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5. 후계경쟁(14)
* * *
“…저요?”
“어.”
쪼르르륵. 애쉬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서령은 그 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베일라의 삶과 비교한다면 서령의 인생은 보잘 것 없다.
그저 개인의 고뇌에 찬 인생일 뿐, 진정으로 모든 것을 잃어본 베일라와 비교한다면 애교에 불과했다.
그런 걸 들려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서령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베일라랑 다르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괜찮다니까.”
“…….”
서령이 고민했다. 애쉬는 다시 따른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그런 서령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베일라도 내심 기대하고 있는 듯 서령만 바라봤다.
고민하던 서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인생에 굴곡이라곤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 어릴 적부터 시작해 유성 미래전자에 입사할 때까지.
괜히 분위기만 망칠까 말하고 싶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기만 하고 입을 다무는 건 예의가 아닐 것이다.
잠시 자신의 앞을 내려다보던 서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하나 들고 왔다. 그에 당황한 베일라가 그녀를 불렀다.
“이사님?”
“저도 한 잔 주세요.”
베일라의 부름에 대답도 않고 잔을 들어올린 서령이 애쉬를 향해 그것을 내밀었다.
서령의 갑작스런 행동에 살짝 놀랐던 애쉬는 이내 픽 웃으며 그 잔에 술을 따라줬다.
“안 마신다더니.”
그래.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던져준 이 두 사람에게라면 좀 더 깊은 얘기까지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은 서령이 입을 열었다.
“제 얘기가 조금 시시해도 이해해주세요.”
서령이 조금은 울적한, 그러면서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 서령이 태어난 가정은 여타 가정들과 달리 삭막한 편이었다.
자식에겐 관심도 없으며, 항상 바쁜 일에 매진하는 아버지, 유장혁 부회장. 그리고 의무적으로 자식들을 낳은 어머니, 유성호텔의 사장인 이한설.
그리고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형제자매들까지.
어린 서령은 비록 형제자매들에게 괴롭힘 받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서령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약자였기 때문이지.
아주 어릴 적의 서령이 그렇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겉으로 내보이는 호의가 진짜 호의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린 아이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다. 사무적으로 자신을 대하는 부모와 정이라곤 없는 형제자매들의 사이에서 어린 서령은 눈치를 보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주는 이라곤 가정에 고용한 고용인들 뿐. 그나마도 서령이 어리기 때문이었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서령에게 집안은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에 가까웠다. 쇠창살은 없지만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길수밖에 없는 감옥. 그마저도 베일라의 과거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겠지만, 당시의 서령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감옥과도 같은 집안에서 자라던 서령에게도 나름의 안식처는 있었다.
바로 그녀를 애지중지하던 조부와 조모의 집. 그곳만큼은 서령이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바빠서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가끔 그녀를 봐주는 조부모는 그녀의 부모를 대신해 애정을 줬었다.
특히 조모는 서령의 가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서령이 찾아올 때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약한 애정결핍에 빠진 서령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사랑이었다.
그런 조부모 덕에 어렸던 서령은 나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그녀의 조모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령이 여덟 살이 되던 해. 그녀의 조모가 사망했다. 원인은 앓고 있던 지병.
서령은 몰랐지만 조모는 오랜 지병을 앓고 있었고, 그것이 끝내 조모의 생명을 거둬간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녀는 조모의 장례식장에서 정말 죽을 것처럼 울었다. 울다 탈진해 쓰러진 서령을 보고 그녀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조모의 장례식이 끝나고, 조부를 만난 서령은 그때 낯선 남성, 에아임을 만났다.
에아임은 조모를 잃고 상심에 빠졌던 서령을 진짜 가족도 못할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우울함과 어색함에 그를 경계하던 서령이었지만 그의 노고에 곧 경계를 풀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고, 완전히 에아임을 믿게 되어 에아임을 부모처럼 의지하며 자라왔다.
서령이 가족의 무관심과 은근한 견제 속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조부모와 에아임의 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운을 차린 것도 잠시, 에아임과 친해진 서령이었지만 오히려 사랑하던 조부와는 더 멀어지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유진혁 회장은 그를 잊기 위함인지 다른 때보다도 더욱 바쁘게 살았고, 그만큼 서령과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만나기 힘들 정도로.
한동안은 명절에나 겨우 볼 수 있던 유진혁 회장과 서령.
훌륭한 사람이 되면 가족과 조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에아임의 말에 서령은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로 어느 대회에서 상을 타게 됐다.
그리고 그 수상식. 수상대에 선 서령은 유진혁 회장을 발견한다.
수상을 마친 서령은 곧장 조부에게 뛰어가 안겼고, 다른 모두가 그런 유진혁 회장 조손을 알아보고 우러러봤다. 하지만 서령은 그런 시선들보다도 잘 했다며 자신을 칭찬하는 조부의 품에 집중하며 생각했다.
아, 훌륭한 사람이 되면 할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사랑받을 거라는 에아임의 말이 진짜였구나.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자랑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모두가 날 사랑해줄 거야…….
“…그런데 그게 착각이었던 거죠.”
거기까지 말한 서령이 잔에 찰랑이는 술로 목을 축였다.
어릴 적의 자신은 정말 바보 같았다. 아니, 어릴 때뿐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도 마찬가지였지. 처연한 모습으로 술잔을 내려다보던 서령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학업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노력한 서령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어린 서령의 착각에 불과했다. 어느 날 어린 서령이 받아온 성적표.
모든 지표가 최고점을 가리키고 있는 그것은 서령이 정말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는 노력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그것을 가족들에게 보인 결과 돌아온 것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너 바보 아니야? 우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평가하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 이후 누구도 서령을 바라봐주지 않았고, 어떤 상을 타도 수상식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다.
정말 온힘 다해 웨인 시 시장의 이름을 건 대회에서까지 수상을 한 서령이었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일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가끔 그녀와 만날 때면 그렇게 예뻐하는 조부조차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을 때, 이미 서령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피만 이어졌을 뿐 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 날, 애써 현실을 외면한 서령은 그저 일이 바쁜 부모와 조부의 사정을 생각하며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수상식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그런 상 따위가 아니라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었으니까.
텅 빈 그녀의 가족석에는 에아임과 경호원들만이 박수치며 자리를 지켰다.
그들의 응원과 칭찬에도 서령의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정말 바보 같았어요. 가족, 혈연. 그깟 게 뭐라고.”
서령이 살고 있는 세계는 더없이 냉혹했고, 그런 세계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일면식 없는 타인보다 못한 경쟁자였다.
정작 사랑을 줄 그녀의 가족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 가치에 집착하고 노력했던 서령은 정말 어리석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힘드셨겠군요….”
서령의 자조적인 말에 베일라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서령이 그런 베일라의 목소리에 괜찮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젠 다 의미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베일라가 살아온 삶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건 아닙니다, 이사님.”
“네?”
베일라는 서령이 별 것도 아니라며 하는 말에 반박했다.
“누구도 이사님이 겪은 고통과 슬픔을 비하하거나 깎아내릴 수 없습니다.”
각자가 살아온 삶과 거기에 깃든 애환은 타인의 것에 대고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고유의 것이다. 베일라 자신이 서령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다고?
누구도 그렇게 말해선 안됐다. 설령 그 삶의 주인인 서령이라도.
“그 말엔 나도 동감이야.”
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애쉬도 동의했다. 무엇이 더 힘든 삶이고, 무엇이 더 좋은 삶인가.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명확히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또, 함부로 결론내릴 수도 없는 문제였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들으면 위로처럼도 느껴지는 말에 서령이 답했다.
그렇게 그녀의 얘기는 끝났다. 그런 식으로 살아오다 회사에 입사했고, 자리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후계경쟁.
그 뒤는 애쉬와 베일라도 같이 겪은 일들이다.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서령이 술잔의 내용물을 바라봤다. 맞은편의 애쉬가 들고 있는 것도.
둘 다 잔에 술이 아직 남아있다. 자신과 베일라의 얘기는 끝났는데, 아직 술이 남아있다라….
그렇다면 그 다음 순서야 뻔하다.
“그럼 제 얘기도 끝났고, 이제 애쉬 씨 차례네요?”
“그렇군요. 당신 차롑니다.”
사실 서령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애쉬 론모어라는 해결사의 인생. 그건 베일라도 마찬가지인 듯 서령의 말에 동참했다.
“…흐음.”
애쉬는 어서 얘기 해보라는 듯한 베일라와 서령의 눈빛을 받으며 고민했다.
사실 그의 과거라고 해봐야 정말로 평범하디 평범한 지구에서의 삶과 지난 몇 년 동안의 일이 전부였다. 서령이야 그 가정 내에서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자랐지만 그는 정말 특별하다고 할 만한 일이 전혀 없다.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떨어졌다는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설마 본인은 듣기만 하고 빼려는 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애쉬의 고민이 잠시간 지속되자 베일라가 훅 찔러 들어왔다. 애쉬는 그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안 빼니까 걱정 말지. 그냥 어떻게 얘기할지 생각한 거라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다시 입을 다문 베일라와 서령이 그를 바라봤다.
뭐, 적당히 걸러서 말하면 되겠지. 고민하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뭐,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
“…당신이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요?”
얘기에 들어가려는 순간 베일라의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그에 애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왜.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게 이상해?”
“예, 명백히 이상합니다.”
“솔직히 조금 이상하긴 해요….”
“…….”
곧장 돌아오는 둘의 대답. 애쉬는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없이 경청하는 분위기 아니었나? 자신이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말이 그렇게 반응할 일인가 싶었다.
평소에 자신을 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기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 애쉬는 인상 쓴 채 둘을 쳐다봤다. 둘도 자신들이 흐름을 끊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애쉬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계속 하시죠.”
“네. 이제 조용히 듣기만 할게요.”
잠시 둘을 쳐다보던 애쉬는 사과를 받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단 말이지. 솔직히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는 할 얘기도 없어.”
애쉬는 잠시 지구에서 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의 가정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엄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했던 그는 하도 바깥을 싸돌아다녀 저녁 시간이 지나서도 들어오지 않는 걸 걱정한 어머니가 놀이터까지 찾으러 오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은 서령과 베일라의 반응은 묘했다.
“그랬습니까…?”
“그랬나보네요….”
그런 반응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진 애쉬였지만 애써 둘을 무시하곤 얘기를 계속했다.
어릴 적부터 애쉬의 부모님은 그에게 수많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다. 덕분에 애쉬는 또래 애들이 해본다는 건 거의 다 해볼 수 있었다.
피아노, 기타, 플롯, 첼로, 드럼, 미술, 태권도, 검도, 축구 등의 예체능은 물론이고, 영어, 국어, 수학, 과학 등 기본 과목들까지.
당시의 애쉬는 자꾸만 뭘 시키는 게 싫어서 학원이고 뭐고 자주 도망 다니곤 했지만, 다시 돌아보면 정말 많은 것들을 해볼 수 있었구나 싶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의 미래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지.”
과거를 떠올리던 애쉬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애쉬 자신은 이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지만 어째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얼마나 지났다고 지구에서의 일을 곰곰이 떠올려봐야 기억할 정도가 됐단 말인가. 어느새 그도 이 세상의 일원으로서 충실히 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