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4. 유성 그룹(16)
* * *
“에아임,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됐죠?”
“오전에는 사내 업무가 전부이며 오후에는 13구역의 지사의 점검을 겸해 지사장과의 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저녁이었죠?”
“예.”
서령의 사무실. 에아임이 그녀에게 하루의 일정을 대답했다. 오늘의 애쉬는 웬일로 어디도 가지 않고 사무실 소파에 반쯤 누워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럼 오늘 점심은 사내 식당에서 간단히 끝내고 최대한 빨리 출발하도록 하죠. 13 구역까지는 몇 시간 정도 걸릴 테니까요.”
“예,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뚜벅뚜벅, 무거운 구두 소리와 함께 일정 조율을 마친 에아임이 사무실에서 떠났다. 애쉬가 여전히 게임기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오늘 출장인가?”
“네. 슬슬 다른 구역의 지사들을 한 번 점검할 때가 돼서요.”
유성 미래전자는 한 분기에 한 번씩 각 지사로 본사의 임원들을 보내 점검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곧 서령 뿐 아니라 부사장과 타 임원들까지 여러 지사로 출장을 나갈 것이다.
“좋네. 슬슬 지루해지려고 했는데.”
“…괜히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처럼 말하지 말아주세요.”
때가 됐다는 듯한 애쉬의 말투에 서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애쉬가 합류한 지 며칠 정도가 지났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며칠 간 그녀에게 찾아온 이변은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생활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후계 경쟁이 시작됐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목숨에 대한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견제나 정치적 공격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그래서 서령도 어쩌면 이번 출장에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 일은 역시 없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말이 씨가 된다고, 괜히 얘기를 꺼내서 그것을 현실로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뭐, 그렇게 들렸으면 미안하고.”
서령의 말에 여전히 게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애쉬가 성의 없이 사과했다. 척 봐도 마음에도 없는 얘기다.
서령은 그런 그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업무에 집중했다. 오전 중에 업무를 끝내고 오후에는 출장을 나가야하니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해결사는 게임에 집중하고 아가씨는 업무에 집중한다. 오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 * *
목적지로 출발합니다.
자율주행 AI의 딱딱한 목소리가 차내에 울렸다. 언제나 허리춤에 매고 다니는 칼집을 풀어헤쳐, 옆에 기대어 세워둔 채 앉은 애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탄 차량을 뒤따르려는 검은 차가 보인다.
애쉬의 옆자리에는 서령이, 앞의 운전석과 보조석에는 에아임이 아닌 다른 비서, 그리고 베일라가 앉아있다. 에아임은 다른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다른 비서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네 명의 경호원들이 뒤 차량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거창하기도 하네.”
“그런가요?”
“그럼.”
겨우 임원급 하나 움직이는데 딸린 사람만 일곱이다. 애쉬를 포함한 경호원 여섯에 비서 하나. 심지어 본사에는 비서 둘을 남겨두고 왔으니 그들까지 움직였다면 아홉에 달하는 숫자였다.
딸랑 비서 하나 데리고 다닐 일반 임원이었다면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구성. 확실히 회장의 손녀딸인 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보인다.
애쉬는 뒤따라오는 경호원들의 차량을 흘깃 보곤 물었다.
“저 녀석들은 평소엔 어디 있다가 이제 보이는 거야?”
“네?”
“저기 저 경호원들.”
서령이 누굴 말하는지 몰라 묻자 애쉬가 몸을 돌려 차의 뒷 창 너머로 보이는 차량을 턱짓했다. 그제야 알아들은 서령이 대답했다.
“아, 저 분들은 본사 내부의 대기실에서 계세요. 본사에는 따로 경비 분들도 계시고 하다 보니.”
그녀의 말대로 유성 미래전자의 본사에는 어지간한 수준의 경호원들 못지않은 경비들이 배치돼 있었다. 다른 지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본사는 특히나 보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외부 파견이나 출장이 아니라면 경호원이라도 오늘의 애쉬처럼 업무 시간에까지 붙어있는 게 이상한 쪽에 속했다.
애쉬는 처음 듣는 대기실의 존재에 물었다.
“그런 것도 있었어?”
“네. 에아임이 설명도 드렸던 것 같은데요.”
계약을 맺을 때 에아임은 분명 대기실에 대해 설명을 했었다. 다만 대충 흘려들은 애쉬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서령이 대답하자 애쉬는 그랬었나? 하고 반응했다.
“언제 한 번 가봐야겠네.”
“다른 경호원 분들하고도 친분을 쌓아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싫어할 것 같습니다만.”
보조석에 앉아있던 베일라가 끼어들었다. 경호원들은 이미 애쉬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영입 자체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만큼 인상도 좋지 않을 것이다.
“아줌마가 나쁘게 말한 거 아니지?”
“본인이 없는 곳에서 나쁜 얘기를 할 만큼 삐뚤어지진 않았습니다.”
애쉬의 말에 아줌마라는 단어는 무시하고 넘긴 베일라가 대답했다. 실제로 그녀는 다른 경호원들에게 나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앞에서 애쉬에게 한 말은 그저 다른 경호원들이 가진 첫인상이 나빴던 만큼 여태껏 인사 한 번 하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베일라가 만나보고 느낀 애쉬는 슬럼의 악명 높다는 해결사 치고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사람이 진지한 부분이 없이 가볍고 조금 거친 느낌이 든다는 것 정도.
겨우 그의 장난들로 악감정을 가질 정도로 어리지 않다. 아줌마라는 말은 조금 거슬리지만 말이다.
“그래? 그럼 됐고.”
애쉬는 그녀를 놀려볼까 던진 말이 가볍게 막히자 흥미를 잃었다. 이제는 베일라도 그에게 조금 적응했는지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서령은 애쉬의 그런 생각을 알아채고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비서 아저씨는 에아임 아저씨처럼 수동으로 운전 안하네?”
“아, 예, 예. 수석비서님이 조금 특별하신 경우라고 생각합니다만.”
갑자기 자신의 방향으로 애기가 틀어지자 비서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애쉬의 말대로, 그는 운전석에 자리하고 있다 뿐이지 핸들이나 페달에는 일체 접촉하고 있지 않았다.
자율주행 AI가 생겨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요즘 세상에 수동으로 운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최신 차량들도 수동 기능은 갖도록 제작되지만, 폐차할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 아저씨도 은근히 구시대적인 부분이 있다니까.”
에아임은 AI에 기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운전도 무조건 수동으로 하고 휴대폰에 있는 AI 기능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야 익숙하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을 이 세계에서 살아왔을 에아임은 뭔가 꺼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애쉬와 서령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잡다한 얘기를 나눴다.
“그럼 그 아저씨랑은 어릴 때부터 알았던 거네?”
“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주셨으니 거의 15년 정도 됐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방향이 그녀의 어릴 적 얘기, 그리고 젊었을 때부터 그녀를 보살펴줬던 에아임에게까지 흘러갔다.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했어?”
“음….”
애쉬의 물음에 서령은 잠시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젊었을 때의 에아임 수석비서.
에아임과 서령이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의 여덟 살 생일이었다. 그녀의 조부인 유진혁 회장은 선물과 함께 앞으로 그녀를 보조해줄 사람으로 에아임을 붙여줬었다.
에아임은 그 후로 전심전력을 다해 서령을 보조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운전기사 노릇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지금도 에아임은 서령을 위해 일하고 있다. 수석비서로서 서령과 관련된 일이라면 거침없이 뛰어들었고, 애쉬를 만나기 위해 그 위험한 슬럼까지 직접 찾아간 것도 에아임이었다.
문득 그렇게 생각해보니 서령은 자신의 삶에 에아임이 너무 묶여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평소에도 고마움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까지 든다.
그녀는 애쉬에게 그런 에아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번 일이 끝나면 조금 긴 휴가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아임은 너무 일에, 서령에게 매여 살았다.
서령은 에아임을 알아온 15년 동안 그가 연인 한 번 사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유성 그룹 임원의 수석비서라는 인기 많을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령의 얘기를 듣던 애쉬가 물었다.
“그런데그 아저씨, 언제 한 번 크게 다쳤던 적 있어?”
“…아뇨. 딱히 그런 적은.”
애쉬의 질문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본 서령이 대답했다. 그녀가 아는 한 에아임은 크게 다치거나 했던 적은 없다. 15년 동안 일주일에도 서너 번 이상은 봤을 정도로 자주 봤는데 그가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면 그녀가 몰랐을 리 없다.
서령의 대답에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착각인가 보네.”
“혹시 아파보이거나 다친 부분이 있었나요?”
“아니, 별 건 아니야.”
애쉬는 서령이 걱정하는 듯하자 그냥 얘기를 넘겼다. 지금만 멀쩡하면 됐지.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다.
애쉬의 묘한 말에 찜찜함을 느낀 서령이었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나고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금세 지루해진 애쉬는 잠시 눈을 붙였다. 아직도 도착하려면 두어 시간은 남았다. 그동안 할 것도 없는데 잠이라도 자야지.
곧 그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
“……씨, 도착했어요. 애쉬 씨?”
“…으음?”
자신을 부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애쉬가 눈을 떴다. 서령이 그를 보고 있었다.
“호위 대상을 두고 그렇게 자도 되는 겁니까?”
조수석에 앉아있던 베일라가 눈을 뜬 그에게 한소리 했다. 애쉬의 임무는 자는 게 아니라 출장길에 따라가서 자는 게 아니라 서령을 지키는 것 아니었던가.
눈을 비빈 애쉬는 하품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흐아암…. 괜찮아,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일어나니까.”
“이사님이 몇 번이나 불러야 일어나는 사람이, 잘도 그러겠습니다.”
베일라가 못마땅해 했다. 애쉬는 그런 그녀의 말을 흘려 넘겼다.
자면 어떻고 자지 않으면 어떤가. 그 자신이 한 말은 분명한 사실인데.
아주 약간의 살기라도, 이상한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는 게 그였다. 그가 캐릭터를 설정할 때 올린 육체능력, 그리고 12레벨의 도검류 숙련도는 단순히 칼질할 때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감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난 거짓말은 안 해, 아줌마.”
“…퍽이나 그러겠습니다.”
아줌마라는 말에 인상을 구기며 핀잔을 주는 베일라. 그에 애쉬는 못 믿으면 어쩔 수 없고~ 하고 대꾸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차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 13구역 지사인가 뭔가의 지하에 마련된 주차장 같다.
덜컥. 문이 열리고 서령과 베일라가 먼저 내린다. 그리고 애쉬가 내리려던 찰나. 앞자리에 앉아있던 비서가 그에게 부탁했다.
“그, 애, 애쉬 씨. 혹시 저 좀 도와줄 수 있으십니까?”
“응?”
애쉬가 뜬금없는 부탁에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 안절부절 못하는 손끝.
얼핏 보면 자신을 두려워해서 나타나는 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건 두려움보다는 불안증에 가까웠다.
그것을 본 애쉬는 곧장 감을 잡았다.
‘초대장을 대신하는 안내인인가? 재밌겠네.’
그리고 일어서려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좋지, 무슨 일인데?”
“그게….”
“애쉬 씨, 안 내리세요?”
비서가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바깥에 있던 서령과 베일라가 나오지 않는 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애쉬는 둘에게 먼저 올라가라며 손짓했다.
“먼저 가, 여기 비서 씨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네.”
“저희의 주 임무는 어디까지나 호위입니다만.”
“괜찮아요, 베일라 씨. 그럼 저흰 먼저 올라가볼 테니 잘 부탁해요, 애쉬 씨.”
베일라가 애쉬에게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 했지만 맘씨 좋은 서령의 만류로 그냥 떠나갔다. 비서가 뭔가 힘 쓸 일이 있어 애쉬의 손을 빌리려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둘과 다른 경호원들이 떠나가자 애쉬는 비서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여자들이라면 빠져들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를.
“그래서 무슨 일이야? 말해봐, 비서 씨.”
그것은 그를 잘 아는 슬럼의 인간들이라면 기겁하며 피했을 악마의 미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