주민들에 의해 배송 드론이 격추되어 물건을 못 받는 경우도 가끔 있긴 하다.
샤인이 건네는 뜨거운 커피를 받은 애쉬가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 의뢰인은 언제쯤 온데?”
“정확히는 듣지 못했지만 오전 열 시 이전에는 온다는 것 같아요.”
“그래?”
아, 이놈의 슬럼은 수신 채널도 적어서 마음에 안 든다니까.
샤인의 대답을 들은 애쉬가 짜증스럽게 틱틱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리다 결국 오늘도 어느 드라마 채널에서 멈췄다. 얼마 전에 봤던 드라마가 또 방영 중이다.
대충 리모컨을 툭 던져놓은 그가 다시 한번 샤인에게 물었다.
“무슨 의뢴지는 전혀 못 들었고?”
“네, 그쪽에서는 사장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알려줄 수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하, 얼마나 대단한 일을 맡기려고.”
애쉬가 코웃음 쳤다.
평소였다면 오후 한 시 이후에나 출근했을 그가 오전 9시 전부터 사무소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얼마 전, 애쉬가 다른 일로 인해 자리를 비웠을 때부터 전화했던 의뢰인은 전화를 받은 샤인에게 매일같이 사장은 언제쯤 만날 수 있냐며 연락을 해댔고, 그것을 전해 들으면서도 귀찮음 때문에 미팅을 미루던 애쉬였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는데도 연락이 계속되다보니 마음 약한 샤인의 부탁에 날을 잡은 게 바로 오늘.
그간의 정성도 있고 하니 상대방이 원하는 시간대로 맞춰서 기다리고 있긴 한데, 이래놓고 고양이 찾기 같은 시답잖은 일이면 짜증이 좀 많이 날지도 몰랐다.
그렇게 불퉁한 자세로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자 어느덧 시계 바늘은 오전 9시 48분을 가리켰다.
딸랑딸랑.
애쉬가 출근한 이후 처음 울리는 작은 종소리. 자연스럽게 애쉬와 샤인의 시선이 문 쪽으로 닿았다.
뚜벅, 뚜벅. 유난히 무거운 구두 소리.
그곳에는 척 봐도 이곳 슬럼가의 주민이 아니라는 것이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후반. 얇은 은색 테 안경과 왁스를 발라 잘 정리한 머리,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정장은 단순한 양품이 아니라 제대로 된 명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특유의 아우라를 풍기는 것 같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남자의 외견은 이 지저분한 슬럼이 아니라 깔끔한 도시 안쪽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남자에게서 색다른 무언가를 느낀 애쉬가 그를 향해 고갯짓했다.
“연락했던 의뢰인이지? 여기 앉아.”
“예.”
남자는 손님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에게 턱끝으로 지시하는 애쉬의 건방진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일단은 합격.’
애쉬가 그것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옷을 보니 이곳 슬럼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도 순순히 따르는 건 마음에 든다.
남자의 반응에 플러스 점수를 준 애쉬는 입을 열어 다짜고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의뢰를 맡기고 싶길래 이렇게 귀찮게 군거야?”
“흠, 그건….”
애쉬의 물음에 남자가 말을 흐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대놓고 빨리 끝내자는 듯 본론부터 꺼내는 애쉬에게 감정이 상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대충 알고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남자였지만, 그의 시선은 애쉬가 아니라 손님에게 대접할 커피를 내리고 있는 꼬맹이, 샤인에게 닿아있었다.
애쉬도 곧 그걸 눈치 채고 말했다.
“저 꼬맹이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말해. 충분히 교육시켜서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는 녀석은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어.”
“그럼….”
애쉬의 확언에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들고 온 서류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매끄러운 검은 광택이 흐르는 전자 기기.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다.
남자는 꺼낸 물건을 조작해 그 위에 가로세로 수십 센티 정도 되는 홀로그램을 띄워보였다. 그 화질이 애쉬가 얼마 전 구매했던 18,000 크레딧짜리 TV보다도 좋아 보인다.
‘저런 건 얼마나 하려나.’
모르긴 몰라도 더럽게 비싼 물건일 것이다. 애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홀로그램을 터치해 뭔가를 만진 남자는 애쉬의 앞으로 그 물건을 밀어보였다.
“응?”
남자가 애쉬에게 보여준 그것은 3D로 재현된 하나의 영상이었다.
그림자가 어둑어둑 깔린 저녁, 잿빛 머리칼의 남자와 그를 둘러싼 수십의 인간들.
잿빛 머리칼의 남자, 영상 속 애쉬 론모어를 둘러싼 인간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안구에서 형형한 기계의 빛을 흘리고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양 팔이 겉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검은 빛을 띠고 있는 둥, 자신들이 신체 개조를 받은 사이보그와 강화 인간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은 애쉬 자신도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2년 하고도 반년 더 전, ‘오마르의 망치’를 쳐부술 때. 그 마지막쯤에 있던 싸움 직전의 모습이다.
입체적으로 구현된 3D 영상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 싸움을 완벽하리만치 구현해냈다.
어둠 속을 그어 내리는 시퍼런 칼날과 허공에 번지는 청색 안광. 그가 지나칠 때마다 불법 개조 사이보그들과 강화인간들의 사지가 떨어져나간다.
예고도 없이 총탄이 쏟아지는가 하면, 영상 속 애쉬는 칼날을 휘둘러 그것을 튕겨내고, 그에 놀랐는지 얼빠진 모습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갱들에게 달려가 목을 떨어뜨린다.
“오.”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장면이라는 건 알았지만 애쉬는 어떤 영화보다 화려하고 화끈한 일련의 흐름에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끝내 빗발처럼 쏟아지던 총탄과 각종 개조인간들을 휩쓴 그가 홀로 선 채 3분 정도 되는 짧은 영상이 멈췄다.
애쉬도, 커피를 준비해 가져오던 샤인도, 남자도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대단한 영상이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기에 더욱.
그 짧은 적막을 가장 먼저 깬 건 영상 속의 주인공인 애쉬였다.
“멋진데? 이건 또 언제 찍었대.”
“당시 근처를 지나던 배송 드론의 캠에 담긴 영상이 있었다더군요. 그걸 홀로그램 3D로 재구성 해본 겁니다.”
“오, 대단하구만. 이따 갈 때 나한테도 영상 좀 주고 가, 주인공이 난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물론입니다. 그보다.”
“그보다?”
남자는 뻔뻔한 애쉬의 태도에 잠시 주춤했지만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 아, 날 주인공으로 영화라도 찍고 싶어? 그런 거라면 특별히 좀 싼 값에 해줄 수도 있는데.”
애쉬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툭툭 던지며 픽 웃었다. 남자는 그런 애쉬의 농담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 그럼?”
“이 영상이 진짜라면, 호위 의뢰를 맡기고 싶습니다.”
“‘이 영상이 진짜라면?’”
애쉬가 남자의 말 앞에 붙은 단서에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는 애쉬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의뢰 대금은 최소 수백만 크레딧. 일천만 크레딧 이상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큰돈을 쓰는 만큼 최소한의 검증은 거쳐야합니다.”
“검증이라고?”
“예, 그 정도는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다라.”
그래, 뭐.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요구였다. 천만 크레딧이라는 거액은 우습게 볼 수 있는 돈이 아니었으니까.
돈깨나 많아 보이는 이 남자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 그만한 돈을 쓰는 만큼 확실하게 하고 싶겠지.
그로서도 완전히 이해 못할 요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애쉬는 저 검증이라는 말이 너무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의심할 거였으면 애초에 찾아오질 말았어야지.
그가 삐딱한 태도로 툭툭 던지듯 물었다.
“뭐, 그래. 검증 좋지. 그럼 내가 네 앞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쳐내고 강철을 잘라 보이는 차력 쇼라도 해보이면 되나? 응?”
최소 수백만, 천만 크레딧 이상도 얼마든지 생각하고 있다는 엄청난 거금의 의뢰. 여태껏 애쉬가 받아왔던 의뢰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초대형 건수.
아니, 기존의 최대 금액을 갱신했던 레이라의 의뢰의 대금 절반 정도가 다른 대가로 대체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쪽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돈으로도 애쉬의 마음을 좌지우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돈? 물론 좋다. 수백만, 혹은 천만 이상의 크레딧이라면 슬럼 인간들은, 아니, 슬럼을 넘어 도시 내부에 살고 있는 주민들조차 평생 손에 쥐기 힘든 엄청난 거금이었으니.
하지만 애쉬에게 있어 돈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돈일 뿐 그렇게 중요한 가치는 아니었다.
돈이 그렇게까지 중요했다면 매일 농땡이나 피우며 가끔 일하는 것으로 먹고 살고 있었겠는가.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남자는 애쉬의 거부와 명백한 분노 직전의 짜증에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금액을 듣고도 애쉬가 이리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애쉬는 그런 남자를 보고 괜히 속이 더 배배 꼬이는 것을 느꼈다.
그야 그렇겠지. 슬럼에서 흙이나 퍼먹고 사는 줄 알았던 칼잡이 주제에 천만 크레딧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도 못하는 게 당연하시겠지.
“당신을 구경거리로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됐고, 일 없으니 가라.”
애쉬는 벌떡 일어나 변론하려는 남자를 무시하듯 리모컨을 들어 잠시 꺼뒀던 TV를 켰다. 드라마 채널의 소음이 조용하던 사무실 내부를 채웠다.
남자는 애쉬의 짜증과 의뢰를 거절하려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진짜 쫓겨나고 일은 무산이 돼버리고 만다.
‘이대론 안 된다.’
남자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제 이곳이 마지막 남은 보루였다. 이미 도시 내부의 대형 경호 업체들에게조차 모두 거절당한 이상 이곳에서까지 거절당하면 완전히 끝이라고 봐도 좋았다.
뒷세계의 커뮤니티에서 발견한 영상을 보고 반신반의하며 찾아온 사무소.
믿기 힘들지만 전문가들은 영상에 아무런 조작도 없다고 했다. 이 남자가 정말로 영상 속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는 최고의 칼이자 방패가 되어 주리라.
남자는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타인을 내려다보는 눈빛, 천만 크레딧, 혹은 그 이상이라는 엄청난 거금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
애쉬에게는 자신이 최고임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보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반드시 이 남자에게서 도움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찰나의 순간 고민하던 남자는 곧 판단을 마쳤다.
그리고 결심한 뒤 TV 앞을 가리고 섰다. 그 겁 없는 짓거리에 애쉬가 왈칵 짜증을 쏟아냈다.
“뭐해? 빨리 안 나가? 내가 내쫓아줄….”
“…부탁드립니다!! 저희 아가씨를 살려주십시오!!!”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저 자신의 절실함, 진심을 전하는 것.
물질적인 가치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에게 가장 잘 통하는 무기.
남자는 그것을 위해 자존심을 꺾고 도시 밑바닥의 해결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