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70화 (70/230)

〈 70화 〉 4. 유성 그룹(14)

* * *

“애쉬이…, 궁금했던 게 있는데에요.”

“응?”

“그 칼이요….”

“아, 이거?”

애쉬가 옆에 기대어 세워두었던 검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땅거미 부대에게서 회수한 단검들을 모야 만든 에리히 영감의 역작이다.

재료가 된 금속에도 무슨 영어와 숫자가 합쳐진 명칭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잘 기억도 나지 않고 그냥 좋은 재료로 만든 검이라는 것 하나만 알고 있었다.

서령은 자신의 앞에 턱 올려진 검을 신기하다는 듯 만져보았다.

“이사님, 취하신 것 같은데 날붙이는….”

“에…? 아니에요, 저 별로 안 취했어요!”

조심스럽게 끼어든 베일라의 목소리에 서령이 발끈했다. 역시 충분히 취했다.

술기운이라는 게 마실 때 바로 오르는 게 아니라서 지금도 계속 더 취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애쉬는 발끈하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프흐흐, 왜? 그냥 둬. 자해라도 하겠어?”

그쪽이 옆에서 봐주면 되잖아.

웃음기어린 애쉬의 말에 베일라가 한층 더 무서운 눈으로 그를 째려봤다.

슬럼 출신이라는 사실 이전에 그녀와는 잘 맞지 않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베일라가 애쉬에게 매서운 눈길을 향하는 것과 별개로, 서령이 애쉬에게 물었다.

“이거, 뽑아 봐도 되죠…?”

“얼마든지. 날카로우니까 조심하고.”

“네에!”

애쉬가 흔쾌히 허락했고, 서령이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가끔 관리하는 검은 취한 서령의 손길에도 부드러이 뽑혀 나왔다.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예기를 뽐내는 까만 칼날이 조명을 받아 번뜩였다.

흔치 않은 검은 금속으로 이뤄진 검은 살인병기라기보다 하나의 장식품, 혹은 예술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와아아….”

검을 뽑아 든 서령이 감탄성을 흘렸다. 애쉬는 그걸 보고 다시 한 번 작은 웃음을 터뜨렸고 베일라는 혹여나 그녀가 다치기라도 할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무겁네요오.”

“그거 떨어뜨리면 바닥에 구멍 날지도 모른다. 조심해.”

“정말요…?”

“…날카로워 보이긴 하는데,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베일라가 애쉬의 말에 의문을 나타냈다. 서령의 집 바닥재는 여타 가정들과 달리 깔끔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 일단은 석재인데 겨우 검 하나 떨어뜨린다고 손상이 되겠는가.

“나도 몇 번 안 써봤는데 상상이상으로 성능이 좋더라고.”

베일라의 물음에 애쉬가 대답했다. 실제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얼마 전 에아임을 덮친 용병들을 상대할 때 느낀 점으로는 정말 견고하고 무엇보다도 예리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아마 저 검이라면 사무소에서 쉬고 있을 꼬맹이 샤인이라도 소파 한 개 정도는 몇 차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토막 낼 수 있을 것이다.

떨어뜨리는 정도로는 물리력이 부족한 만큼 바닥이나 벽을 완전히 꿰뚫는 건 불가능했지만, 몇 센티 정도 박히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애쉬는 어느새 빈 잔을 다시 채우며 검을 구경하는 서령을 바라봤다.

술에 취한 서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어올리고, 베일라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조,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세요!”

직접 쥐어본 검이 신기한지 무게에 끙끙대면서도 활달하게 움직이는 모습.

애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느꼈다.

정말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여자였다.

스물 셋까지 술 한 잔 입에 대본 적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술도 약해서 브랜디 한 잔을 다 마실 때부터 조금씩 취하고 있었다.

순수한 꽃.

가녀리고 가녀려 누군가 손을 뻗어 꺾는다면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유성 그룹의 유진혁 회장도 그런 그녀의 성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린 그녀를 지저분한 사내 정치의 세계에 떨어뜨린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도 작년. 자신이 은퇴를 선언하기 불과 일 년 전에.

에아임에게 듣길 서령은 회장이 유난히 아끼는 손녀라고 했다.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던 걸까?

애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지금으로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했고.

그녀는 순수하지만 세상과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언젠가는 그녀에게도 때가 묻을 것이었고 이번 후계 경쟁은 그것이 조금 당겨진 것뿐이다.

지금이야 설마? 하고 의심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그녀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란 여태껏 그녀가 겪어온 것보다도 몇 배, 몇 십 배는 더럽고 끔찍한 곳이라는 것을.

그때가 되면 정해야 하리라. 그녀 자신이 정녕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를.

하지만 지금의 애쉬는 그저 호위로 온 해결사 하나일 뿐이었다.

당장은 자신의 일인 호위에만 집중하면 되겠지.

“이, 이사님. 그걸 그렇게 휘두르시면…!”

“어때요?! 잘하죠?”

애쉬는 둘을 보며 브랜디를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그의 취향은 브랜디보단 위스키 쪽이었다.

* * *

“끄으응.”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다. 서령은 잠결에서 깨어나면서부터 느껴지는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프고, 목도 마른, 그녀가 여태껏 느껴본 적 없었던 최악의 아침이다.

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봤다.

[AM 11 : 18]

오전 11시 18분. 평상시에도 일찍 일어나 일찍 자는 생활을 하는 그녀가 일어난 시간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늦은 시간.

서령은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의 정수기로 향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도 머리지만 일단은 갈증부터 해소해야 했다.

침대에서 벗어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속에서 알코올 향이 올라왔다. 아마 그녀 자신에게서도 술 냄새가 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으으….”

정수기 앞에 도착한 서령은 찬물을 연달아 두 잔이나 들이켰다.

몸속에 찬물이 좀 흘러 들어가니 정신이 깨는 것 같다.

어제 뭘 했더라…….

전 날 자기전의 상황을 떠올린다.

그녀는 분명… 그래, 애쉬의 권유로 그와 술을 한 잔 했었다. 브랜디라고 했던가. 쓰지만 조금은 달짝지근하고 은근한 향이 흘러넘치는 그 술의 이름이.

어제까지만 해도 서령은 술 한 잔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그 술의 도수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술이 약해도 그렇지 도수가 약한 술이었다면 둘이서 한 병을 마신 것으로 머리가 이렇게 아플 리는 없지 않은가.

아니, 그걸 다 마시고 좀 더 마셨던가?

서령은 전날의 기억이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애쉬와 함께 한 술자리에 나중에 베일라가 끼어들고….

애쉬의 칼을…, 칼을……!

“…어떡해.”

칼을 가지고 놀았었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기억해버리고 말았다. 전 날 취한 자신의 추태를.

어느 정도 기억이 나는 부분까지도 그런 짓을 해버리고 말았는데 기억이 끊긴 사이에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거실의 소파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앉은 서령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번엔 두통 때문이 아니라 창피함에.

그렇게 그녀가 전날의 추태를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여어, 좋은 아침.”

“……애쉬 씨.”

숙취에 고생중인 그녀와 달리 언제나 그렇듯 멀쩡한 모습의 애쉬가 인사를 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서령을 보고 큭큭 웃음을 참았다.

“호, 혹시 제가 어제 실례를 저질렀다면….”

“응? 아냐아냐, 귀여웠는데, 왜.”

서령의 급박한 사죄에 애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서령은 그의 반응에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 무슨 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 모습은 분명 베일라도 봤을 터.

서령은 베일라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 이제는 그냥 애쉬라고 안 불러주는 건가? 아쉬운데.”

“놀리지 마세요….”

서령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애쉬의 놀림을 받을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재밌었잖아?”

“그건 그런데….”

확실히 재미는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일까.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들도 살짝 저지르고 훗날 그것을 후회하지만 그런 술기운으로 해소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최근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였던 모양이다.

“재밌었으면 됐지. 다음에 또 한 잔 할까?”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진짜 애처럼 귀여운 척이나 하고….

서령은 앞으로도 술은 삼가기로 했다.

* * *

“그래. 그 녀석이 경호원을 새로 고용했다고?”

“예. 그런데 소문이 심상치 않은 녀석이더군요. 그쪽에서 꽤나 유명한 해결사 같았습니다.”

“핫,그래봤자 쓰레기장에 굴러다니던 쓰레기 중 하나지.”

변할 게 뭐 있겠나.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각진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자리에 앉아 읽고 있던 서류를 휙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비웃었다.

남자의 이름은 유선혁. 유성 그룹, 유진혁 회장의 손자이자 유성 중공업의 사장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읽던 서류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딴 소리를 믿다니. 그 녀석도 어지간히 멍청하단 말이야.”

유선혁이 읽고 있던 서류에는 최근 유서령에게 붙은 해결사, ‘애쉬 론모어’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는데, 어째서 이런 보고서가 그에게까지 올라왔는지 모를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얘기들로 가득했다.

‘무슨 영화 시나리오도 아니고.’

그가 과거 비서들에게 유서령과 관계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라 명령했었지만, 이건 너무 변별력이 없지 않은가.

이런 허풍 가득한 얘기들까지 읽고 있을 정도로 그의 시간이 값싸지는 않았다.

“앞으로 이딴 보고는 올리지 않아도 돼. 종이 낭비다.”

“알겠습니다.”

혼자서 수천 명이 소속된 거대 갱단을 무너뜨렸다느니 뭐니 하는 헛소문이야 믿지 않지만, 이런 소문이 퍼질 정도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그냥 그 정도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던 유선혁이었지만, 그는 곧 전날 자신이 받았던 보고를 기억해내곤 생각을 바꾸었다.

“아, 그러고보니 마침 실력 괜찮은 놈들이 들어왔다고 했지?”

“어제 보고드린 그 용병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녀석들로 한번 확인해보면 되겠네.”

“…유서령 이사의 스케줄을 확인한 후 날을 잡아볼까요?”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길래 저딴 소문이 도는지 궁금한데, 한번 찔러나 보지.”

“그럼 대강의 준비가 끝나면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이번 계획의 목표는 그 애쉬인지 뭔지 하는 놈.

쓰레기 하나를 치우며 약간의 겁을 주는 것도 재밌겠지.

자신이 믿고 고용한 놈이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는 꼴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유선혁은 머릿속으로 막내 동생의 겁먹은 얼굴을 그려보며 픽 웃었다.

유서령, 그 꼬맹이가 고용한 놈이 그냥 흔해빠진 쓰레기인지, 아니면 실력 있는 쓰레기인지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