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5. 후계경쟁(17)
* * *
“그럼.”
“어, 아쉽지만 다음에 또 보자고.”
덜컥. 애쉬의 인사를 받으며 차량의 문이 닫혔다. 그리고 차량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속도를 내어 사라진다.
레이라는 말 그대로 얼굴만 비추기 위해 왔다는 듯 서령과 잠깐의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갔다.
애쉬가 부탁했던 이들을 남기고.
“어디.”
애쉬는 멀뚱멀뚱 서있는 장정들을 한 차례 둘러봤다.
슬럼에서도 유명한 갱단 소속의 갱들은 과할 정도로 흉터가 많거나 남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얼굴에까지 문신 따위를 하고 있는 등, 척 봐도 일반인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또 어느 경우에는 겉보기에도 괴이할 정도로 심한 불법 개조를 거친 놈들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의 갱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레이라에게 부탁한대로 멀쩡하게 생긴 녀석들을 잘 골라온 것 같았다.
그들을 모두 둘러본 애쉬가 입을 열었다.
“자, 얘기는 너희 보스한테 들었겠지?”
“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애쉬의 말에 한 놈이 앞으로 튀어나와 기운차게 대답했다. 애쉬는 그를 본 기억이 없었지만, 그는 애쉬를 알고 있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경외, 존경?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가다 받는 눈빛이었다. 애쉬는 슬럼의 살아있는 전설이었으며 홀로 거대 갱단을 해체해버린다는 위업을 이룬 남자였으니까.
애쉬 자신도 믿기 힘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를 보이는 추종자들도 있었다.
‘이 녀석도 그런 쪽인가?’
기껍지는 않았지만 이번 일에서는 괜찮을 것 같다. 적어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세우지 않고 말은 잘 들을 것 같았으니.
“저는 케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애쉬가 유심히 자신을 살피자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가 까듯하게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그래, 자세한 건 저기 저 경호원이 가르쳐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예!”
“…예?”
레이라가 두고 간 남자들의 대표 정도로 보이는 케인과 애쉬의 대화를 듣던 베일라가 뜬금없는 말에 당황을 나타냈다.
자신과는 아무런 얘기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숙식은 저쪽이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경호원으로서 기본적인 것들만 가르쳐주면 돼.”
“잠깐, 이분들이 전부 이사님의 경호원이 된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이 녀석들을 왜 불렀겠어. 나름 실력은 괜찮은 녀석들로만 뽑았다니까 테스트도 한번 해보고.”
“아니….”
이런 중요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혼자서 결정하고는 하는 말이…….
얼떨결에 수십 명의 장정들이 부하 비슷한 위치로 들어오자 베일라가 할 말을 잃었다.
최종결정을 내릴 서령은 진작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십의 눈빛들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앞길이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베일라에게 모든 일처리를 떠맡긴 애쉬는 조금 어깨가 가벼워진 느낌으로 생각했다.
‘저 녀석들이 있으면 못해도 시간 벌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이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전보다 훨씬 넓어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전에 한 방 맞은 것에 대한 복수는 해야겠지.
어떻게 일을 벌일지 빌헬름과 한번 얘기를 해봐야겠다.
애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에아임!”
“아가씨!”
에아임의 퇴원 날.
그가 퇴원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에 초조히 기다리던 서령이 문이 열리자마자 에아임에게 달려가 포옥 안겼다. 에아임도 그런 서령을 꼭 안아줬다.
그렇게 한 번 안겼던 서령이 품에서 벗어나며 에아임을 살폈다.
“더 아픈 곳은 없죠? 이제 정말 괜찮은 거예요?”
“하하, 예. 다행히 총에 맞은 것도 상처가 깊지 않아 조금 꿰매고 끝이었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죠.”
에아임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서령에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서령은 안심하지 못한 듯 에아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픈데 무리하고 있는 거라면 좀 더 쉬어도 돼요. 이번에 애쉬 씨랑 베일라 씨의 도움으로 경호원도 더 보충됐고, 일거리도 크게 없으니까….”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이사님의 최측근으로서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죠.”
에아임은 서령의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경호원들이 보충됐다는데 어떻게 수석비서인 그가 점검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쉬와 베일라는 믿을 수 있었지만 새로 들어온 경호원들은 아니었다. 한 번씩 보고 면담을 또 해야지.
“무슨 이산가족도 아니고. 눈물까지 글썽이네.”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십시오.”
에아임과 서령을 지켜보던 애쉬의 말에 베일라가 핀잔을 줬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빌헬름하고 얘기는 해봤지?”
“예. 그런데 이사님께서 그걸 허락하시겠습니까?”
“어쩌겠어. 회장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이쪽은 그런 식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고.”
이기기 위해서는 다소 불법적인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 상대는 이쪽과 비교할 수도 없이 강했고, 이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싸울 의지조차 없었던 약자였으니.
“…필요성은 알고 있으니 이사님을 설득하는 일은 도와보겠습니다.”
“그래. 저 아저씨도 아마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애쉬가 에아임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에아임 또한 이미 세상을 알 만큼 아는 사람이니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의 일은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 언제부터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일단 아가씨부터 설득하고. 바로 시작할 거야.”
“예. 그럼 제가 할 일은?”
“전에 온 녀석들한테 교육이나 잘 시켜. 내가 움직이는 동안 아가씨만 무사하면 되니까.”
레이라에게서 지원받은 놈들을 교육시키고 서령을 지키는 것. 결국 베일라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의 말을 들은 베일라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물었다.
“그런데 그 갱들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어. 못해도 이쪽 경호원들만큼은 믿을 만 할걸?”
돈만 받고 움직이는 경호원들이나 제 목숨이 저당 잡힌 갱들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직업정신으로 움직이는 경호원들보다 오히려 목숨이 달려있는 갱들이 필사적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비교당하면 기분이 좀 나쁩니다만.”
“아님 말고.”
“…….”
애쉬의 툭 던지는 말에 베일라가 인상 쓴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저렇게 사람을 살살 잘 긁는지.
애쉬와 베일라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해후를 마친 서령과 에아임이 돌아왔고, 그들은 방에 박혀있는 빌헬름까지 끄집어낸 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아가씨. 내가 이번에 생각하던 게 좀 있는데, 이게 좀 불법적인 일이라.”
“불법적인 일이요?”
“어. 지금 우리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말이야.”
혹시나 의뢰인인 서령이 거부하면 상당히 일이 귀찮아진다.
애쉬가 최대한 순화시켜 계획을 설명하고, 빌헬름과 베일라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준비할 때였다.
“…네, 그렇게 하죠.”
“응?”
서령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순순히 계획에 동의했다. 그에 애쉬와 베일라가 의문을 나타냈다.
솔직히 어느 정도의 반발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쉽게 받아들일 줄이야.
그런 기색이 표정에까지 나타난 모양인지 서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제가 이런저런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최근에는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요.”
“…….”
그런 서령의 반응에 베일라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며칠 전 새벽에 일어났던 일은 경호원들의 불찰이었기에.
그녀를 포함한 경호원들이 자택까지 제대로 경호했다면 그때처럼 긴박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적도 그런 상황을 알고 움직인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베일라가 잠시 반성에 빠져있는 사이 에아임이 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어왔다.
“그런데 그 계획이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시는 겁니까.”
“뭐긴. 한 대 맞았으니 우리도 한 대 때려줘야지.”
“…설마 다른 분들을 암살이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아무리 아가씨가 마음을 정했다고 해도 그런 것까지 허락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고. 자세한 건 여기 빌헬름한테 들어.”
애쉬가 옆자리에 앉아있던 빌헬름을 툭 건드렸다. 그에 에아임이 빌헬름에게 인사했다.
“아, 이번에 새로 도움을 주기로 하셨던 분이군요. 저는 유서령 상임이사님의 수석비서인 에아임 펠턴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빌헬름 메이젤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예,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아임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빌헬름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 * *
투다다다!
기관총을 드르륵 긁는 소리와 함께 팅, 티리링 하고 차체에 총탄이 박히는 소리가 마구 울린다.
차량 밖으로 상체를 뺀 채 권총을 갈겨대고 있던 애쉬가 안쪽까지 들리도록 소리쳤다.
“일단 밟아!”
“예, 옛!!”
부우웅!
운전석에 있던 남자, 케인이 다급히 가속 페달을 밟자 엔진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도로를 내달렸다.
차량이 어딘가에 처박히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운전에 집중하던 케인이 애쉬에게 소리쳤다.
“정말로 이렇게 소란을 피워도 되는 겁니까?! 이러다 짭새라도 뜨면…!!”
“그쪽은 빌헬름이 해결해준다고 했으니 운전이나 똑바로, 해!”
피잉,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총탄에 고개를 푹 숙였던 애쉬가 대답하곤 다시 총을 들어 갈겼다.
이렇게 총을 들어 쏘는 게 대체 얼마만이던가.
애쉬는 빌헬름과 함께 계획 세우던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