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4. 유성 그룹(9)
* * *
“그럼 의뢰 조건이나 조율해볼까?”
“…네, 그러죠. 에아임.”
“예.”
에아임이 서령의 무름에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미리 준비해뒀던 서류들을 가져왔다.
약 200장 정도. 그러니까 작은 책 한 권 분량이 되는 종이 뭉치가 해결사의 앞에 놓여졌다.
애쉬는 그것을 보고 떨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건 또 뭐야?”
“미리 준비해뒀던 계약 조건이에요. 한 번 읽어보세요.”
“그냥 적당히 말로 설명해 주지 그래.”
“저희 측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항들과 기타 위반 조항들을 적어놓은 문서입니다. 읽어보셔야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조율 후 수정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 호위가 그냥 따라다니면서 잘 지켜주기만 하면 되지.”
그 빽빽한 글씨와 종이의 양만 봐도 질렸다는 듯 애쉬는 에아임이 가져온 문서 더미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온 에아임은 해결사가 저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서령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미 애쉬의 사무소에서 한 번 겪은 일이었다.
“제가 잘 설명하고 조율해보겠습니다.”
“…네. 저는 일단 옆에서 지켜볼게요.”
서령의 허락 하에 에아임과 애쉬의 의견 조율이 시작됐다. 그것은 서령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 엉망이었다.
“일단 기존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의뢰 대금은 최소 300만 크레딧에서 최대 1천만 크레딧 이상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이는 의뢰 수행 기간과 위험도에 비례하여…….”
“어.”
“그 중 선금은 100만 크레딧이며 나머지는 의뢰 종료 후에 지급을…….”
“알겠어.”
“기본적으로 숙식은 저희 측에서 처리하며…….”
“엉.”
그것은 그냥 의견 조율이라고 할 것도 없는 광경이었다. 에아임이 간략하게 정리해 말하면 애쉬는 YES로 대답하는 것이 전부.
굉장히 유명한 해결사라고 하더니 어째 의뢰 조건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서령은 할 말을 잃은 채 그것을 지켜봤다.
“잠깐. 그건 좀 바꿔.”
“어느 부분을 말입니까?”
서령이 그런 둘의 대화를 신기하게 구경하는 사이 드디어 처음으로 애쉬의 NO가 나왔다.
에아임이 읊던 부분은 애쉬의 거취 부분이었다. 에아임이 제시한 조건은 호위 대상, 그러니까 서령의 근무 시간에는 그녀와 함께 상시 함께하며 근무시간 이후에는 거주지에 들기 전까지 호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그것을 뒤집었다.
“어차피 회사 내에서는 별 일 없을 거야. 그쪽도 알지? 유진혁 회장이 있는 이상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
회사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가장 뛰어난 이를 골라내는 후계 경쟁이다. 그런데 심판인 유진혁 회장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회사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놈을 후계로 뽑을 리도 없었고, 사내에서 살해 공작을 벌이는 것을 지켜볼 것 같지도 않았다.
애쉬가 생각하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출퇴근 시간과 그녀가 혼자 생활하는 집,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외부 출장이었다.
“아가씨의 근무 시간에는 기본적으로 자유행동, 하지만 이곳 미래전자 본사에서 벗어날 일이 있으면 대동하는 걸로 하지.”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에아임이 서령을 바라봤다. 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고 거친 인간처럼 보였는데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서령은 그의 첫인상이 조금 바뀌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래도 명성을 날리는 해결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애쉬의 이어진 뒷말은 내심 그의 평가를 높이던 에이암과 서령의 생각을 다시 한번 바뀌게 하기 충분했다.
“아, 그리고 아가씨. 숙식은 항상 나랑 같이 하는 걸로.”
“네?”
“예?”
에아임과 조용히 둘을 지켜보던 서령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에아임이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아, 시끄러.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애쉬가 인상을 찌푸리곤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의 발언에 경악한 에아임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몰라서 묻는 겁니까!”
“애초에 뭐가 이상한데?”
“어, 어떻게 다 큰 성인 남녀가 같은 곳에서 먹고 잔다는 소리를…!”
“아저씨. 진짜 애도 아니고….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이상하게 보일만한 발언을 했던 애쉬가 도리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놀란 표정의 서령에게도 같이 설명하듯 말했다.
“당연히 혼자 생활하는 집안이 제일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러다 누가 들어와서 칼침이라도 놓으면 어쩌려고?”
“서령 아가씨가 거주하시는 곳은 웨인 시에서도 손에 꼽는 최고급 주거시설입니다! 그런 곳에 누가 침입해서 아가씨께 위협을 가한다니, 말도 안 되는…!”
에아임은 애쉬의 말에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자신이 회사에서는 상무님이라고 부르던 유서령을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애쉬는 그런 에아임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생각 좀 해봐. 당장 유성 그룹에 그곳의 보안을 뚫을 방법이 없나? 난 이 그룹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
“그, 그건….”
에아임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서령도 그런 애쉬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유성 그룹이 지닌 기술과 인맥이라면 그녀가 머무는 빌라의 보안 정도는 쉽게 뚫을 수 있었다.
당장 보이지 않지만 그룹 내에서 실험하고 있는 불법적인 물건들만 해도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들이 많지 않은가?
애쉬에게 넘긴 팔찌도 그런 물건 중 하나였다.
“…그건 애쉬 씨의 말이 맞아요, 에아임.”
“아가씨….”
에아임이 충격에 빠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령의 말은 사실상 저 해결사와 함께 동거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령도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건 아니었다.
“좋아, 그럼 의뢰 기간 동안은 아가씨랑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걸로 하자고.”
“네, 그렇게 하죠.”
애쉬의 말에 흔쾌히 서령이 동의했다. 조금은 거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애쉬가 조금 당황할 정도.
에아임은 그런 서령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하루 동안 지켜본 바 애쉬가 나쁜 사람 같아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다. 서령이 슬럼의 해결사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에아임은 평생 그것을 후회로 남길 터였다.
“걱정 말아요, 에아임. 제 경호원 중에 여성인 분들도 있으니 그분께 한 동안 같이 생활해달라고 부탁해보죠.”
“아…!”
에아임이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서령의 집은 혼자 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넓었다. 사람 한 둘 정도 추가되는 걸로는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여자 경호원도 있나보네.”
애쉬가 중얼거렸다. 서령에게는 그게 조금 아쉽다는 투로 들렸다.
아무튼 그렇게 한 부분의 조율을 끝내고 에아임과 애쉬의 의견 조율이 계속됐다.
그 이후로는 전과 별다를 것 없이 YES의 연속이었다.
정석대로 했다면 못해도 수 시간은 걸렸을 의견 조율 과정이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에 끝났다.
서령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현재 시각은 오후 12시 17 분.
곧 있으면 점심 식사 시간이다.
서령은 한 동안 함께할 새 경호원과 친분도 쌓을 생각으로 식사를 권했다.
“곧 점심시간인데, 같이 식사나 할까요?”
“오, 식사. 나도 드디어 부자들이 먹는 밥을 먹어보는 건가?”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비싼 밥이라고 크게 다른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슬럼에서 먹는 것보단 좋겠지.”
그야 아무래도 그럴 것이었다. 일단 금액 차이부터 몇 배는 될 테니.
계약의 조율을 마친 서령은 애쉬를 자신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 * *
“확실히 내부가 괜찮네.”
제 2구역에 위치한 어느 레스토랑. VIP를 위해 따로 마련된 방 안에 들어선 애쉬가 짤막하게 평가했다.
전체적으로 밝은 톤으로 발린 벽지와 깔끔하게 잘 디자인된 테이블, 의자.
방의 한 쪽에는 식후에 즐길 디저트 따위가 진열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식사 중에 마실 수 있는 주류나 음료 등이 주르륵 깔려있다.
기타 장식품이나 문 테두리 문양 따위의 디테일만 봐도 애쉬가 거주하던 슬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급 음식점이었다.
“그렇죠? 여기는 다른 곳들처럼 너무 딱딱한 느낌이 없어서 좋더라구요.”
애쉬의 바로 뒤에 들어온 서령이 그의 평가에 동의하며 말했다.
이 레스토랑은 도심지의 어중간한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서빙 봇이나 기타 자동 AI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간이 직접 처리하는 수고를 들이는 곳이다.
돈이 없어 값싸게 노동력을 부려먹기 위해 인간을 쓰는 슬럼과 달리 도심에서는 오히려 비싼 임금 때문에 이렇게 인간 종업원을 쓰는 가게가 적은 편이었다.
“여기 옆에 눌러보시면 메뉴가 나오니 확인하고 고르시면 돼요.”
애쉬와 에아임이 모두 자리에 앉자 서령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간단히 설명했다.
먼저 그녀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터치하자 정면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고, 그것을 본 애쉬가 마찬가지로 따라하자 그의 정면에도 하나의 홀로그램 창이 펼쳐졌다.
“오….”
겨우 테이블 하나에 설치하기는 아까울 정도로 깔끔한 화질의 홀로그램 화면 안에는 각종 메뉴의 이름과 함께 이미지가 떠올라 있었는데, 하나같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조리 직후의 짧은 영상을 담아 놓아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애쉬는 그 중 마음에 드는 것 몇 개를 선택해 오더를 넣었고, 이후 서령과 에아임도 선택을 마쳐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애쉬 씨, 애쉬 씨가 지내던 슬럼은 어떤 곳인가요?”
“…슬럼?”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중 음료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서령이 애쉬에게 물었다.
그에 애쉬가 잠시 생각했다.
슬럼이 어떤 곳인가. 슬럼을 떠올려보면 바로 연상되는 단어가 바로 ‘쓰레기장’이었다.
마약 중독자와 양아치, 갱들이 가득하며 치안이 완전히 박살난 데다 외곽에서는 허구한 날 살인 등의 범죄가 일어나는 낙후된 지역.
여러 미디어 매체 등을 통해 형성된 외부인들의 이미지와 실제 그곳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 만한 것은 아니라 애쉬가 적당히 대답했다.
“그냥 일반인들이 아는 거랑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곳이야. 오는 길에 대놓고 저 아저씨를 노린 습격이 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이곳 2구역 같은 도심에서라면 아무리 청부가 있었다고 해도 대낮부터 그렇게 일을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총성이 몇 번 울리기만 해도 신고가 들어갈 테고, 그럼 아무리 길어도 십여 분 내에 공권력이 출동했을 테니까.
정말 이런 도심과 슬럼은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격차가 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