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4. 유성 그룹(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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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거리와 드높은 빌딩 숲 사이로 존재감을 뽐내는 거대한 홀로그램광판들.
거리에는 자체 AI가 탑재된 청소 로봇이 돌아다니고, 낮은 하늘에는 배송 드론들이 바삐 날아다닌다.
누군가 쏟아놓은 오폐물 따위의 냄새가 진동을 하고 지저분하다 못해 더럽게까지 느껴지는 거리, 저급한 네온사인들이 가득한 슬럼과는 그야말로 천지차이.
애쉬는 그런 슬럼도 나름 분위기 있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역시나 진짜 천상계를 맛보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다.
슬럼은 이곳, 1구역에 비하면 그냥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서령, 베일라와 함께 식료품을 사러 나온 애쉬는 생각했다.
에아임과 함께 구경했던 5구역도 나름 미래도시라는 느낌이었지만 1구역은 그보다 더했다.
슬럼에선 볼 수도 없던 값비싼 호버카들이 이곳에선 거의 기본이다. 당장 애쉬가 타고 나온 차도 호버링 기능이 탑재된 차량이 아니었던가.
슬럼과 도심지의 5구역은 거의 다른 세상이나 다름없었고, 또 5구역과 서령이 위치한 1구역도 그 차이가 확연했다.
애쉬는 에아임을 처음 만났을 때 타봤던 호버카와는 또 다른 모델의 호버카를 타고 이동했다.
여전히 바퀴로 땅을 밟는 일반 차량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탑승감. 말 그대로 떠다니는 구름의 위에 탄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서령의 말로는 당장 그녀 소유의 호버링 차량이 여덟 대는 있다고 했다. 모두 조부인 유진혁 회장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고.
그것을 들은 애쉬는 역시 금수저, 하고 감탄했었다.
총합 1,850 코너입니다. 감사합니다.
애쉬와 서령 일행이 고른 식재료를 들고 카운터를 그냥 통과했다. 뒤에서 안내용 안드로이드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 역시 천상곈가?”
“네?”
“아니, 조금 신기해서.”
물건 구매도 일일이 바코드 따위를 찍을 필요 없이 그냥 카운터를 지나가는 것만으로 계산과 결제가 완료된다. 과거 지구에 있던 고속도로 하이패스 같은 느낌.
애쉬는 신기한 경험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카운터를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인사하는 계산대 AI들이 보였다.
“너무 두리번 거리시는 것 아닙니까?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다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베일라가 걸으면서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애쉬에게 말했다. 애쉬가 어찌나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지 정말 이쪽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애쉬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쪽팔려?”
“그런 말이 아니라.”
“아니면?”
“그게…….”
애쉬의 거듭된 물음에 베일라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솔직히 이렇게까지 신기한 티를 내며 두리번거리면 창피하지 않은가.
슬럼에서 도심에 처음 올라왔다니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도 있었지만, 애쉬는 정말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제스처나 목소리를 조절하지 않아 가끔 주변인들이 돌아보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거 촌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아니, 둘러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됐어. 그냥 안보고 말지.”
에휴, 내가 촌놈인 게 잘못이지.
한숨을 동반한 애쉬의 말에 무뚝뚝한 베일라가 쩔쩔맸다.
그녀는 이런 장난에 익숙한 타입이 아니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당황하고 있었다.
결국 서령이 보다못한 중간에 끼어들었다.
애쉬의 표정에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담기기 시작하는 게 보이는데, 너무 골려먹고 있지 않은가.
“괜찮아요, 베일라 씨. 그냥 장난이에요. 애쉬 씨도 그만하세요.”
“아가씨도 도시 사람이라고 저쪽 편 들어주는 거야?”
“베일라 씨가 진짜인 줄 알고 오해하잖아요. 정말.”
애쉬가 자신에게도 장난을 걸어오자 서령은 단호히 그것을 끊어냈다. 남이 당황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즐기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 서령의 반응에 애쉬가 장난을 이어가길 포기했다.
“알겠어, 그만할게. 아쉽네, 아줌마 반응 보는 게 재밌었는데.”
“아줌…? 전 아직 서른한 살입니다!”
“서른 넘었으면 다 아줌마고 아저씨지. 뭘 아닌 척해.”
참고로 난 스물일곱이다? 애쉬의 약 올리는 말에 베일라가 아닌 척 이마의 핏대를 세웠다.
서령은 어째 점점 정신연령이 어려지는 것 같은 애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계 경쟁이 이어지는 중이며 얼마 전에는 에아임이 습격당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호위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떨어지는 걸 느낀다.
자신보다 몇 살이나 더 나이가 많으면서도 저런 유치한 장난을 치는 사람이 어딜 봐서 슬럼의 전설적인 해결사란 말인가.
에아임에게 얘기들으며 상상했던 이미지와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나 한 잔 할까?”
식료품 구매를 마치고 거리를 잠시 걷던 셋. 애쉬가 먼저 제안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은 것 같아요. 어디로 갈까요?”
마침 애쉬의 눈에 들어오는 곳이 하나 있었다. 카페 구름(Cafe Cloud). 창밖에서 안쪽을 보니 엔틱한 느낌을 잘 살린 카페였다.
애쉬와 서령, 베일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익숙한 종소리와 가게의 주인인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들을 반긴다.
카페의 컨셉 때문인지 자동화 기계가 아닌 인간이 직접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긴 셋은 적당한 창가 자리로 앉았다.
‘역시 카페는 어딜 가나 비슷한 것 같네.’
자리에 앉으며 애쉬가 생각했다.
배경이 사이버펑크, 지구보다 수년에서 수십 년 이상 더 발달한 도시였지만 카페는 지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카페의 컨셉이 엔틱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보이는 이런 익숙한 풍경이 또 색다른 느낌을 전했다.
“어떤 걸로 드십니까?”
“저는 치즈 퐁퐁으로….”
“난 아메리카노.”
베일라의 물음에 서령이 대답했고, 애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베일라는 그런 애쉬를 한 번 쏘아본 후 점원이 서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계속된 장난에 시달렸으면서도 사다주기는 하려는 모양이다.
그녀가 조금 멀어지자 서령이 말했다.
“애쉬 씨. 너무 애 같아요.”
“그래? 어리게 봐준다니 고맙네.”
나도 이제 이십대 후반이라 신경 쓰였는데. 애쉬는 그런 서령의 말을 유연하게 흘려보냈다.
그는 누군가 뭐라고 하면 항상 이런 느낌으로 반응했는데, 거기엔 말하는 사람이 짜증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령도 괜히 더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서령을 포기하게 만든 애쉬는 잠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향했다.
하얗고 매끈한 청소용 안드로이드가 쓰레기를 빨아들이고 바닥을 쓰는 것이 보인다.
미래 세계의 안드로이드라 함은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한 외모, 지능을 가진 로봇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게임 속의 세상은 조금 달랐다.
국제적인 법으로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한 외모의 안드로이드 제작은 강력히 금지되어 있으며, 그것을 어기면 최소 수 년에서 수십 년 이상의 중형이 떨어졌다.
어지간한 살인 범죄도 40년 안쪽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나게 무거운 형벌이다.
무분별한 과학의 발전에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함이라나.
그 외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법’은 몇 더 있었다.
인간의 클론 제작, 최소 100년.
허가 받지 않은 일정 수준 이상의 AI 설계, 최소 20년.
허가 받지 않은 신체 강화 및 개조, 시술자 최소 20년, 피시술자 최소 10년.
등등이다.
웨인 시의 법보다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연방법상 정해져있는 내용이었지만 무릇 인간이 그렇듯 모두가 지키는 건 아니었다.
당장 슬럼만 봐도 눈에 보이는 불법 신체 강화 및 개조자가 얼마나 많던가.
인간의 클론이나 고등급의 AI제작이야 기술력이 부족해 못하고 있다 뿐이지 가능했다면 얼마든지 뽑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슬럼뿐이 아니다. 겉보기엔 깨끗하고 안전해 보이는 이 도심지에서도 불법적인 일은 일어나고 있겠지.
애쉬는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를 보았다.
에아임이 그에게 빌려준 것으로, 신분이 없는 애쉬도 이렇게 도시를 거닐 수 있도록 만들어준 물건.
당연하지만 그것도 불법적인 물건이었다.
도시의 치안을 관통하는 물건이 아니던가.
이게 있다면 애쉬와 같이 신분이 없는 자는 물론이고, 수배가 떨어진 범죄자도 AI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물건도 만드는데 다른 불법적인 일이라고 못할 것도 없다.
AI 제조?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의 제작?
이미 이 도시의 뒤편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일 것이다. 다만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인간이 사는 곳은 역시 다 똑같다.
“여깄습니다, 이사님.”
“고마워요, 베일라 씨.”
“땡큐.”
베일라가 커피를 받아왔다. 짧은 상념에서 벗어난 애쉬는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냥 평범한 아메리카노의 맛이다.
“그러고 보니 애쉬 씨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번 일?”
“네.”
서령이 꺼낸 말에 애쉬는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던가? 감이 잡히는 게 없다.
서령이 그런 애쉬의 표정을 읽고 첨언했다.
“그저께 아버지가 다치셨잖아요. 차량의 호버링 기능이 고장 나서 사고가 나셨다던데….”
“아, 그거.”
애쉬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일단 예의상 들어본 척은 했다. 요 며칠간 그는 서령과 계속 함께 다녔고, 이렇게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그가 있는 동안 들려온 소식이었을 테니까.
관심이 전혀 없어서 대충 흘려들은 모양이었다.
“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으셨다는데, 며칠간은 요양하신다고 하더라구요.”
“글쎄. 누가 시작을 끊은 건 아닐까? 아니면 단순한 사고거나.”
“그렇겠죠?”
“어.”
애쉬가 적당히 대답했다. 이미 후계 경쟁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다. 아마 그동안 준비해온 것들이 있으니 슬슬 하나씩 보여주려고 하겠지.
정치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상대방을 위협하고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빨대를 물고 있는 서령을 봤다.
그녀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읽히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든, 뭘하든 크게 와 닿지는 않을 것이었다.
애쉬는 그런 아가씨에게 굳이 현실을 주입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미 에아임이 충분히 하고 있을 것이고, 온실 속에서 바깥을 보다가도 그 온실이 깨져버리는 순간에는 알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제 자신이 진짜 현실에 던져졌다는 것을.
베일라도 굳이 애쉬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그저 안전히 호위하는 것.
위험할 것 같으면 제지하고, 위험이 다가오면 처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폭풍전야. 그 말이 이렇게 어울릴 때가 있을까.
조만간 불어올 폭풍은 그녀가 들어가 있는 온실을 산산히 부숴버릴 것이다.
어쩌면 유서령, 그녀까지도.
애쉬는 어서 그녀가 자신의 진짜 목표를 잡고 움직이길 바랐다.
돈이 얼마든, 보상이 무엇이든 스스로 움직일 의지가 없는 자를 위해 먼저 나서서 일할 생각은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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