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4. 유성 그룹(13)
* * *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서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식사 자리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저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네, 편히 쉬세요.”
“예, 그럼.”
식사 후 정리까지 마쳤다. 베일라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고, 애쉬는 그런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서령의 의도처럼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베일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애쉬가 서령에게 물었다.
“아가씨. 여기 게임기 같은 건 없어?”
“게임기요? 그런 건 딱히….”
“그래? 아쉽네.”
애쉬가 입맛을 다셨다.
대기업 회장 손녀딸의 집에 있는 홀로그램 영사기 등의 전자기기는 모두 영상매체에 빠져 사는 애쉬조차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었는데, 척 봐도 그 포스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시중에 나온 물건들보다도 한참은 발전한 것들일 텐데 저런 것들을 제대로 누릴 게임기가 없다니.
게임은 영상, 음악, 디자인, 그림 등이 하나 된 현대 문화의 집합체였다.
“그럼 다음에 내가 사다놔도 되지?”
“아, 네….”
애쉬의 말에 서령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사다놓겠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뭐랄까. 베일라 쪽이 너무 딱딱해서 문제라면 이쪽은 너무 늘어져서 문제인 것 같다.
얼마 전 애쉬와 경호원들의 스파링을 봤고, 또 에아임에게 들어온 것이 있었기에 그가 정도 이상의 실력을 가졌을 거라는 것은 알게 된 서령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늘어지는 모습을 보면 안심하고 의지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위험 상황에서도 늘어져선 빠르게 움직일 것 같지가 않다고 할까. 뭐, 실제로 그렇진 않겠지만.
그렇게 애쉬와 베일라의 성향이 완전히 다른 만큼 둘 사이의 어색한 거리감을 좁히는 게 힘든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잘 사는 집은 소파도 다르네.”
집주인인 서령을 옆에 두곤 정말 자신의 집인 것처럼 편안히 소파에 완전히 몸을 묻는 애쉬.
서령은 리모컨에 손을 가져가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죄송해요.”
“응?”
“아마 베일라 씨가 애쉬 씨를 대하는 태도를 바꾼 건 저 때문일 거예요. 제가 다른 경호원 분들한테 애쉬 씨에 대해 얘기했거든요….”
“아아, 그거.”
뜬금없는 서령의 사과와 설명. 그것을 알아들은 애쉬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뭘 얘기하나 했는데,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을 신경 쓰고 있다.
그런 애쉬의 반응에 조금은 안심한 서령이었지만, 그래도 얘기는 해야 했다.
“너무 베일라 씨를 나쁘게 보지는 말아주세요. 그 분도 진짜로 애쉬 씨를 진짜로 안 좋게 생각해서 그러신 건 아닐 거예요.”
“그래, 그런 건 눈만 봐도 알아.”
TV에 눈을 돌린 애쉬가 대답했다. 진짜 혐오하는 자의 눈은 베일라와 같이 어중간하지 않다.
으레 그런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벌레를 보듯 경멸하는 눈초리와 적대감. 그것이 베일라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애쉬에게 그런 적대감을 보였다면 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 제대로 손을 봐줬겠지.
무뚝뚝해서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다른 경호원들의 분위기에 조금 휩쓸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냥 다른 놈들이 유치하게 자존심 싸움을 걸어온 거지.”
“…다른 분들한테도 한 차례 주의를 드릴게요. 앞으로 한동안은 같이 활동해야 할 텐데.”
“굳이? 그러면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 하는 꼬맹이 같잖아.”
애쉬가 우스운 표현으로 서령의 말에 반대했다.
일단 그녀의 개입이 있다면 경호원들은 사회적 위치부터 차원이 다른 곳에 있는 서령의 말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좀 더 교묘하게 헛짓거리를 해오겠지. 그럼 오히려 귀찮아질 수 있었다.
“저 여자의 태도를 봤을 때 아마 주동적으로 혐오를 불어넣는 놈이 있을 건데, 그 놈하고는 다음에 한 번 얘기하지 뭐.”
애쉬가 베일라의 방 쪽을 향해 한 차례 시선을 던지곤 말했다. 그냥 그거면 됐다.
좀 더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처박아주면 정신을 차리겠지. 너희는 쓰레기장, 슬럼의 해결사 하나에게도 안 되는 버러지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말이다.
그렇게 한 번 해보고 그걸로도 안 된다 싶으면 그때 위에서 개입하면 된다.
애쉬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애쉬의 그런 계획을 모르고 대화로 풀 것을 생각한 서령이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유치하게 자존심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평소의 모습을 보면 더 애 같은 쪽이 그 쪽 아니었던가.
“그래도 조금은 맞받아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맞받아칠 것까지 있나? 어차피 나중엔 알아서 찌그러질 텐데.”
“풋, 그래요?”
“그럼.”
애쉬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서령이 푸훗, 하고 웃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폭발할 정도였다. 저 도시 최외곽, 모든 이들의 경멸을 받는 슬럼에서 이곳 1구역까지 왔음에도.
모르는 것이 있어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서 옳은 것은 옳다, 틀린 것을 틀리다 당당히 주장할 남자다.
게다가 자신의 실력에 얼마나 큰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인지 누가 와도 자신을 굽힐 것 같지가 않았다.
평소에 조금 가볍고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가끔씩 느껴지는 그의 자신감은 어쩐지 그를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런 애쉬 씨가 부럽네요….’
서령은 그런 그의 자신감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녀에게는 자신감이라는 것이 결핍돼 있었으니까.
그녀의 인생은 언제나 타인의 의사에 이끌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태어나서부터 학교를 다닐 때도, 일을 할 때도.
항상 타인의 기대에 떠밀려 움직여왔다. 그녀는 그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런 생각을 얘기하지도 못했다. 자신감이 없었으니까.
언제나 그녀는 ‘유진혁 회장의 손녀’, ‘유장혁 사장의 딸’, 누구누구의 무엇. 이런 식으로 불려왔고, 그녀 자신도 싫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언제나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서령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애쉬가 대단해보였다.
“아, 아가씨. 술은 좀 하나?”
어느새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 애쉬가 상념에 빠져있던 서령에게 물었다. 서령이 머릿속을 휘젓던 상념들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글쎄요…. 술은 안 마셔봐서 잘 모르겠네요.”
“뭐? 스물 셋인데 아직 술 한 번 안 마셔봤어?”
“네…. 학업과 일에 바쁘다보니.”
“흐음, 그렇단 말이지….”
서령의 대답에 애쉬가 방으로 향하더니 곧 무언가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적갈색 액체가 가득 찬 예쁜 병. 그가 마시려고 사온 브랜디였다.
서령은 애쉬가 손에 들고 온 브랜디 병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술병이 예쁘네요?”
“그야 비싼 거니까.”
무려 1,600크레딧, 웨인 시의 통화인 코너(Couner)로는 8천 코너나 하는 술이었다. 진짜 비싼 술들에 비하면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코 싼 술은 아니다.
“여기 괜찮은 술잔 없나?”
“아마 찬장에 보면 있을 거예요.”
그녀가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 것은 아니고 조부가 집을 선물할 때 미리 넣어뒀던 것들을 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애쉬가 찬장에서 브랜디 잔을 찾아왔다.
그는 두 개의 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 하나를 서령에게 넘겼다.
“자, 한 잔 받아.”
“…네.”
잠시 고민하던 서령이 잔을 받았다. 애쉬가 잔 위에 병을 기울이자 안에 담긴 적갈색 액체가 그녀의 잔 안으로 흘러들었다.
서령은 자신의 잔을 들어 향을 맡아봤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포도의 향과 오크 향. 조금은 강한 알코올 향까지.
브랜디는 도수가 높은 술이니만큼 알코올 향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주는 없지만, 일단 가볍게 한 잔 할까?”
자, 짠. 애쉬가 잔을 내밀었다. 서령이 웃으며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 * *
“저기 애쉬, 애쉬는 왜 해결사 일을 시작한 거예요?”
“나? 흠…. 먹고 살 게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푸훗, 왜 의문문이에요….”
“다시 생각해보면 다른 일도 있었던 것 같아서.”
애쉬가 다시 한 번 잔을 기울였다. 그에 서령이 왜 혼자 먹냐며 잔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짠, 하고 잔을 부딪치자는 뜻이다.
애쉬는 어쩔 수 없이 잔을 마주 부딪쳐줬다.
“아가씨, 그만 먹는 게 좋지 않겠어?”
“네에…? 그치만, 혼자는 외롭잖아요….”
애쉬의 말에 서령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뽀얗던 얼굴에는 발갛게 홍조가 오른 채다.
제스처가 쓸데없이 커진 것이나, 목소리가 늘어지는 것이나 누가 봐도 취한 상태였지만 애쉬는 굳이 더 마시려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뭐, 차라리 이게 안전하긴 하겠지.’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라 일도 쉬는 날이었고 집 안에는 애쉬 자신과 베일라라는 경호원이 있다.
괜히 주말에 바깥에 나가는 것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이 집에서 쉬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이런 반응 하나하나가 무척 귀여워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기도 했고.
“술 맛은 어때?”
“으응. 맛있어요…. 처음엔 술 냄새가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치? 알콜 향에만 조금 익숙해지면 브랜디의 진짜 맛이 느껴진다니까.”
“좋네요오….”
“프흐, 그래.”
애쉬가 말꼬리를 늘리며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진짜 이런 걸 찍어서 보여줘야 하는데.
끝이 살짝 웨이브 진, 어깨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단발과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검은 눈동자. 그리고 가느다랗게 늘어진 눈꼬리와 그 밑에 작게 찍힌 눈물점 하나까지.
하얗던 피부도 술기운에 발갛게 상기된 그녀에게서는 멀쩡한 정신일 때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풋풋함이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는 온갖 미인을 다 봐온 애쉬조차 놀랄 만큼 매혹적인 여인이 되어 있었다.
두 잔째로 넘어갈 때부터 취한 것 같았던 그녀가 다음 날 일어나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반응이 어떨지 조금 궁금하다.
하지만 굳이 카메라로 찍지는 않았다. 흑역사를 영상까지 남겨줄 필요는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 옆에 앉은 베일라의 노려봄도 조금 신경 쓰였다.
베일라는 서령이 조금 취할 때부터 자리에 함께 하고 있었는데, 술잔은 받지 않았다. 멀쩡한 정신인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나.
애쉬는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두고 서령과 둘이서만 술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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