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4. 유성 그룹(20)
* * *
“일단 그 옷부터 어떻게 하죠.”
“흠…. 별로 티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검은색 롱코트에 안쪽은 어두운 계열의 셔츠였기에 조금 안심했지만 타인이 보기엔 아니었나보다. 그런 애쉬의 중얼거림에 베일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애쉬와 베일라는 빠른 걸음으로 외부 인력 대기실로 향했다. 외부 인력 대기실은 누군가에게 사용되는 일이 드물어 피에 젖은 상태를 숨기기 좋은 위치였다.
통신기를 들어 어딘가로 연락을 보낸 베일라가 애쉬에게 물었다.
“옷은 어떻게 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말이지.”
애쉬는 적당히 생략하여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도움을 핑계로 어딘가로 유인한 비서, 인적 드문 거리와 텅텅 빈 건설 현장,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용병들.
“그래서 그냥 싸웠지.”
“그게 전붑니까?”
“그럼?”
애쉬는 적당히 그들을 때려잡다 피에 젖었다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베일라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했다.
“묻은 피도 본인 건 아닌 것 같고. 멀쩡하게 돌아온 걸 보면 뭔가 수확은 없었습니까?”
“글쎄.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 비서한테서. 짧게 덧붙인 애쉬는 베일라에게 당부했다.
“아, 근데 아가씨한테는 말하지 마. 처분은 에아임 아저씨랑 얘기해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베일라도 유서령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에아임은 비서진의 총 책임자이기도 하며 좀 더 지저분한 싸움에 익숙하니 그쪽에게 맡기는 게 낫기도 했고.
똑똑.
그렇게 짧은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베일라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반응했다.
“왔나보군요. 일단 안쪽에 있는 샤워실에서 씻으시죠.”
찾아온 건 유서령의 다른 경호원이었다. 그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는데, 그걸 전하고는 자신이 애쉬 때문에 심부름까지 해야겠냐는 듯 무시무시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곤 돌아갔다.
애쉬는 그런 태도에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거, 사람 죽일 듯이 노려보고 가는구만.”
“안 그래도 감정이 안 좋은데 자극하지 마시죠.”
자기랑 상관도 없는 사람 옷을 사러 심부름을 하고 오면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할 것이다. 특히나 평소에 안 좋게 보고있던 인물이라면 더욱.
베일라는 애쉬의 샤워와 환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줬고, 애쉬는 금방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애쉬가 옷을 다 갈아입을 즈음이었다. 똑똑, 문을 노크한 베일라가 말했다.
준비 다 되면 나오시죠.
“오케이.”
짧게 대답한 애쉬는 젖은 머리칼을 대충 털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말하지 않아도 먼저 돌아온 비서의 위치를 알고 있는 베일라가 애쉬를 안내했다.
그럼 이제 우리 비서 씨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차례였다.
* * *
세상일이란 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조심, 몸을 사리며 사는 편이 좋았다. 본인에게 압도적인 능력, 재력, 권력 등의 힘이 있지 않은 이상은.
안타깝게도 애쉬를 용병들에게로 인도했던 비서에게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회장의 직계, 임원급의 비서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개 회사원일 뿐.
“안녕.”
“…!!”
“아, 애쉬 씨. 조금 늦으셨네요.”
“여기 비서 씨가 귀찮은 일거리를 던져줘서 말이지.”
곧 들어갈 회의를 준비하는 서령을 돕던 비서는 불쑥 나타나 자신에게 인사를 던지는 애쉬를 보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까도 그러더니 저혈압이라도 있나? 애쉬는 괜한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툭, 그 비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선물은 잘 받았는데, 감사 인사를 안 한 것 같네.”
“예, 예?”
애쉬는 자신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보는 비서에게서 온갖 생각이 읽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멀쩡하게 돌아왔지? 그 무장 인원들이 손을 봐준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혼자서 그들을 다 물리치고 온 건가?
애쉬는 그런 비서의 어깨를 붙잡아 놓고 서령에게 물었다.
“아가씨, 여기 비서 씨 좀 잠깐 빌려도 될까?”
“네? 으음….”
서령이 비서와 애쉬를 돌아봤다. 뭔가가 있긴 한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린 비서와 그런 비서를 붙잡고 있는 애쉬. 뭔지는 몰라도 가볍게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곧 회의 시간이긴 한데, 그냥 보내도 괜찮을까?
서령이 고민하는 이유는 곧 열릴 회의에 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일 년 동안 본사 다른 이사들의 수많은 견제를 받으며 버텨온 그녀다.
보조하는 비서 하나 없다고 어리바리할 리가.
다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비서의 안위였다. 애쉬에게서 은근히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분명 비서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게 아닐까.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벌은 받아야겠지만 애쉬에게 맡기면 분명 심한 꼴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실제로 애쉬에게 그녀가 걱정하는 것 같은 상황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안에서 애쉬의 이미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애쉬와 함께 온 베일라는 그런 서령의 고민을 알았는지 그녀를 안심시켰다.
“제가 옆에서 지켜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사님.”
“아, 그래요?”
“예.”
“사, 상무님….”
그렇다면야 뭐…, 하고 서령이 넘어가려는 듯하자 비서가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서와 눈이 마주친 서령은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끝내 애쉬와 베일라를 믿고 맡겼다.
“그럼, 저는 회의가 준비가 바쁘니 얘기는 다녀와서 들을게요.”
“그래, 수고해.”
“사, 상무님, 상무님!”
철컥. 서령이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임원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휴게실에는 베일라와 비서, 그리고 애쉬만이 남았다.
비서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애쉬를 올려다봤다. 그런 비서에게 애쉬는 안심하라는 듯 대답했다.
“걱정 마, 대답만 잘 하면 고문은 안 할 테니까.”
베일라. 자신을 부르는 애쉬의 목소리에 베일라가 의자를 끌어다 비서를 앉히고 그 뒤에 섰다. 애쉬도 의자를 하나 끌어다 그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어둡기까지 했으면 어딘가의 취조실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비서의 정면에 다리를 꼬고 앉은 애쉬가 대뜸 물었다.
“누구야?”
“…예?”
“누가 시켰냐고.”
“그, 그게….”
비서가 그 물음에 우물쭈물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징조다.
이 아저씨가 지금 자기 처지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눈깔을 굴리고 있네.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리고 시작해야 하나? 짜증이 난 애쉬가 꼰 다리를 풀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하지만 애쉬가 일어서기 전, 베일라가 먼저 행동했다.
비서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쥐어짜듯 힘을 준다.
양 팔에 기계를 삽입한 사이보그의 강력한 완력이 바이스처럼 비서의 어깨를 조였다. 비서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아아악!”
“순순히 대답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베일라의 행동에 일어서려던 애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베일라의 행동에 조금 놀랐다. 어째 몸 쓰는 일을 하는 것 치곤 온건한 느낌이다 싶었는데, 필요할 때는 하는 성격이었다.
그러고 보면 분쟁지역에서 몇 년 동안 근무했다고 했었지. 아마 비싼 값 주고 고용한 용병이나 군인을 놀리진 않았을 테니 사람을 죽여 본 경험도 제법 있지 않을까.
“아악! 잠깐, 잠깐만요! 이것 좀…!”
비서의 다급한 말에 베일라가 잠시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깨에 손을 올린 채다.
비서는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손을 두렵게 쳐다봤다. 과장이 아니라 잡혔던 부분의 뼈에 금이 간 것처럼 욱신거리는 게 곧 부어오르기라도 할 것 같았다.
“마, 말하겠습니다. 말 할 테니….”
“그러게 순순히 대답하라니까. 이번에도 헛소리 하려 그러면 멀쩡하게 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시 다리를 꼬고 앉은 애쉬가 말했다. 비서는 그런 애쉬의 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야?”
“유, 유상혁 부사장의 비서였습니다.”
이번엔 대답이 빠릿빠릿하게 튀어나왔다. 들어본 것 같은 이름. 애쉬는 그 이름의 주인이 서령의 가족 중 한 명일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정확히 누군지는 몰랐다.
애쉬가 물었다.
“유상혁?”
“이사님의 둘째 오빠입니다. 유성 증권의 부사장이죠.”
누군지 모르겠다는 애쉬의 물음에 베일라가 대신 대답했다. 베일라는 서령의 경호원이 된 지 일 년이 넘게 지났다. 서령의 가족 관계 정도는 기본 숙지 사항이다.
유상혁.
나이 39세. 36세의 나이로 유성 증권의 부사장에 부임하여 호시탐탐 사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회장의 둘째 손자.
베일라가 비서의 입에서 나온 인물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 유상혁인지 뭔지 하는 놈이 시켰다 이거지?”
“예.”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예?”
비서가 애쉬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내가 그걸 어떻게 믿냐고. 네가 이간질 하는 거면?”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저한테 유인하라고 시킨 사람은 분명 유상혁 부사장의 비서였습니다!”
비서는 혹시나 다시 한 번 고통을 받을까 어깨에 올려진 베일라의 손을 힐끔 바라봤다. 베일라는 그 손에 힘을 주는 대신 비서의 말에 동조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호흡과 혈압, 심박수를 체크 했는데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게 거짓말이라면 이 비서는 아주 대단한 사기꾼이 될 자질을 갖고 있는 거겠죠.”
“그런 것도 돼?”
“유성의 군사 연구소에서도 가장 최신에 나온 만들어진 제품이니까요.”
대외적으로 내보일 시제품도 나오지 않은 물건입니다.
베일라의 대답에 애쉬는 그녀의 팔을 슥 훑어봤다. 겉으로 보기엔 인간의 팔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걸 보면 저런 거짓말 탐지 기능 외에도 여러 기능을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굉장히 편리해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멀쩡한 팔을 기계로 대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단 말이지.”
“예!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베일라의 말에 죽다 살아난 듯한 비서가 힘차게 대답했다. 애쉬는 그런 비서가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슥 노려봤다.
비서는 그의 눈빛에 히익, 하고 다시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심심한데 회의 끝날 때까지 좀만 갖고 놀까?”
“…위험에 빠져서 화가 난 건 알겠습니다만 그런 비인륜적 행위는.”
애쉬의 물음에 베일라가 진지하게 반응했다. 애쉬는 그런 베일라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 농담이잖아, 농담. 겁 좀 주려고 한 건데 진짜 재미없게 구네, 이 아줌마.”
“….”
애쉬의 말에 베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입을 열면 뭔가 다른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애쉬는 생각보다 더 시시하게 진행되는 취조에 아쉬움을 삼켰다.
애초에 펜이나 잡고 놀던 샌님이 굳센 의지로 외압에 버티는 얘기는 소설 속에나 있는 일이었다.
평생을 편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살아왔을 녀석들이 고통이라는 것을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잖은가.
그렇게 시시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있는 애쉬를 대신해 베일라가 물었다.
“왜 그런 겁니까.”
“그, 그게….”
잠깐 편을 들어줬더니 다시 대답이 늦어진다. 베일라의 손이 어깨를 타고 목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에 기겁한 비서가 다급히 대답했다.
“상무님이 경쟁에서 밀려나서도 자리를 보전해준다고 해서…!”
“……그게 답니까?”
“예….”
그야말로 뻔한 얘기였다. 임원의 비서라는 위치는 자신이 모시는 임원에게 모든 게 달려있다.
유성에서 월급을 주고 고용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원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원이 승진하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만큼 비서의 위상도 올라가나, 임원이 퇴사라도 당하면 비서 또한 마찬가지로 떨어져나간다.
유상혁 부사장에게 회유당한 비서 또한 한 가정의 아비이자 책임자였다.
겨우 스물셋에 불과한 유서령 상임 이사는 누가 봐도 가망성이 없는 회장 후보였고, 유성 증권의 부사장이라는 위치에 앉은 유상혁은 그녀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유망했다.
마음이 기우는 것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다른 비서나 경호원이 아니라 외부인 하나만 건들 거라고 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변명하는 비서에게 베일라도 차마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저 비서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에.
몇 년 동안 같이 일해 온 다른 비서나 경호원들이 아니라 외부인만 가볍게 손봐주고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은 너무도 교묘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거기까지 들은 베일라가 애쉬의 눈치를 봤다. 이번 일로 그의 실력은 어느 정도 알았다. 적어도 십수 명의 무장 용병들 틈새에서 생채기 하나 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실력자.
아무리 최신예 장비로 무장한 그녀라고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가 저런 비서의 변명에 분노하기라도 한다면 쉽게 가라앉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 밖에도 애쉬의 반응은 아무렇지 않았다.
“뭐, 됐어. 괜히 더 들어봐야 찝찝해지기만 하니까.”
나머진 에아임 아저씨가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말한 애쉬는 장난을 치면 쳤지 더 이상 비서를 위협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녀와는 정말 다른 감성이다. 목숨을 위협받았는데도 저렇게 의연히 넘길 수 있다니.
베일라의 머릿속에서 애쉬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변했다.
‘나이는 스물일곱이나 먹고 애처럼 구는 남자’에서 ‘나이는 스물일곱이나 먹고 애처럼 굴지만, 나름 어른스러운 부분은 있는 남자’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