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5. 후계경쟁(15)
* * *
그런 애쉬의 상념이 길어지자 끼어든 서령의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그래서요?”
“…어릴 적에 그런 일들 말고는 딱히 말해줄 게 없는데. 그냥 그렇게 살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갔지.”
“대학까지 갔단 말입니까?”
“…졸업은 못했지만.”
베일라의 놀란 목소리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은 애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학한 곳은 수도권에 있는 어느 대학이었다. 아주 유명 대학은 아니어도 아는 사람은 아는 곳.
베일라의 물음에 대답하자 곧장 서령의 질문이 그에게 떨어졌다.
“네? 졸업은 왜 못했어요?”
“중간에 입대해서….”
“그쪽도 군인 출신이었습니까?!”
“어, 한때는….”
쏟아지는 질문들과 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애쉬.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버리지 못한 애쉬는 더 크게 놀라는 베일라를 보고 생각했다.
얘기가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군인이었다는 말에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베일라에게서는 보기 힘든 큰 반응이다. 애쉬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계속해서 쏟아지는 흐름을 단호히 잘라냈다.
“군인이었던 사람이 어쩌다….”
“애쉬가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었다니….”
“그만! 나 그냥 얘기하지 말까? 응?”
자꾸만 끼어들면 그냥 입을 다물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다행히 그것은 잘 통해 서령과 베일라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경고의 의미로 둘과 눈을 맞춘 애쉬가 중간에 끊긴 얘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대학에 진학했다가 군대에 2년 가까이 있었지.”
군대.
대한민국 남성은 의무적으로 십 수개월 동안 군복무를 하게 된다. 애쉬는 복무기간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돌이켜 봤다.
억지로 입대하게 된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나름 재밌는 일도 많았던 것 같다.
그가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서 개인 휴대폰을 쓴다니 어쩌니 했는데, 지금은 쓰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애쉬는 자신의 짧지만 길었던 군 생활 얘기를 간략히 정리해 얘기했다.
“뭐, 그렇게 전역하고 일 년 정도 지나서 여기로 오게 된 거지.”
“중간에 얘기를 너무 많이 생략한 것 같습니다만.”
애쉬는 굳이 필요 없는 얘기를 생략했다. 게임 캐릭터를 만들다 게임 속 세상에 떨어졌다니 뭐니 하는 얘기들. 그런데 중간 과정이 너무 생략된 모양인지 조용히 있던 서령이 지적해왔다.
“…그런데 군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신분도 없이 웨인 시에 오게 된 건가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서령의 시선이 애쉬의 검은 팔찌에 닿아있다. 에아임이 건네주었던 물건이다.
당연히 일개 비서에 불과한 에아임이 자력으로 빼왔을 리는 없으니 서령의 손길이 닿아있을 게 분명한 물건. 애쉬는 곤란한 질문을 가볍게 넘겼다.
“뭐어, 들어오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모양이지.”
“…일단 그건 알겠어요.”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애쉬의 태도에 서령이 더 파고들지 않고 주제를 변경했다.
“그럼 어쩌다 슬럼에서 유명한 해결사가 된 건가요?”
“아, 그건 또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애쉬 론모어라는 이름이 슬럼 전체에 알려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두 개의 구역을 사실상 지배하던 ‘오마르의 망치’와 있었던 전쟁 때문이었다.
일개 개인과 조직원의 숫자가 네 자릿수에 달하던 거대 갱단의 전쟁.
끝내 그 규모가 말도 안 되게 커져버리고 말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전쟁의 시작은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길을 가던 애쉬와 시비가 붙은 갱단의 말단의 죽음.
시간이 꽤 지나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당시의 애쉬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무척이나 나쁜 상태였고, 자신과 시비가 붙은 양아치들을 죽이고 말았다.
물론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애쉬도 아무런 이유 없이 놈들을 죽인 건 아니었다.
애쉬가 놈들을 살해한 이유를 꼽자면 역시 첫 번째는 상대방의 선공이었다.
한 명이 권총을 뽑아 그의 머리에 겨누고 다른 한 명이 너클을 낀 주먹을 휘둘렀으니 나름 정당방위 아니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시 그의 성격이 무척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게임 속 세상, 그것도 지저분하고 더없이 위험한 슬럼에 떨어진 애쉬는 한동안 수많은 목숨의 위협과 공격에 시달렸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부작용들이 넘쳐났고, 그것은 애쉬의 성격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계속해서 공격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얕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는 놈들에겐 미치광이처럼 달려들어 완전히 끝장을 봤다.
애쉬에게 ‘미친 칼잡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당시의 애쉬는 정말 미친 칼잡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괴물이었다. 자비도, 뭣도 없는 살육 기계.
시간이 조금 흐르자 완전히 미친 것처럼 날뛰던 것은 가라앉았지만, 그렇다고 그 공격성이 어딜 가지는 않아서 손속만큼은 더없이 잔혹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다 그의 소문을 들은 양아치 놈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그 양아치들이 ‘오마르의 망치’의 말단이었던 것.
애쉬는 평소처럼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공격을 가한 양아치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마르의 망치’에 알려졌다.
‘오마르의 망치’는 말단이 살해당하자 곧장 목격자를 찾았고, 끝내 애쉬라는 인물을 특정해냈다.
그리고 보복을 위해 그를 습격했다가 역으로 당하길 몇 번. 일개 개인에 의해 자신들의 위신이 무너지자 점차 규모가 커지고, 끝내는 대규모의 인원들을 보내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애쉬 론모어’와 ‘오마르의 망치’의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
“당신의 실력이라면 쉽게 당하진 않았겠군요.”
“당해? 내가? 오히려 그 반대지.”
베일라의 말에 애쉬가 말을 정정해줬다.
오마르의 망치와 전쟁이 시작되자 애쉬는 다시 과거의 미치광이로 돌아가 ‘오마르의 망치’의 소속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는 놈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고, 그들이 운영하는 영업장까지 하나하나 찾아 부숴버렸다.
그렇게 몇 주일. 더 이상 오마르의 망치 소속의 놈들이 공포에 젖어 숨어 다닐 때 쯤,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피 냄새에 절은 채 일련의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아마 우리 유서령 아가씨도 봤을 거야.”
“…그게 에아임이 보여줬던 영상인 거네요.”
“그렇지.”
“무슨 영상이 있습니까?”
언젠가 봤다는 서령의 말에 애쉬가 대답했다. 베일라는 그것의 존재를 모르는 듯 했지만 말이다.
신체를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개조한 사이보그들과 강화인간들.
에아임과 서령이 확인하고 애쉬의 존재를 알아챈 영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거인이라고 착각해도 이상치 않을 덩치에, 머리가 인간의 상체만한 해머를 들고 있던 놈. ‘오마르의 망치’의 두목인 ‘오마르’.
애쉬에 비해 느려터진 놈이었기에 손쉽게 썰어버렸지만, 어지간한 용병이나 경호원들은 그 놈을 만났다면 순식간에 피죽이 되어 바닥에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놈이 괜히 두 개의 구역을 지배하는 거대 갱단의 보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를 돌아보면 지금이랑 비교도 못할 정도로 살벌했지.”
그때가 좋…지는 않았나? 애쉬는 스스로도 과거에 비해 많이 무뎌진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는 일반인이었던 이진현과 이 세상의 애쉬 론모어가 뒤섞이던 때라 상당히 많이 혼란스러웠고, 또 불안정한 만큼 위험했다.
단순히 위험도만 따지면 과거 있었던 ‘방화광’의 함정이나 ‘회사’ 소속의 ‘땅거미 부대’가 더 대단하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벌어졌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만한 스트레스와 위협을 느끼진 못했다.
“그렇게 놈들을 끝장내고 사실상 놈들이 지배하던 두 개의 구역을 내가 먹은 거지.”
애쉬는 자신이 머물던 슬럼, 71구역과 63구역의 유흥가를 떠올렸다.
오마르의 망치가 사라진 두 곳은 나름의 평화를 되찾았다. 아직도 애쉬가 길을 나서면 그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곤 했다.
오마르의 망치가 걷어가던 상납금이 없어지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위협과 행패가 사라졌으니.
가끔가다 다른 구역에서 슬금슬금 손을 뻗긴 하지만 그마저도 해결사로 활동하는 애쉬에게 의뢰를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다른 구역의 놈들도 애쉬와 ‘오마르의 망치’의 전쟁을 봐왔기에 그를 적으로 돌리려 하지 않았다.
“들어보면 대단하긴 하군요….”
“나중에 베일라 씨한테도 보여드릴게요.”
“예, 부탁드립니다.”
서령이 베일라에게 시간이 나면 영상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일전에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음에도 베일라는 애쉬의 말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쉬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뭐, 아무튼 이걸로 내 얘기는 끝이야.”
얘기할 건 대부분 얘기한 것 같다. 사실 오마르의 망치와의 전쟁만 얘기하면 애쉬가 이 세상에서 겪은 일은 전부 얘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일이라고 할 게 없었으니.
있다고 해봐야 기껏해야 그를 못 알아보고 덤벼드는 놈들을 조금 교육 시켜준 얘기 정도.
그건 일상과도 같은 일 중 하나라 굳이 얘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그가 얘기를 마치자 베일라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게 된 겁니까?”
“응?”
베일라의 궁금증은 단순했다. 애쉬의 얘기를 들으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그냥 일반인이었고, 입대하여 기껏해야 몇 년 정도의 군 경력을 쌓았을 뿐인데 저런 실력을 갖게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게 된 것이냐는 것이다.
누구보다 전직 군인 출신이었던 베일라였기에 잘 알았다. 군대에서도 군대 나름의 훈련이 있기에 개인 단련은 시간이 잘 나지 않는다.
애쉬는 그런 그녀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심하여 대답했다.
“어…. 어릴 적에 운동학원 다녀서?”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겁니까?”
애쉬의 대답에 베일라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어릴 적에 운동학원 조금 다닌 걸로 저런 실력이 생겼으면 지금 이 세상의 용병과 군인들은 평생 운동 한 번 안 해본 사람들이란 말인가.
자기 입으론 아무런 개조나 강화도 거치지 않은 순수 인간이라면서 불가사의한 신체능력을 내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몸과 도구를 다루는 실력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순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나 애쉬가 보인 수준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하늘이 내린 재능과 함께 엄청난 시간,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애쉬라고 그 질문에 명확히 답변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치트 치고 게임 캐릭터 만들다 그 캐릭터가 되면서 그냥 할 수 있게 됐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애쉬는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대신 사실만을 말하되 사이에 단어를 몇 개 빼고 답했다.
“장난이고, 그냥 할 수 있던데?”
“….”
베일라가 태연한 애쉬의 표정을 살폈다. 어째 거짓말은 아니라는 듯 당당한 태도인데, 그런 게 진짜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인간의 신체는 생각보다 정밀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당장 아무런 개조나 시술도 받지 않은 일반인들도 힘 조절을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과자 봉투를 뜯다 내용물이 터져 나온다던가, 케첩을 짜다 과도하게 쏟아버린다던가.
하물며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력이 강한 개조인간이나 사이보그는 더하다. 힘을 잘못 줘서 문고리를 부수거나 장난을 치다 타인을 다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웨인 시의 정부는 강화인간과 사이보그들에게 관련된 훈련을 의무사항으로 지정하고 있다. 훈련을 받은 이들도 칼로 총알을 베어내기는커녕, 쳐내는 것도 못하는데, 그냥 할 수 있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베일라가 의심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애쉬는 뻔뻔한 얼굴로 답했다.
“뭐, 내가 그쪽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천잰가보지.”
“…일단 답하기 싫다는 건 알겠습니다.”
“애쉬도 비밀이 많은 사람이네요.”
“원래 비밀이 많은 사람이 매력 있는 법이잖아.”
애쉬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말을 꺼냈다. 베일라와 서령은 그런 그의 태도에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 뒤로도 셋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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