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4. 유성 그룹(2)
* * *
“…….”
애쉬는 남자가 이렇게까지는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무릎 꿇은 그를 내려다봤다.
척 봐도 도시 안쪽에서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살아왔을 것 같은 샌님.
그런 남자가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밑바닥의 해결사 하나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무릎 꿇으며 외친 말을 봤을 때 아가씨인지 뭔지를 지켜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아가씨라는 사람이 그리도 소중한가?
그래서요?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라고…….
여보….
적막 속에 막장 드라마의 대사들이 배경음처럼 조용히 흘러가는 와중에 애쉬는 생각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이쯤하면 그냥 가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의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죄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 자존심을 포기한다는 것은 애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대한 일이다. 아마 저 남자에게도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다시 한번 소리치는 남자. 그것을 본 애쉬가 고민했다.
‘한 번 봐줄까.’
이 정도면 자신을 재보려고 한 것, 돈으로 어떻게 해보려 한 것은 됐다. 완전히 마음을 푼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죄를 받았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틱.
잠깐 고민하던 애쉬는 결국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조용한 사무실에 울리던 유일한 소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리모컨을 내려둔 애쉬가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퉁명스러운 목소리. 그것을 들은 남자는 순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패인가? 이 해결사마저 놓친다면 정말로 아가씨는 그 안위를 보장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모든 게 끝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가….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고개를 한층 더 깊이 조아리며 외쳤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어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를…!”
“아, 일어나라고.”
“받아주실 때까지는 못 일어납니다!!”
“뭐? 잠깐, 야, 이런 씨. 이거 안 놔? 애도 보는데 자존심도 없냐? 아, 알겠다니까!”
남자가 애쉬의 다리에 매달려 애걸했다. 놀란 샤인이 시선을 돌렸고, 애쉬는 생떼를 부리는 것 같은 남자의 반응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대체 그 아가씨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길래.
당황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애쉬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남자의 고개가 불쑥 솟아올랐다.
정말로?
애쉬는 고개를 든 남자의 절절한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바로 받아주는 건 아니고, 일단 얘기는 들어 봐준다. 참고로 난 마음에 안 들면 뭔 짓을 해도 안 하니까 알아둬.”
“예, 예! 감사합니다!”
“바로 받아주는 거 아니라니까.”
애쉬가 투덜거렸지만, 남자는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변할까 다급히 일어나 자신이 챙겨 온 서류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자료들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을 본 애쉬가 남자를 멈췄다.
“그런 건 됐고, 그냥 입으로 말해. 뭘 의뢰하고 싶은 건지.”
사인에게도 늘 그래왔듯 간단히 정리한 요약을 선호하는 애쉬다.
그런 그의 요구에 남자는 무엇부터 얘기해야할지 머릿속을 정리하는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저는 유성 그룹의 비서입니다.”
“…유성 그룹?”
“예.”
*
남자의 이름은 에아임 펠턴. 유성 그룹의 고위 임원 중 하나를 보좌하는 수석 비서라고 한다.
애쉬는 그런 남자의 신분을 듣고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성 그룹’
총 73개 구역으로 나뉜 이 대도시, 웨인 시를 주름잡는 초거대 기업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곳의 고위 임원의 수석 비서라 함은 도시의 최상류층.
그런 대단한 엘리트가 도시 밑바닥의 슬럼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유성 그룹이 얼마나 거대한 기업인가 하면 애쉬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값비싼 홀로그램 TV도 유성 그룹의 계열사인 미래전자의 제품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유성 그룹은 빌헬름이 꼽은 ‘회사’의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
그런 대기업 소속 고위 임원의 비서가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걸까.
그것도 그렇게 필사적인 태도로 애원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이름과 사회적 직분을 밝힌 남자, 에아임 펠턴은 얘기를 계속했다.
“지난 달 말, 회장님께서는 잠정적인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아, 저 그거 뉴스에서 본 것 같아요. 사장님도 같이 보셨을 텐데….”
“그랬나?”
“네.”
에아임의 말을 듣던 샤인이 애쉬에게 속삭였다.
애쉬는 대충 넘겨들어서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샤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 큰 뉴스긴 했던 모양이다.
둘은 이어지는 에아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장님께서는 외부에 잠정 은퇴를 발표하시며 회사 내부의 고위 임직원들에게 후계 경쟁의 시작을 선언하셨죠.”
“후계 경쟁?”
“예. 회장님의 아드님이신 부회장님을 비롯한 손자, 손녀 분들 모두가 대상이 되는 일종의 정쟁, 아니, 전쟁입니다.”
유성 그룹은 대대로 이러한 정쟁을 벌이고 있으며, 지금의 회장도 그 치열한 전쟁 끝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결과 회장의 자리를 손에 넣은 것이라고 한다.
애쉬는 그것을 들으며 어지간히 막장 드라마 같은 얘기라고 생각했다. 샤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얘기를 듣다 애쉬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제가 의뢰하고 싶은 건 제가 모시는 아가씨의 호위입니다.”
에아임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한 장의 사진과 함께 호위 대상의 대략적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호위 의뢰든 무슨 의뢰든 의뢰 대상에 대한 숙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기에 애쉬는 그것을 받아 살펴보았다.
*
이름 : 유서령
나이 : 23세
성별 : 여성
사내 직위 : 상무이사
[사진]
(새까맣고 풍성한 장발과 검은 눈동자. 동양형 미인의 사진이 붙어있다.)
[주요 가족관계]
회장 유진혁
↓
부회장 – 유장혁
↓
(유서령을 비롯한 그녀의 형제자매 다섯이 나열돼 있다.)
거주지 : 제 1구역 내의
근무지 : 제 2구역 유성 미래전자 웨인 지부 본사
생활 패턴 : 오전 7시 기상.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오전 8시 40분 출근하여 오후 6시까지 회사 내에서만 근무…….
특이사항 : 키위 알레르기
외부 출장이 잦음
………
……
…
*
다른 사항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먼저 애쉬의 눈에 들어온 건 의뢰 대상의 외모였다.
‘아가씨라더니 관리를 잘 받아서 그런가 미인이네.’
호위 대상의 이름은 유서령.
밤하늘을 펼쳐놓은 듯 풍성한 흑발과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진한 흑진주의 눈동자.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었다. 그것도 온갖 인종이 다 섞인 이 웨인 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지구의 한국 느낌의.
애쉬는 그녀의 외모에서 묘한 향수를 느끼며 다른 사항들을 읽었다.
나이 23세.
사내 직위……?
“상무이사?”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살펴본 애쉬. 그러나 다시 보아도 대상의 사내 직위는 그대로였다.
에아임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나 서류를 다시 읽던 애쉬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상무이사가 맞습니다. 가족 관계를 보시면 유성 그룹의 회장 되시는 유진혁님께서 아가씨의 조부가 되십니다.”
“허….”
에아임의 말을 듣고 가족관계까지 살펴본 애쉬의 입에서 감탄인지, 아니면 허탈한 건지 모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물셋에 상임이사가 맞다고? 유성만한 초거대 기업에 이딴 미친 낙하산 인사가 존재하다니. 이런 거 보면 이 세계는 어째 지구보다 더한 것 같다.
애쉬가 생각했다.
에아임은 그런 애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어느 정도 프로필을 살핀 것 같자 설명을 이어갔다.
“보시다시피 의뢰 수행 지역은 제 2구역 및 그분의 거주지인 제 1구역입니다. 의뢰 기간은 후계 경쟁이 끝날 때까지이며 준비를 위해 지금 당장이라도…….”
“아니, 잠깐.”
애쉬가 에아임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지적할 곳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애쉬는 먼저 묻지 않으면 안 될 것들에 대해 말했다.
“회장의 직계에 그룹의 주력인 미래 전자의 상임이사라면 최고 수준의 경호원들이 붙지 않나?”
“당연히 붙습니다. 언제나 다수의 경호원들과 비서들이 뒤따르죠.”
“그럼 그 녀석들이면 충분하지 않아?”
애쉬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성 그룹은 그냥 대기업도 아니고 초거대 그룹이었다. 그룹 내에는 방위산업체도 있었으며 경호원들은 그 첨단 산업의 결정체로 무장됐을 것이다.
애쉬는 유성 그룹 정도 되는 거대 기업에서 맘먹고 손을 쓴 사이보그들의 수준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았다.
앞서 싸워봤던 ‘회사’의 ‘땅거미 부대’만 해도 그 비슷한 이들 아니던가.
물론, 일개 경호원들이 ‘땅거미 부대’ 만큼의 힘을 발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지만, 그럼에도 슬럼의 갱단들이 불법으로 시술 및 개조한 강화인간, 사이보그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진흙탕에서 만든 깡통 로봇과 대기업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첨단 로봇의 차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애쉬의 물음에 에아임이 답했다.
“일단 저나 다른 비서들은 전투 능력이 전무합니다. 훈련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는 일벌레들이라서요….”
간접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추가되는 것. 이것은 무척이나 큰 사항이긴 했다. 하지만 경호원도 다수가 붙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호원도 다수 붙는다며?”
“그건 다른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저희 측은 타 경호 업체의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곳은 다 받고?”
“예….”
“아하.”
그러니까 이쪽이 만만한 타겟이다 이거군. 짧은 대화로도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애쉬가 생각했다.
프로필을 보니 이 유서령이라는 늦둥이 아가씨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30대의 나이에 그룹 내에서 한 자리씩 꿰고 있었다. 최소 부사장에서 사장급.
그 중에서 호위 대상만 상임이사급이다.
그런 와중에 에아임의 말이 뜻하는 것은 다른 경쟁 상대들이 최우선 목표로 찍은 게 호위 대상, 이 유서령 아가씨라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최우선 탈락 대상으로 찍히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대부분은 둘 중 하나다. 너무 유력한 후보라 협력해서 먼저 치고 시작해야 하던가, 아니면 약해 빠져서 잔가지 치기하듯 먼저 정리당하는 경우던가.
이 경우는 후자였다.
거기까진 이해한 애쉬가 다른 부분에 대해 물었다.
“일단 그건 알겠어. 근데 굳이 죽이기까지 하나? 일단은 피를 이은 가족인데?”
가족 간의 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돈 앞에서 그런 것이 의미를 잃는 것은 몇 번이나 봐오지 않았나.
애쉬가 묻는 것은 그래도 핏줄인데 경쟁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회장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