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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92화 (92/230)

〈 92화 〉 5. 후계경쟁(16)

* * *

유진혁 회장과 서령의 대담이 있던 다음 날 오후.

서령의 집에 낯선 손님이 들었다.

“와, 집이 무슨….”

“방도 많으니까 불편할 건 없을 거야.”

“일하러 가신다더니 이런 곳에 계셨던 거예요? 누구는 데이터 해석에 뭐에 방구석에서 썩고 있었는데.”

“내가 여길 놀러왔냐?”

“애쉬 씨 성격상 놀기도 놀았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뭔….”

그의 말에 애쉬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근무시간에 게임을 하던 건 사실이었으니.

애쉬는 그냥 빌헬름에게 적당히 집안 안내를 해주고 거실로 돌아왔다.

“저도 이런 곳에서 일하면 할 맛이 나겠는데요?”

서령의 집을 제 집인 양 안내하는 애쉬와 그를 뒤따르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청년. 서령과 함께 소파에 앉아 기다리던 베일라는 그런 둘을 못미더운 눈으로 바라봤다.

애쉬의 실력이야 직접 보았기에 의심할 것도 없었지만, 그가 대단하다고까지 칭찬한 해커 치고는 너무 어려 보인다.

생긴 것도, 얼핏 보이는 성격이나 태도도.

그녀가 보기에 애쉬가 불러온 청년, 빌헬름 메이젤은 아직 20대 중반도 되지 않아 보였기에 불안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이번 일이 보통일이던가.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이 모여드는 유성 그룹의 후계 경쟁.

천재들 중에서도 천재들만 모였을 경쟁자들의 측근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인구가 억 단위에 달하는 이 거대 도시에서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것이다.

베일라는 서령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최후가 무능한 아군에 의한 것이라면 끝이 너무도 허망할 것이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게 꼭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살아온 세월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여러 방면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

같은 노력과 재능이라면 당연히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한 쪽이 나을 터다.

아무리 애쉬가 직접 추천한 인물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검증은 필요해 보였다.

그런 생각에 베일라가 입을 열어 말했다.

“…실력이 대단한 해커라고 하시더니 생각보다 많이 어려 보입니다만.”

정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대놓고 그렇게 물어보는 듯한 베일라의 말. 그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서령도 내심 동의했다.

애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척 봐도 서령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어려 보이는 청년이 그만한 실력자라니.

그렇게 자신을 반신반의하는 고용주와 호위의 눈빛을 받게 된 빌헬름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반응했다.

“이래서 제가 얼굴도 안 드러내고 혼자 일한다니까요….”

“뭐, 이참에 한번 보여주지 그래?”

“아니, 무슨. 자기는 남이 시험하는 거 싫어하면서.”

빌헬름이 괜히 꿍얼거리며 신경 인터페이스의 전원을 올렸다. 그의 목과 팔에 자리한 회로에 작은 불빛이 돌았다.

그 후 빌헬름은 서령과 베일라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이 매고 있는 백팩에서 평소 들고 다니는 것보다 커다란 단말기를 하나 꺼냈는데, 그것에 적혀있는 상표를 본 서령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Liddell 제품이네요?”

“아, 네. 유성이나 츠미모토 것도 괜찮긴 한데, 아무래도 리델에 비하면 손색이 좀 있잖아요.”

연방 전체에 유명세를 떨치며 ‘리델’과 함께 연방의 3대 기업체로 묶이는 ‘유성’과 ‘츠미모토’였으나, 면면히 살펴보면 다른 둘은 리델과 경쟁사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다른 분야도 대부분 앞서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IT업계의 점유율이 60%가 넘어가는 초대형 그룹이 리델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유성 그룹의 후계 후보에게 경쟁사의 제품을 칭찬해보인 빌헬름은 손목 밑에서 접속 단자를 뽑아내 단말기에 연결했다.

“아까 얼핏 봤는데, 이사님 휴대용 단말. 보통 물건은 아니죠?”

“…네. 기술팀에서 고위 인사들의 보안을 위해 특수 제작된 물건이에요.”

외부 생김새는 타 제품과 매우 흡사했기에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물음에 서령이 답했다.

일반적으로 휴대용 단말은 신경 인터페이스만으로 처리하기 힘든 작업을 할 때 많이 사용되는 물건으로, 직무와 관련이 있는 일을 한다면 당연히 보안이 중요시되는 물건이었다.

외부의 접속 차단은 물론이고, 간단한 연락조차 개인 설정에서 허가를 내린 단말기에서만 가능한 특제품.

빌헬름은 그런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신경 인터페이스를 조작했다.

[Unlocking…….]

“유성 그룹에서 기술팀에서 만들었다길래 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운데요?”

“네?”

빌헬름의 말에 의문을 나타낸 서령. 그녀가 의문을 나타낸 직후 테이블에 올려뒀던 서령의 단말기에서 작은 알람이 울렸다.

­ 삐이.

“…어?”

서령이 갑자기 울린 알람소리에 표정을 바꿨다. 빌헬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평소에는 무음 처리 해두는 그녀의 단말기에서 알림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설마?’

갑자기 휴대용 단말기에 무슨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도 공교롭다.

서령은 조심스럽게 단말기를 들어 살폈다.

*

[잘 부탁드려요. 자료는 선물. – WM]

[첨부 자료]

*

WM이라는 이니셜과 잘 부탁한다는 짧은 메시지. WM은 애쉬가 알려준 빌헬름 메이젤(Wilhelm Maisel)이란 이름의 이니셜이다.

“…….”

최고의 실력자라던 애쉬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서령이었지만 진짜로 자신에게까지 메시지가 오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유성의 보안이 뚫렸다고? 그것도 불과 그 잠깐 사이에?

“내가 진짜 실력자라고 했잖아.”

놀란 서령의 표정을 읽은 애쉬가 괜히 으스대자 베일라가 물었다.

“이사님, 진짜 메시지가 온 겁니까?”

“왔어요, 왔는데….”

도저히 믿을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당장 유성의 보안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도 겨우 1, 2 분 남짓한 정도로는 외부에서 그것을 뚫을 수 없다.

내부의 조력자가 있다고 해도 힘들 일인데, 유성과의 연이라곤 없을 슬럼의 어느 해커가 그걸 뚫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으음….”

서령의 대답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빌헬름의 실력을 의심하던 베일라가 침음을 흘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유성의 보안을 뚫다니. 물론 심부까지 뚫은 것은 아니겠지만, 유성이 자랑하는 보안 시스템의 일부나마 쉽게 뚫고 들어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

애쉬도 그렇고, 그 빌헬름 메이젤이라는 해커도 그렇고 완전히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들이다. 대체 이런 이들이 어째서 슬럼에서 썩고 있던 걸까.

아직까지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메시지를 보고 있는 서령을 향해 빌헬름이 태연히 말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어제 저녁에 조금 캐본 게 있는데, 그것도 한번 확인해보세요.”

“…네.”

서령이 빌헬름의 말에 첨부된 자료를 펼쳤다.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홀로그램 화면으로 띄운다.

모두의 시선이 서령의 휴대폰 위로 떠오른 홀로그램에 집중됐다.

*

더즌 시큐리티 ­ 600만 코너

혼 관리센터 ­ 1,100만 코너

………

리퍼슨 물류 ­ 100만 코너

………

……

*

“리퍼슨 물류? 여기 그 카우보이가 있다던 곳 아닌가?”

애쉬가 익숙한 회사 이름을 발견했다. 언젠가 골든 캐니언, 게빌 리퍼슨이 찾아오라던 회사다.

거기에 적혀있는 내용은 얼핏 보면 별 것 없었다. 단순한 글자와 숫자의 나열.

하지만 평소 이런 문서들을 관리하는 서령은 그것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봤다.

“이건…!”

그것은 유성그룹 내 계열사의 자금 흐름을 모조리 긁어다 박아놓은 문서였다.

당장 보고 있는 화면은 서령의 첫째 오빠인 유선혁이 사장으로 있는 유성중공업의 것. 서령이 급히 홀로그램 화면을 주욱 내려 봤다.

유성증권, 유성제약, 유성물산, 유성호텔…….

문서에 있는 것은 유성중공업의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유성호텔의 것까지도.

이번 후계경쟁에 관련된 모든 계열사의 것들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서령은 그것을 보고 경악을 느꼈다.

“도, 도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계열사를 뚫었을 리는 없다. 그녀도 나름 넷 워킹에 입문한 사람이라 알았다. 그건 실력 이전에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그렇다면 이 모든 자료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이 빌헬름 메이젤이라는 해커는 각 계열사가 아니라 유성그룹 본사에 위치한 재무팀의 자료를 털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령의 휴대폰을 지키고 있는 보안을 뚫는 것과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게 진짜라면….”

이 자료가 정말로 진짜가 맞는다면 서령은 자신의 목표를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빌헬름 메이젤, 자신의 앞에서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해커에게 놀라면서도 가슴 한 편에서는 희망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이나 자금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단순히 상대방이 돈을 얼마나 썼구나, 이런 것을 아는 것보다도 돈이 들어가는 경로에 따라 상대방이 계획하고 있는 것들의 윤곽을 잡을 수 있고, 한 발 앞서 대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계획을 짜고 있는지 대충이라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혹시 내일 오시기로 한 분도 이 정도의 실력자이신가요?”

갱단의 보스라고 했으니 인텔리보다는 애쉬가 여자로 변한 느낌의 육체 계열?

서령이 기대에 차서 묻자 애쉬가 대답했다.

“뭐, 대단한 여자긴 한데, 나나 이 녀석이랑은 느낌이 좀 다르지.”

“대단한 여자요? 혹시…?”

“아, 내가 말 안했나? 레이라도 손을 빌려주기로 했었는데.”

혹시나 하고 물었던 빌헬름에게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레이라 플로리스. ‘뱀파이어’의 보스이며 온갖 의뢰로 그를 괴롭혔던 악마 같은 여자가 이번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질린 듯한 기색의 빌헬름을 본 베일라가 물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여자예요.”

갱단의 보스라더니, 요주의 인물인가?

빌헬름의 대답을 들은 베일라가 내심 각오를 다졌고, 서령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빌헬름과의 인사 및 의뢰 조율을 마친 다음날.

서령과 베일라, 둘은 그 악마 같은 여자의 실체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 얘기한대로 멀쩡한 애들로 데려왔네.”

“응. 이번 일은 내 쪽에도 중요한 일이니까.”

애쉬와 인사하며 수십에 달하는 깔끔한 정장의 남자들을 거느리고 차에서 내리는 여자.

살짝 어두운 금발과 비취빛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가 빌헬름의 설명만 듣고 상상했던 철혈의 악마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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