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78화 (78/230)

〈 78화 〉 5. 후계경쟁(2)

* * *

“아가씨, 괜찮아?”

“흐, 흐윽….”

애쉬가 자신의 품안에서 눈물을 훔치는 서령을 불렀다. 서령은 대답도 않고 훌쩍이며 그를 붙잡고 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애쉬의 초인적인 신체 능력은 120km/h이상으로 달리는 차량에 직접적으로 치이는 것도 아니고, 뛰어내리는 정도로 어떻게 될 만큼 약하지 않았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서령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고 있는 애쉬에게 뒤늦게 뛰어내린 둘이 다가왔다.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

베일라가 착지를 잘 했는지 에아임과 그녀에게도 특별히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있다고 해봐야 약간의 찰과상 정도. 하지만 어쩐지 베일라는 조용한 상태다.

이유를 알 것 같은 애쉬였지만 당장은 그런 곳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 온 차량은 이유를 알 수 없는 AI의 폭주에 저 멀리 떠나간 상태고, 만약 이 일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면 그들을 이곳으로 유도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는 차 한 대 없는 이곳을 향해 눈부신 전조등을 켠 차량 몇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는 차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글쎄….

애쉬는 미리 일행에게 경고했다.

“아직 안심하긴 이른 것 같은데?”

“예?”

“…저기 몇 대의 차량이 오고 있습니다.”

에아임이 애쉬의 말에 의문을 표하고, 뒤늦게 차량들을 발견한 베일라가 몸을 긴장시켰다.

‘우연히’ 경호원들이 먼저 퇴근하자 AI가 폭주한 차량, 그 차량은 ‘우연히’ 이런 곳으로 그들을 몰아왔고, 지난 몇 분 간 지나가는 차 한 대 보기 힘들었던 이곳에 ‘우연히’ 지나가는 몇 대의 차량이라….

애쉬는 혹시나 해서 슬쩍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역시.’

역시나, 전파 상태가 먹통이다. 통신 상태를 표시하는 게이지가 바닥을 치고 있다. 이것까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애쉬는 휴대폰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외부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지원은 바라지 않는 게 맞겠지.

그 혼자뿐이었다면 지원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무력한 호위 대상이 있는 이상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탓이다.

에아임은 애쉬가 휴대폰을 집어넣는 걸 보고 자신도 꺼내들었지만 그의 휴대폰이라고 통할 리가 없다. 이내 그도 그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전파가….”

에아임이 허망한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이제 그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일련의 상황은 절대로 우연에 우연이 연속해서 겹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아직 훌쩍이느라 제대로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서령을 제외한 셋이 다가오는 차량들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히 도로를 달리던 다섯 대의 차량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곧 완전히 멈춰 섰다. 불과 십여 미터를 두고 멈춘 차량들의 전조등이 일행을 비춘다.

차량들의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의 물결이 쏟아졌다. 그것을 본 애쉬가 한 마디로 평가했다.

“아주 개떼처럼 몰려왔구만.”

저 차량 어디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지 겨우 다섯 대의 차량에서 내린 장정의 숫자가 마흔도 가볍게 넘었다.

대충 잡아도 그 숫자가 마흔에서 쉰 사이. 아무리 대형 차량들이라고는 해도 어지간히 꽉꽉 눌러 담지 않으면 불가능한 숫자다.

발걸음 소리 하나하나가 묵직한 것이 사이보그나 강화 인간도 제법 섞여 있는 것 같다.

애쉬는 그걸 보고 서령을 붙잡아 세웠다.

“이봐, 아가씨. 설 수 있지?”

“네….”

서령은 아직 풀린 다리에 힘이 돌아오지 않은 듯 한 차례 휘청였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에 억지로 버티고 섰다.

애쉬는 자신의 몸으로 가리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그리고 물었다.

“땀내 나는 놈들이 아주 우글우글하네. 이쪽에 용건이라도 있으신가?”

“그쪽은 얌전히 계시죠. 저는 당신 같은 밑바닥 쓰레기가 아니라 유서령 이사님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온 것이니.”

애쉬의 물음에 검은 양복들 사이에서 나선 한 남자가 대답했다. 갈색 곱슬 머리칼과 금색 무테안경. 완전히 비실비실한 게 건장한 에아임과 달리 이쪽은 진짜 샌님이다.

평생 책상 앞에 앉아 공부밖에 안했을 것 같은 인상.

“오….”

애쉬는 용감하게도 자신의 앞에 나서서 지껄이는 녀석을 보고 감탄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슬럼에서 자신을 봤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개다.

애쉬는 녀석을 쳐다봤고, 곧 그와 눈을 맞췄다.

안경잡이 남자는 더러운 것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마주봤지만 곧 그 시선이 바뀌어갔다.

경멸이 누그러지고 당황이 찾아든다. 그리고 곧 그는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당황의 시선은 이미 공포로 바뀐 지 오래.

이른바 살기라고 하던가.

애쉬가 몇 년 동안 이 세상에서 구르며 익힌 잔재주 중 하나였다. 12레벨의 도검류 숙련도는 이런 비현실적인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지간히 대가 센 사람도 식은땀 흘리게 만드는 살기를 저런 안경잡이가 견뎌낼 리가 없다.

안경잡이는 공포에 몸이 굳어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애쉬는 그런 그를 향해 낮게 웃으며 물었다.

“뒤에 덩어리들을 믿고 까부는 것 같은데, 감당 가능하겠어?”

부들부들 떨리는 몸, 비오는 것처럼 쏟아지는 식은땀.

안경잡이의 부하 정도로 보이는 양복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나서려 했지만, 어느새 몸을 추스르고 한 발 빠르게 움직인 서령으로 인해 먼저 물러나게 된 것은 애쉬였다.

“애쉬 씨, 잠시만요.”

“흐음…. 그래.”

“허, 허억…!”

서령의 제지에 애쉬는 안경잡이에게 집중하던 살기를 거두고 한 발짝 물러섰다. 안경잡이가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겨우 서있던 서령이 당당한 척 무리의 정면에 섰다. 다만 불안한 눈빛은 완전히 숨겨지지 않은 게 조금 겁을 먹은 것 같긴 하다.

조금 못미덥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름 성장의 계기도 될 수 있겠지.

애쉬와 어느새 다가온 베일라가 서령의 양옆에서 돌발 상황에 대비했다.

“저를 찾은 이유가 뭐죠?”

“그, 그건….”

안경잡이는 아직 여파가 가시지 않은 듯 애쉬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뒤늦게 허리를 곧추 세우고 말했다. 귀한 집 아가씨인 서령보다 티 나게 겁먹은 모습이었다.

“…유선혁 사장님께서 내리는 제안입니다.”

애쉬가 슬쩍 시선을 돌려 덩치들을 향하자 그제야 조금 안심했는지 안경잡이는 서류를 한 장 꺼내들고는 그것을 애쉬와 서령 쪽에서도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이곳에 서명해주십시오.”

어두운 밤인데다 거리도 떨어져 있어 서령이나 다른 사람들은 못 읽을지 모르겠지만 애쉬에게는 사이보그들의 인공 안구 못지않은 눈이 있었다.

조명은 차량들의 전조등만으로 충분하다.

애쉬는 그곳에 적인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웃기는군.”

“네? 뭐라고 적혀있는 거죠?”

애쉬의 목소리에 서령이 물었다. 애쉬는 그것을 천천히 풀어 얘기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거창할 정도로 길었지만 중점만 얘기해보자면 이런 뜻이었다.

‘유성 미래전자에 가진 유서령의 지분 5%를 유선혁 사장에게 양도.’

‘유진혁 회장 사후 받게 될 유산을 모두 유선혁 사장에게 양도.’

‘그룹 임원 회의에 후계 경쟁 공식 사퇴 발표.’

‘유진혁 회장, 유장혁 부회장과의 절연’

그 외에도 ‘1~3구역 바깥 구역에서 거주’, ‘유성 미래전자에서 사직’ 따위의 조건이 적혀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서령은 지분과 유산의 양도라는 조건을 들을 때까지는 침착한 표정이었으나 조부인 유진혁 회장, 아버지인 유장혁 부회장과의 절연이라는 조건에서는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가 난 표정으로 변했다.

수십의 검은 양복들이 그녀를 노려보며 위협하고 있었음에도.

하지만 그 정도로 화가 난 그녀도 차마 상대방에게 폭언을 쏟아 내거나 직설적으로 서명을 거부하는 등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서령은 바보가 아니었다. 단순히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내밀기 위해 수십 명의 인원을 데려오진 않지 않았겠는가.

아무리 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라지만 그녀도 알았다. 그녀가 거부하는 순간 저들 모두가 무기를 뽑아들고 자신과 일행을 겨눌 것이라는 걸. 유선혁 사장이라는 주모자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들은 모두 낭떠러지 끝자락에 걸친 셈이다.

“…….”

“잠깐의 고민할 시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유서령 이사님.”

이제 이사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듯 겁먹었던 신색을 회복한 안경잡이가 선심 쓰는 것처럼 지껄였다.

애쉬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기세등등할만한 숫자 차이긴 했다. 쉰에 가까운 양복들과 기껏해야 넷에 불과한…, 그나마도 한 명은 완전히 무력한 보호대상에 불과한 일행.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는 것 아니겠는가. 애초에 애쉬가 이 의뢰를 받았던 것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간질간질한 일상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기 위해서였지.

애쉬는 고용주인 서령의 결정에 따라 곧장 저들과 싸울 준비가 돼 있었다. 만약 그녀가 싸움을 포기하고 저 서류에 서명한다면?

뭐, 유서령이라는 아가씨에게 조금 실망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야 그녀는 영원히 애쉬에게 있어 아가씨일 것이다.

“어떡하죠…?”

잠시 일행을 모아 서령이 물었다. 그녀는 살짝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저들 수십이 덮친다면, 총구를 겨눈다면 그녀와 일행이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저 서류에 서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돈이나 시답잖은 회사 지분 따위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혈연이라는 것을, 가족이라는 것을 이렇게 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베일라와 에아임은 함부로 서령에게 이것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그것을 짊어지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서령, 그녀 자신이었지.

그들은 그저 따르면 될 뿐이다. 그녀의 선택에 뒤따르는 결과에.

“흐윽…. 어떡해요, 저….”

그 압박을 견뎌내지 못한 서령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 지금 그녀 생각 하나하나가 너무도 무거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책임의 무게.

그것이 그녀를 짓눌렀다.

이쪽을 선택하면 가족들과의 절연이 기다리고, 반대쪽을 선택하면 자신들의 위험이, 어쩌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을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대신 선택해줄 수 없는, 오롯한 그녀만의 선택.

에아임과 베일라, 둘 모두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애쉬가 서령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서령이 갑작스런 접촉에 놀라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올려봤다.

애쉬 론모어.

그는 이런 상황에서마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빛나고 있었다. 저 달빛을 받아서 잿빛의 머리칼이, 진청색의 눈동자가.

그리고 그라는 존재 자체가 빛나고 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만큼은 여전했다.

넘쳐나는 자신감, 함께 있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존재감.

그런 그가 말했다.

“어느 쪽이든 괜찮으니까 깊이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대로 정해.”

서명할 거야, 아니면 싸울 거야?

느긋하게 이어진 애쉬의 물음.

서령은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만 같아선…,

마음만 같아선 저딴 종이 쪼가리에 서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령이 천천히 베일라와 에아임, 그리고 애쉬를 돌아봤다.

잘못된 선택은 그녀 자신 뿐 아니라 이들까지도 모두 죽게 만들 수 있었다.

베일라와 에아임은 그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듯 기다렸고, 애쉬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선택이 기대된다는 것처럼.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자리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저, 저는….”

‘깊이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대로 정해.’

나라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결정을 내리려는 서령의 머릿속에 그런 애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끝내 결정한 서령은 그런 애쉬의 목소리로 가득한 걱정과 공포를 밀어냈다.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외쳤다.

“저는…,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싸우고 싶어요!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따라주는 이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아마도 후회할 선택.

일행에 대한 미안함과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 흘리는 그녀.

“미치신 겁니까? 아니면 진짜 바보신가요? 이걸 거절한다고요?”

그 외침을 들은 안경잡이의 조롱 섞인 목소리에 서령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어떡하지?

정말로 이 선택으로 인해 우리가 모두 죽는…….

“그래, 할 때는 해야지.”

하지만 턱. 서령의 머릿속에 다시 차오르기 시작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녀의 숙인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이 걷어냈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곱지만, 무엇보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애쉬의 손이었다.

서령은 눈물 흘리며 멍하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애쉬를 바라봤다.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그. 애쉬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서령에게 덮었다.

“읏….”

순간 놀랐을 정도로 묵직한 무게. 애쉬는 그녀가 그 무게에 놀라든 말든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직 부족하긴 한데, 일단은 합격.”

“흐윽, 네…?”

“합격이라고, 아가씨.”

아니, ‘유서령’.

뜬금없는 ‘합격’이라는 말에 당황했던 그녀였지만, 뒷말을 다 듣고서야 서령은 문득 애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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