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83화 (83/230)

〈 83화 〉 5. 후계경쟁(7)

* * *

뭐였지. 방금 그 감각은.

애쉬는 넋을 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대방에게 공격을 이어갈 생각도 못하고 직전 자신이 느낀 감각의 여운에 빠져 들었다.

방금 전, 권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핸드캐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초대구경의 리볼버에서 연달아 쏘아진 탄환.

그리고 동시에 네 곳을 노리는 탄환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느껴진 이상한 감각.

아니, 사실 이상하다고 하기는 뭐하고 상쾌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그저 세상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애쉬는 한 순간 가벼워진 몸으로 그저 내려베었을 뿐이나, 일반적인 검이었다면 단 한 발만 쳐내도 검이 부서지고 손아귀가 찢어져도 이상치 않았을 총탄들을 손쉽게 갈라버렸다.

‘게다가 아무런 저항도 없었어.’

애쉬가 자신의 검과 손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제법 강한 저항력을 예상하고 힘을 줬는데, 골든 캐니언이 쏘아낸 탄환보다 훨씬 가볍고 작은 탄환들을 쳐낼 때도 있었던 충격이 이번에는 거의 없었다.

마치 물리법칙을 뛰어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대체 방금 그것은 뭐였을까.

애쉬가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단하군. 어떻게 한 거지?”

애쉬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몇 걸음 멀어진 골든 캐니언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애쉬는 곧 서령과 다른 일행을 쫓아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생각을 끊었다.

그런 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도 됐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받은 의뢰였으니.

“뭐, 아쉽게 됐네.”

애쉬가 골든 캐니언에게 말했다. 갑자기 이상한 상태에 빠져 아무렇지 않게 베어버리긴 했지만, 상대방이 마지막에 보여준 리볼버 패닝은 그야말로 예술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완벽했다.

설마 자신이 접근하는 순간을 노려 반격할 줄이야.

골든 캐니언,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애쉬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사격 솜씨에 감탄했을 정도니 말이다.

리볼버를 쓰는 주제에 최신형 자동권총보다 예리하기 그지없고, 재장전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한 구조는 개나 줘버린 듯 눈 깜짝할 새 끝나버리는 리로딩까지.

저 정도 실력이면 원작 게임 속 숙련도 레벨로는 몇이나 될까. 8? 아니면 그 이상?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나 소나 이런 실력을 갖고 있을 리가.

이 세계에 온 뒤로 봐왔던 총잡이 중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실력자.

이쯤 되니 처음에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저 카우보이모자와 독수리 케이프도 낭만 있어 보였다. 왜, 애쉬 자신이 검만 쓰는 것처럼.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좀 더 재미를 봤을 텐데.

애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야하는 상황에 다시 한번 아쉬움을 삼켰다. 이제는 정말로 끝을 내야 할 때였다.

“그럼 이제 끝을 보자고.”

한 번 상대방의 전력을 봤으니 두 번째부터는 훨씬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 애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다시 검을 들어 올릴 때였다.

골든 캐니언이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금장 리볼버를 슬쩍 내리며 물었다.

“잠깐,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긴 뭐한데. 우릴 그냥 보내주면 안되겠나?”

“뭐?”

“일행이 쫓기고 있으니 너도 괜히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겠지. 우릴 보내주면 이번 일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겠다. 이쪽도 의뢰인에게 속았단 말이다.”

겨우 민간인 둘에 경호원 둘만 사로잡는 일이라고 들었지, 이런 괴물이 섞여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의뢰인의 부하들이 하고 있는 작전이 어딜 봐서 생포란 말인가. 목표물들이 맞든 말든 총부터 쏴재끼는데.

일단 의뢰인의 부하들이 죽어나가니 손을 보태긴 했는데, 이런 계약 사항 위반에 정보 은폐까지 겹치면 더 이상 의리를 지킬 이유도 없었다.

그런 것들을 설명하는 골든 캐니언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지만, 어쩐지 애쉬는 그 모습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그를 유인한 비서와 기다리다 덮쳐오던 용병들. 그들의 실루엣이 이 카우보이들에게 겹치는 듯 했다.

“흐음….”

어쩔까.

골든 캐니언의 말을 들은 애쉬가 잠시 그들의 처분을 고민했다. 여기서 이들을 모두 죽이느냐, 아니면 그냥 살려 보내느냐.

먼저, 죽인다면 뒤가 깔끔할 것이다.

실력 있는 사수의 원한을 산 채로 지내는 건 제법 위험한 일이 될 테니까.

지금이야 리볼버나 들고 다니긴 하지만 자동소총이나 저격총까지 저런 실력으로 다룬다면 언젠가 큰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살려둔다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굳이 꼽아보자면 재미라거나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시간 소모가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처리하려면 못해도 분 단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지금 같이 급한 상황에서 몇 분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불과 몇 분 차이로 호위 대상인 서령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겠는가.

고민하던 애쉬는 점차 죽이는 쪽보다는 그냥 보내버리는 쪽에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시간이 문제였다.

베일라가 그렇게 무능해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열이 넘어가면 위험할 수 있었다.

수십을 상대로도 상처 하나 없이 끝내는 애쉬 쪽이 이상한 것이다.

결국 살려 보내는 쪽으로 마음이 반쯤 정해진 애쉬가 말했다.

“좋아, 살려줄게.”

“…정말인가?”

“난 거짓말은 안해.”

설마 정말로 저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물어오는 골든 캐니언에게 애쉬가 대답했다. 애쉬 자신의 말대로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며,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말한 것은 지켰다.

그런만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단, 애쉬가 입을 열어 조건을 붙였다.

“대신 주로 쓰는 쪽의 손목 하나는 줘야겠다.”

총잡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손의 손목을 잘라놓는다면 뒤따라와 방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겠다던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100% 믿는 것도 아니었다.

손목 정도는 내놔야 보내줄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곤 거절하면 시간이 소요돼도 무조건 죽이겠다는 애쉬의 살벌한 눈빛에 골든 캐니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손목? 그 정도면 되나?”

그리고는 애쉬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과감하게 움직였다.

품에 들어있던 보위 나이프를 들어 그대로 자신의 손목에 푹 박아 넣고 그대로 옆으로 날을 눕히며 가른다.

그 또한 강화인간이었기에 무식하게도 힘만으로 칼을 박아 넣고 손목을 자를 수 있었다.

골든 캐니언은 이가 부서져라 악물고는 반쯤 잘려나간 손목에 다시 나이프를 가져갔다.

“크흐읍!!”

툭.

피범벅이 된 손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골든 캐니언은 시체처럼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안색으로 태연한 척 애쉬에게 말했다.

“흐으으으…. 자. 잘랐다. 이걸로, 흐으, 됐겠지.”

“……그래.”

고통에 젖은 것을 최대한 숨기려는 듯한 목소리.

그 과감함에 놀란 애쉬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사실 뒤쪽의 카우보이들의 것도 받으려 했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구차하게 더 받은 필요도 없어 보인다.

골든 캐니언, 지금 그가 보인 기개는 애쉬가, 그리고 지구에 있을 적 현실의 이진현이 생각하던 진짜 남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에 감명 받은 애쉬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저런 남자가 제 말을 어길 것 같지는 않았다.

애쉬가 휘릭, 검을 한 차례 휘둘러 핏물 따위를 털어내곤 그대로 납검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웬만해선 이런 소리 안하는데, 그쪽. 제법 멋있네.”

“하, 하하핫. 거 고맙군. 용돈벌이 삼아 온 길인데, 오히려 손목 하나 맞추면 돈이 깨지게 생겼어.”

이럴 줄 알았으면 잘리기 전에 케일 가슴이라도 한 번 주물러보는 거였는데.

애쉬의 칭찬에 손목을 꽉 잡아 지혈하고 있는 골든 캐니언이 웃으며 후회된다는 듯 진담인지 헛소린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에 애쉬도 픽 웃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원래는 나머지도 받으려했는데, 됐어.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고.”

정말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을 만났다. 이걸 은혜 삼든 복수를 원하든 재밌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움직이길 몇 걸음 움직였을 때였다.

“어이! 받아라!!”

골든 캐니언이 소리치며 뭔가를 던졌다. 애쉬가 반사적으로 돌아 그것을 받았다.

척.

손아귀에 꽉 차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 묵직한 무게감과 은근히 감도는 화약내.

“…?”

골든 캐니언이 던진 것은 자신이 사용하던 금장 리볼버와 달리 품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은빛 리볼버 한 자루였다.

멋들어진 문양과 그립에 새겨진 Golden Canyon이라는 고풍스런 글씨체.

오랫동안 사용한 듯 조금 낡긴 했지만 그 멋스러움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걸 왜 넘긴 거지? 돌아선 애쉬의 의문 섞인 표정에 골든 캐니언이 외쳤다.

“내 본명은 게빌 리퍼슨이다! 애쉬 론모어! 언제든 8구역의 리퍼슨 물류로 돌려주러 와라!”

아주 거하게 환영해줄 테니까!!

잊지 말라는 듯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 애쉬는 가볍게 웃으며 돌아서선 알겠다는 듯 리볼버를 한 번 들어보였다.

제 손목을 받아갔는데도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갚겠다는 건가? 끝까지 유쾌한 녀석이었다.

* * *

“최대한 둘러싸서 공격해!”

“유성의 경호원들은 다 저런 건가?”

검은 양복들의 외침과 복잡한 총성이 귀를 가득 채웠다. 베일라는 전력을 다해 회피기동을 펼쳤다. 작게 울리는 총탄의 파공음이 살을 떨리게 만들었다.

베일라가 급박한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 처음에는 여섯이었던 것이 이제는 열이 넘었다. 몇 명을 처리했는데도 총성을 듣고 주변을 수색하던 녀석들까지 몰려든 탓이다.

시선을 끌려는 목적은 제대로 달성한 셈인데, 이렇게 되면 목적 달성의 뒷일이 문제였다.

서령과 에아임이 빠져나갈 시간은 어느 정도 벌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녀 자신이 빠져나가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베일라가 작게 후회했다. 처음에 총을 들고 있는 녀석들만 잘 처리했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기습으로 둘을 처리하긴 했지만 불행히도 칼을 들고 있던 녀석들이라 후에 정신을 차린 상대방들을 빠르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이보그라고 외골격을 삽입하지 않은 이상 총기에 맞으면 큰 상처를 입고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당연히 총기를 경계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이대로 가면 여기가 자신의 무덤이 될 수도 있었다.

핏. 기둥이 두꺼운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뺨을 총탄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는 핏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아…!”

누군가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뺨을 스친 총탄의 주인이겠지.

다시 고개를 넣은 베일라가 뺨을 슥 소매로 쓸어내렸다. 얇은 옷감 위로 붉은 색이 덧입혀진 게 보였다. 기계로 대체한 그녀의 좌안은 어둠 속에서도 대부분의 색깔을 완벽하게 구분해냈다.

“빨리 튀어 나와! 망할 년!”

당신 같으면 나가겠습니까. 나가면 바로 벌집이 될 걸 아는데.

가볍게 받아넘긴 베일라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뭔가 없을까. 베일라가 몸을 숨긴 나무 위쪽을 바라봤다. 가을이라 듬성듬성 나뭇잎이 떨어지긴 했지만 나름 풍성하다. 그 옆의 나무도, 그리고 그 옆도.

저 나뭇잎들을 믿고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며 도망쳐보기라도 해야 하나. 그녀가 그런 어이없는 생각까지 할 때였다.

“으아악! 내, 내 팔! 팔이!!”

“아, 미안. 목을 자른다는 게 그만.”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놀란 베일라가 나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폈다.

십여 명의 검은 양복들 사이, 유일하게 은빛으로 빛나는 남자가 서있었다. 칼 한 자루를 뽑아 들고.

언제나 그렇듯 뺀질뺀질한 표정. 팔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는 검은 양복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십여 명의 적에게 거의 둘러싸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애쉬 론모어?”

베일라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살아있었나? 그것도 저렇게 멀쩡히?

그가 아무리 실력 있는 해결사라고는 해도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도로에서 수십의 적을 상대로 무사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는 상상보다 더 멀쩡한 모습으로 이곳에 나타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고개를 내민 그녀와 애쉬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본 애쉬가 씩 웃었다.

“오, 아줌마. 뭐해? 무슨 미어캣 마냥.”

“이 상황에 무슨 헛소리를….”

베일라의 중얼거림과 마찬가지로 순간 상황이 파악된 검은 양복들이 광분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른에 가까운 동료들에게서 빠져나온 칼잡이가 이곳에 있다.

게다가 지금은 하나의 팔이 잘려 구르고 있는 상태.

“미친 새끼! 죽여!”

누군가의 외침이 시발점이 되어 잠시 적막에 빠졌던 숲속을 총성이 다시 한번 가득 매웠다.

“……!”

그에 긴장감 없는 애쉬의 모습이 곧 피투성이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베일라는 보고 말았다.

그 예술과도 같은 움직임을.

불필요한 움직임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듯 완벽하리만치 깔끔하게 절제된 발걸음.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된 호선을 그리는 칼날.

호선을 그리는 칼끝에 몇 번의 불똥이 걸리고, 다른 총탄들은 그의 그림자조차 스치지 못했다.

베일라는 그 광경에 그녀답지 않게 경악하고 말았다.

저런 게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저 남자가 그녀와 같은 인간이 맞단 말인가…?

개조된 좌안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 베일라였기에 일순간 일어난 일에 경외심까지 느끼고 말았다.

저것은 단순히 검의 숙련자라거나 달인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을 다른 차원의 무언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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