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4. 유성 그룹(12)
* * *
애쉬는 서령의 경호원들과 한바탕 한 다음, 그 이후로도 다른 이들과 몇 번의 스파링을 가졌다.
결과는 특별할 것도 없는 전승.
애초에 그와 같은 신체능력과 감각으로 진다는 게 이상하다.
30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였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태연하게 링을 벗어나는 그에게 몇몇 이들이 다가왔다.
본의 아니게 협업하게 된 서령의 다른 경호원들이었다.
“스파링에선 졌지만 실전에선 안 질 거다.”
“그래, 힘내 봐.”
애쉬는 여전히 얼얼한 모양인지 자신에게 맞은 부위를 부여잡은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흑인 경호원, 리미드 덴슨에게 적당히 대답했다.
벽을 느꼈는지 격투기에서는 어떻게 해보겠다 말 못하고, 실전에서 그보다 더 활약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이어서 그에게 금발의 여성 경호원, 베일라 로엘이 말했다.
“…저도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자신이 제대로 된 유효타 하나 맞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원래 무뚝뚝하던 목소리는 조금 더 가라앉아 있었다.
격투기에 제법 자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허무하게 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애쉬는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쪽은 앞으로 오래 볼 것 같은데, 잘 부탁하지.”
“예?”
“아, 아직 말 안했던가.”
애쉬가 자신 쪽을 쳐다보고 있던 서령과 에아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 따라 베일라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자세한 건 나중에 저 아가씨가 알려줄 거야.”
“아, 예. 뭔진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럼 다음에 보자고.”
“예.”
애쉬는 경호원들을 뒤로하고 그를 기다리던 서령과 에아임 쪽으로 향했다.
서령이 감탄한 듯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반겼다.
“대단하셨어요! 어떻게…!”
“뭘 이 정도 가지고.”
애쉬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의 대답대로 저들의 수준은 제법 높았지만, 애쉬가 상대했던 이들 중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편도 아니었다.
잘 쳐줘야 중상위권.
저 중에서 그나마 뛰어나던 여성 경호원, 베일라 로엘조차도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이들 중 최상위에 속한 ‘회사’의 땅거미 부대나 ‘방화광 루이스’, ‘폭군 오마르’ 등 거대 갱단의 보스들에게는 비교할 상대도 못됐다.
신체능력부터 차원이 달랐던 ‘회사’의 땅거미 부대는 둘째치더라도 거대 갱단의 보스들 못지않은 신체 능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그들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뭐, 밑바닥에서부터 수없이 사선을 넘어오며 일가를 이룬 거대 갱단의 보스들과 일개 경호원의 차이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전까지 상대했던 이들과 경호원들의 수준을 비교하던 애쉬에게 에아임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한번 보긴 했었지만 다시 봐도 대단하시군요. 정말 순수 인간이 맞긴 하신 겁니까?”
“그럼. 나만큼 순수한 인간이 어디 있다고.”
그게 짧은 운동의 끝이었다.
애쉬는 이후 가벼운 사워 후 떠났고, 서령과 에아임은 한동안 애쉬를 볼 때마다 헬스클럽에서 보았던 스파링 장면을 떠올렸다.
* * *
애쉬와 서령의 미팅이 있던 뒤로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수상할 정도로 평온하여 오히려 불안할 만큼.
서령은 에아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며칠 동안 가슴 졸였다.
대대로 벌어진 후계 경쟁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었는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핏줄끼리 행해진 온갖 공작들과 살해 청부. 사고사를 위장해 경쟁자를 죽이고 회장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인다.
하지만 암중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같은 그 얘기들은 그녀와 별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불과 30여 년 전에 있었다는 후계 경쟁도.
서령 자신을 그렇게 예뻐하는 조부께서 두 명의 형제를 자신의 손으로 묻고 회장의 자리를 쟁취했다는 얘기도 말이다.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건 알지만 설마 자신의 대에서까지 핏줄이 서로를 크게 해할까? 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깔려있었다.
무척이나 심각한 에아임의 태도와 걱정, 그리고 그의 강권으로 1,000만 크레딧이라는 거금을 주고 호위를 고용했지만 그런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게 호위인 애쉬와의 첫 미팅, 그리고 가끔 있는 만남은 새 친구를 사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애쉬 론모어, 그가 그 슬럼의 해결사라는 사실은 거의 잊었다. 평소의 애쉬는 서령이 얘기로만 들었던 슬럼의 사람들처럼 천박하지도, 악질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니.
지난 며칠 간 그녀는 애쉬를 조금 장난기 있는 친구처럼 대했고, 애쉬도 딱히 그런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에 매진하여 시간을 보내다 그 날이 왔다.
애쉬가 서령의 집에 입주하는 날.
애쉬는 다른 여성 경호원, 베일라와 함께 그녀의 집에 찾아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사님.”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녀의 집에 온 여성 경호원, 베일라가 인사했고, 서령도 예의를 갖춰 마주 인사했다. 그녀와 같이 온 애쉬는 진작 집 안 구경을 간 지 오래다.
서령이 베일라를 적당한 방으로 안내하고 돌아오자 집 구경을 마쳤는지 작은 짐 하나를 들고 돌아온 애쉬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그냥 마음에 드는 방 아무데나 골라잡아도 되지?”
“네. 어차피 대부분은 쓰지 않는 방이니 편하신 대로 고르면 돼요.”
“오케이~ 집 하나는 마음에 드네.”
애쉬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조부, 유진혁이 손수 골라준 1구역의 최상층 펜트하우스는 방의 숫자만 열한 개에 달하는 곳이었다.
하나하나의 크기도 작지 않아 독서 외에는 특별한 취미도 없는 서령이 아무리 많이 활용해 봐야 서너 개. 나머지는 언젠가 쓸 수도 있겠지, 하고 간단히 정리하기만 해뒀었다.
사용인이 항상 관리하니 그냥 짐만 풀고 곧장 사용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짐을 적당히 푼 애쉬와 베일라는 곧 거실에 모였고, 서령은 잠시 무언가를 정리한다며 다른 방으로 향했다.
집주인인 서령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애쉬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상대, 베일라 로엘을 자세히 살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전형적인 서양인.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의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과 겉보기에도 무척 탄탄한 몸은 굳이 지금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있지 않아도 그쪽 업계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에 오래 볼 거라던 게 이런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
경호 대상인 서령의 부탁으로 애쉬와 한 집에서 동거하게 된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앞전에 헬스클럽에서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
그때는 새롭게 합류한 동료를 조금이나마 반기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약간의 거리낌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이지만 호위대상인 서령을 위해 그와 동거하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베일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슬럼의 해결사 출신이라는 것도요.”
“흐, 그래?”
그녀의 말에 애쉬가 픽 웃었다. 그녀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이것 때문일 가능성이 제법 높았다.
바로 그의 출신 성분.
슬럼가에서 활동하던 해결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인간을 단순히 출신성분만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슬럼에서 몇 년을 보냈던 애쉬는 그런 베일라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그럴 만하지.’
아마 에아임이나 서령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테고, 그가 무척이나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해결사이며 저 밑바닥 슬럼의 출신이라는 것도 알았겠지.
그럼 자신을 꺼리는 게 당연했다.
대체로 슬럼의 빈민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그런 느낌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예비 범죄자들.
실제로도 그런 인식이 어느 정도는 맞았고 말이다.
당장 뉴스만 틀어도 슬럼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몇 개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슬럼의 빈민에 대한 인식이 그러한데 심지어 그런 슬럼에서도 악명 높던 해결사가 동료로 들어온다?
지금처럼 약간의 거리낌 정도만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적대의 시선이 향하고 있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애쉬는 자신의 출신을 듣고 약간의 혼란을 겪고 있는지 동료와 타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다. 상대방이 결국 적대하든, 아군으로 받아들이든 애쉬는 그 결과를 보고 나중에 가서 선택하면 됐다.
베일라는 태연하게 자신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는 애쉬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이사님과의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괜한 걱정 말고 그쪽이나 잘하지 그래.”
“…믿겠습니다.”
더 나가면 완전히 자신과 애쉬의 관계가 틀어질 것을 걱정한 베일라가 믿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둘 사이의 공기는 그렇게 조용히 흘렀고, 정리를 마친 서령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음….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서령이 물었지만, 애쉬와 베일라는 무어라 확실히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단순히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고, 굳이 의뢰인이자 호위 대상인 서령의 신경을 쓰게 할 일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서령은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에서 이전 스파링 직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어색함과 거리감을 읽고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령의 다른 경호원들에게 애쉬의 영입을 알리며 말했던 그의 출신. 그리고 그로부터 돌아온 거부감 섞인 반응들.
‘역시 애쉬 씨의 출신을 숨길 걸 그랬나….’
서령이 내심 후회했다.
경호원들에게 애쉬에 대한 것들을 밝혔을 때 돌아온 반발감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 강했다.
기존의 경호원들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데 타 경호업체도 아니고 저 밑바닥 슬럼의 해결사를 고용했다는 것은 기존 경호원들을 무시하는 처사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베일라는 그 거부감이 덜한 모양인지 다른 경호원들처럼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런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서령은 그런 분위기를 풀기 위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분위기도 어색한 것 같은데 같이 식사나 할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