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4. 유성 그룹(10)
* * *
“으음, 이것도 괜찮네.”
“…천천히 드셔도 괜찮습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와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오고 시작된 식사 시간.
서령과 에아임은 이어지는 애쉬의 식사량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벌써 6인분은 되는 음식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는데, 아직도 양이 부족한 지 다른 음식을 추가로 시키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렇게 약 20여 분이 더 지나고….
“잘 먹었다.”
진작 식사를 끝냈던 에아임와 서령은 물론이고, 마지막까지 식사를 계속하던 애쉬도 만족하며 입가를 닦았다.
애쉬는 평소 이렇게까지 과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서령이 안내한 레스토랑의 음식이 어찌나 그의 입맛에 잘 맞았는지 먹어도 먹어도 물리는 기색이 없었다.
비싸서 맛있는 건지, 맛있어서 비싼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척이나 훌륭한 식사였다.
“진짜 많이 드시네요….”
서령이 식사를 마친 애쉬를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애쉬는 끝내 10인분에 가까운 음식들을 모조리 비워냈다. 도저히 그녀와 같은 인간의 식사량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겉보기에도 어느 정도 단련돼 보이는 몸이긴 했지만,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고.
“혹시 위장도 개조하셨나요?”
“아니. 난 순수인간이야, 아가씨.”
강화 시술도, 신체 개조도 받지 않았다고.
그런 애쉬의 말에 에아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가 봤던 영상 속, 그리고 전 날의 움직임은 결코 순수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에아임과 별개로 서령은 애쉬의 배가 나오진 않았는지 슬쩍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 오랜만에 조금 과식한 것 같네. 소화도 시킬 겸 몸이나 좀 움직여볼까.”
“오, 그럼 사내에 있는 헬스클럽은 어떻겠습니까?”
“헬스클럽?”
“예. 시설도 어지간한 대형 클럽 못지않습니다.”
그의 실력을 한 차례 봤던 에아임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스스로 순수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직접 본 애쉬의 신체능력은 어지간한 강화인간 이상이었다.
실력이라는 게 단순한 신체능력만으로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한 차례 그의 실력은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런 단순 반복 운동은 별론데.”
“따로 스파링을 할 공간도 있으니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유성 미래전자 사내의 헬스클럽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경호원으로 고용된 강화인간, 사이보그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초고중량의 기구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쇠질만을 하는 게 아니라 스파링을 하거나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기에 서령에게 그의 실력을 어느 정도 보여주기엔 무척이나 좋은 무대였다.
마침 점심시간 직후는 경호원들도 헬스클럽을 많이 이용하는 때였기에 운동 얘기가 나온 타이밍도 좋다.
서령도 그의 실력을 본다면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
“뭐, 일단 한번 가보기나 하자.”
“그러죠!”
애쉬와 에아임의 대화로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셋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회사 근처의 레스토랑이라 본사로 돌아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곳입니다.”
유성 미래전자 본사 3층에 위치한 복지관.
그 중에서도 헬스클럽의 입구까지 일행을 안내한 에아임이 말했다.
헬스클럽은 안쪽을 모두 볼 수 있도록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제 점심시간이 슬슬 끝나가기 때문인지 일반 회사원들이 나오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애쉬와 서령, 에아임은 헬스클럽의 정문을 통해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본사의 유명인인 서령을 알아본 데스크의 여성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상무님.”
“아, 네. 여기 이 분을 등록하고 싶은데요.”
서령이 애쉬를 가리키며 말했다. 데스크의 여성이 대답했다.
“네, 그럼 등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처음 뵙는 분인데, 신입 사원 분이신가요?”
“아뇨, 개인 고용한 외부 협력자에요.”
“아, 네. 그럼 성함부터 말씀해주시겠어요?”
여성이 애쉬에게 물었다. 잠깐 이용하러 온 것뿐인 애쉬는 굳이 등록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빨리 끝내기로 했다.
“애쉬 론모어.”
“네, 애쉬 론모어님. 나이는 어떻게 되시죠?”
“스물일곱.”
그런 식으로 짧은 문답이 오갔다. 데스크의 여성은 애쉬의 반말에도 인상 한 번 구기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응했다.
“네, 등록 완료 됐습니다. 캐비닛은 카드키에 적힌 번호를 보고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예. 어서 가죠.”
“흐음…. 그래, 짧게 하고 가자.”
애쉬가 대충 말했다.
어째 몸 좀 움직일까 하고 온 그보다 에아임이 더 신난 것 같다.
서령도 에아임에게서 얘기는 들었을 테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과 한 단계 거쳐 전해 듣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인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애쉬는 굳이 탈의실과 캐비닛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을 것도 없이 겉의 재킷만 벗고 움직였다. 입고 있는 흰 티셔츠 안쪽으로 보기 좋을 정도로 잘 단련된 몸이 언뜻 비췄다.
이제 곧 업무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인지 헬스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있는 사람들도 모두 누군가의 개인 경호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것을 본 애쉬가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도 곧 업무 시간 아닌가?”
“저는 딱히 업무 시간에 구애되지 않아서요.”
애쉬의 물음에 서령이 대답했다. 예상외로 일찍 끝나긴 했지만 오늘은 일부러 애쉬 론모어라는 손님을 위해 시간을 비워뒀기에 딱히 중요한 업무가 없었다.
잡다한 업무야 있겠지만 어차피 내일로 미뤄도 상관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그녀는 회장의 손녀이며 윗사람이라고 해봤자 사장, 부사장, 전무급 정도밖에 없는 상임이사.
본인의 할 일만 한다면 업무시간에 운동을 하든 그냥 일찍 퇴근을 해버리든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설명에 애쉬는 역시 금수저는 좋구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침 저희 쪽 경호원 분들도 몇 분 계시는군요.”
“우리 쪽?”
“예. 회장님께서 직접 상무님께 붙여주신 경호원들입니다.”
애쉬가 향하는 링 방향을 바라본 에아임이 말했다.
그곳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몇몇 인물들이 샌드백을 치거나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중 서령의 경호원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셋이 그곳에 다가가자 서령과 에아임을 알아본 경호원들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상무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함께하시기로 한 분이 운동을 좀 하신다고 하셔서 잠깐 따라왔어요.”
서령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경호원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대답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쪽이 넷. 그리고 곁다리에서 가볍게 인사만 하는 쪽이 나머지다.
그 태도를 보아하니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쪽이 서령의 경호원들인 것 같았다.
‘무슨 아이스크림을 맛별로 모아둔 것도 아니고.’
애쉬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각각 흑, 백, 황인인 남자 셋에 척 봐도 무뚝뚝해 보이는 옅은 금발의 여자가 하나.
온갖 인종을 섞어놓은 조합의 경호원들은 뚱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애쉬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안녕하신가. 같이 일하게 될 거라던데 잘 부탁하지. 난 맥바인 케리스다.”
백인 남자가 애쉬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라도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땀을 흘리고 있는 경호원. 분명 저 손에도 습기가 가득하겠지.
그 불쾌감을 참으면서까지 냄새나는 사내놈과 악수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에 그냥 무시하려던 애쉬였으나 상대방, 자신을 맥바인 케리스라 소개한 경호원이 괜히 기분 나빠지는 미소를 씩 짓는 게 아닌가.
서로 간에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지만, 애쉬는 그 띠꺼운 표정에서 일종의 도발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 봐라.’
그에 애쉬가 생각을 바꾸고 남자의 손을 턱 잡았다.
“그다지 잘 부탁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중에 죽을 위기에 처하면 한 번쯤은 도와줄게.”
“헛. 그거 고맙군.”
애쉬가 대강 던지는 말에 경호원, 맥바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물밑에서 유치한 싸움이 시작됐다.
꽈아악.
밧줄을 쭈욱 당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느슨하게 맞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맥바인의 팔은 사이보그의 그것은 아닌 듯 인간과 비슷한 감촉이 있었지만 그보다 한참은 질긴, 고무 같은 탄력이 느껴졌다.
애쉬는 그것으로 곧장 알 수 있었다. 맥바인이라는 이름의 경호원은 강화인간이었다.
손아귀를 조여 오는 힘은 점차 강해졌고, 이제는 쥐고 있는 손에 핏기가 빠져 하얗게 질려 보일 정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애쉬는 자신의 손을 조여 오는 그의 아귀힘에 픽 웃었다.
일반인이라면 뼈에 문제가 생겨도 이상치 않았을 압력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기준.
애쉬에게는 어린아이의 손짓처럼 느껴졌다.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초 정도 상대가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애쉬는 상대방의 힘이 한계에 다다른 듯 더 강해지지 않자 이제 반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맥바인도 그것을 느낀 듯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처럼 바라봤지만, 곧 그의 낯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유롭던 얼굴이 그대로 굳고, 하얗게 질린다. 호위 대상의 앞이라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봐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그 이상이 뚜렷했다.
하지만 아직 애쉬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의 악력은 돌멩이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
아무리 강화인간이라고 해도 어중간한 수준으로는 버티긴커녕 박살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애쉬는 점점 더 힘을 강하게 주었고, 그에 따라 맥바인의 억지 미소에도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저 표정도 완전히 깨져나갈 것이다. 애쉬가 그 통쾌한 장면을 상상하며 힘을 더해갈 때였다.
“…애쉬 씨?”
“어, 왜.”
“그, 너무 악수를 오래 하시는 게 아니신지.”
바로 옆에서 이상을 알아 챈 에아임이 애쉬의 이름을 불렀다.
기껏해야 손을 맞잡은 지 6, 7 초 정도 됐을까.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곤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쉽네.’
맥바인인지 뭔지 하는 놈의 띠꺼운 표정을 완전히 박살내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애쉬는 시원하게 손을 놔버렸다. 그 자신도 지금 하고 있는 게 유치한 짓이라는 인식은 있었다.
“…허억.”
애쉬가 손을 놓자 고통을 참으며 식은땀 흘리던 맥바인이 작게 숨을 삼켰다. 그의 손에는 허옇게 애쉬의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손을 놓은 애쉬는 처음과 180도 달라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바인을 향해 은근히 미소 지었다.
물밑의 승부는 그의 승리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그런 유치한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그의 미소를 발견한 서령이 물었지만, 애쉬는 그것을 가볍게 넘겼다.
그리고 서령과 달리 방금 전 승부의 존재와 그 결과를 알아차린 다른 경호원들에게 물었다.
“나랑 스파링 할 사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