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5. 후계경쟁(26)
* * *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어째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만.”
조인이 글러브를 터치하며 하는 말을 들은 애쉬는 그냥 입술을 작게 끌어올려 미소 지으며 툭, 하고 잽을 날리는 것으로 답했다.
그에 조인은 안에서 바깥으로 팔을 휘둘러 뻗어진 잽을 쳐내며 애쉬의 반응속도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했다.
‘기본적인 반응은 괜찮고.’
어디 다른 것도 좀 볼까.
다시 한 발짝 파고들며 바디샷. 일반인이라면 슬쩍 맞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간 위쪽을 정확하게 노리는 공격이다.
하지만 조인은 팔을 내려 그것도 쉽게 받아냈다.
“가볍게 말할 틈도 안 주는 건 너무하잖나.”
가드 위를 두드리는 애쉬의 주먹. 그것을 막아낸 조인이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애쉬는 그런 조인의 목소리에 대충 대꾸했다.
“그럼뭐, 케이지 안에서 만담이라도 할까?”
얘기는 경기가 끝나고 케이지 밖에서 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애쉬는 조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의 감이 맞는다면 눈앞에서 능청을 떠는 이 덩치의 실력은 최소로 잡아도 슬럼에서 이름 높은 대형 갱단의 보스급 이상.
아무리 인구가 억 단위에 달하는 이 거대 도시라고는 하지만, 절대 흔치 않은 실력자일 것이었다.
애쉬는 그런 조인이 속해있다는 유명 PMC가 어딘지도 조금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자신을 상대로 케이지에 올라서까지 여유를 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방 제대로 먹여주면 정신 차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애쉬는 점차 템포를 올려갔다.
[아아! 애쉬 론모어가 쉬지 않고 몰아칩니다!! 하지만 상대 역시 예선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조인 디아벨! 쉽게 유효타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대로 끝장내!!”
“뭐하는 거야! 빨리 빠져 나오라고!!”
케이지 밖에서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관객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애쉬나 조인이나 그런 곳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집중했을 뿐.
퍼억!
강렬하게 뻗어진 레프트 훅이 단단한 가드 위를 두드린다. 애쉬는 자신이 계속해서 템포를 끌어올리고 있음에도 완벽하게 따라오는 상대방의 반응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것도 막아?’
방금 전의 일격은 웨인 시에서도 손꼽히는 유성 그룹에서마저 정예에 속하는 베일라를 무릎 꿇린 수준의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막아낸 것이다.
심지어는 반격할 여유까지. 정말로 잠깐 배운 게 맞나?
휘익!
귓가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 콧등을 노리고 쏜살같이 뻗어진 잽을 피한 애쉬가 한 발짝 물러섰고, 조인도 그런 애쉬에게 곧장 따라붙지 않았다.
“하하, 어때. 쉽지 않지?”
올리고 있던 가드를 살짝 내린 조인이 애쉬에게 웃으며 물었다. 조금은 놀리는 것 같은 태도.
하지만 그도 내심 놀란 기색을 숨기고 있었는데, 애쉬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곤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인공 안구의 기능을 통해 스캔해본 결과 애쉬의 몸 내부에 사이보그 파츠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강화인간이라는 뜻이다.
강화인간은 같은 등급의 시술이라도 사이보그에 비해 단순 근력이나 체력 등의 신체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아무리 약물로 강화한다고 한들 결국은 피와 살로 된 육체로 인류 과학의 결정체인 기계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의 남자, 당일지기 친구가 된 애쉬 론모어는 그 느낌이 달랐다.
지금 그가 보이고 있는 신체 능력은 이미 민간에서 시술받을 수 있는 강화인간들의 한계치에 가까웠으나 아직 한참은 여유를 갖고 있다는 듯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만약 이대로 페이스를 계속해서 올릴 수 있다면 출력을 제한한 지금은 정말로 패배할 수도 있었다.
애쉬는 그런 조인의 목소리에 스텝을 밟아 몸을 가볍게 튕기며 대답했다.
“그래, 아직은 여유가 있는 것 같은데. 이쪽도 슬슬 제대로 간다.”
“응? 제대로?”
“그래. 이렇, 게!”
타앗!
말하던 도중 기습적으로 발을 구른다. 케이지가 작게 울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한 발 구름에 애쉬의 몸이 순식간에 튀어나갔다.
조인은 상상치도 못한 기습과 속도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지만,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발차기에 가드를 들어 올린 그대로 몸이 넘어갈 뻔하고 말았다.
“흐읍!”
“이번 건 어때.”
균형을 잃은 그에게 연이어 쏟아지는 공격은 없다.
애쉬가 일부러 내어준 여유로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몸을 세운 조인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이번에 기습적으로 쏘아진 공격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그가 낼 수 있는 전력으로도 따라잡지 못할.
강화인간과의 육탄전에서 사이보그가 밀린다? 아무리 출력을 제한했다곤 해도 그가 받은 개조 수술의 등급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건 하나다. 애쉬 론모어, 그 또한 민간인이 아니라 군용, 혹은 특수한 수술을 받은 최소한 고위급 이상의 강화인간일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지금 출력에 제약을 걸고 있는 조인으로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조인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재밌는 것 아니겠는가.
“솔직히 놀랐어, 친구. 그냥 싸움 좀 하는 민간인인 줄 알았는데.”
“민간인은 맞는데? 근데 싸움은 좀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하지.”
갱이고 전문 경호원이고, ‘회사’인지 뭔지 모를 개뼉다구 같은 곳의 특수부대원이고 모두 쓸어버릴 정도로 잘 하는 민간인.
그런 뒷말은 생략됐지만, 대답을 들은 조인은 애쉬 또한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낄 수 있었다.
“이러면 진짜 추천해줄 가능성도 있겠는, 데 말이야!”
“네가 속해있다는 PMC?”
“후우, 그래.”
지루하지 않도록 가볍게 치고받으며 대화를 나눈다.
애쉬의 첫 일격 이후로는 그야말로 투닥투닥 거리는 것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멋모르는 관객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얼핏 봐도 그 공방의 수준이 예선까지 봐왔던 경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 관객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애쉬와 조인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거기서 넌, 어느 정돈데?”
“글, 쎄! 중하위?”
“…중하위?”
이런 실력으로 중하위라고?
조인의 대답을 들은 애쉬가 놀라 잠시 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때. 조인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애쉬를 덮쳤다.
키 194cm. 기계 신체를 이식하여 몸무게가 200kg에 육박하는 거구가 어울리지 않게 재빨리 움직인다.
“흐압!”
대화는 대화고 승부는 승부. 상대가 빨라서 잡지 못한다면 그라운드 기술을 넣는 것도 방법이었다.
사이보그라면 관절기 따위에 피해를 입지는 않을 터였으나 애쉬는 강화인간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렇다면 그라운드 기술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흐으…?”
넘어가질 않는다.
꿈쩍도 않은 애쉬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제 몸무게의 두어 배는 될 조인의 태클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허, 무슨.”
조인은 그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단숨에 그의 시야가 뒤집혔다.
한 순간 애쉬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팔이 풀리고 멱살이 잡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출력을 제한했다곤 해도 전력을 다해 제 몸을 끌어안고 있는 사이보그의 태클을 단숨에 풀어내고 집어던지는 괴력.
일반인이나 어중간한 강화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다.
쿠웅!
우당탕 바닥을 구른 조인은 누운 그대로 조명이 켜진 천장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있어 대충 흘려들었던 중계석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어왔다.
[애쉬 론모어 선수가 조인 디아벨을 그대로 던져버립니다!! 한 순간에 넘어간 조인 디아벨 선수! 충격은 큰 걸까요?!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조인은 웃기지도 않은 중계석의 목소리에 허허 웃음을 흘렸다.
이 싸움은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아무리 그가 사이보그라고는 하지만 힘을 절반이나 제약한 상태로 저런 최고위급 시술을 받은 강화인간을 이길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출력이 제한된 만큼 강화인간인 애쉬와 어느 정도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이걸로 끝?”
그렇게 2~3초 정도 바닥에 누워있던 그의 귀에 상대방, 애쉬의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그가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말투.
평소였다면 그냥 웃으며 넘어갔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괜히 오기가 치솟는다.
팟, 하고 몸을 탄력있게 튕겨 자리에서 일어선 조인이 애쉬를 바라봤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잿빛 은발과 청안.
같은 남자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잘생긴 얼굴로 신기하리만치 개구지게 웃고 있다.
그 표정을 본 조인은 저답지 않게 불평하고 말았다.
“이건 솔직히 좀 불공평한 것 같은데.”
“그래서 포기한다고?”
“…하하.”
돌아온 도발에 조인이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대부분의 일에서 걸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하게 넘어가는 그였지만 지금 저 얄미운 얼굴을 보니 한 방 먹여주지 않고는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아니, 그럴 순 없지. 이 악물라고, 친구. 나도 진심으로 갈 테니까.”
룰을 어기고 출력 제한을 풀겠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상대방을 진짜 때려눕힐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조인의 분위기를 읽은 애쉬가 여전히 그 얄미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고,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조인의 이마에 핏대가 하나 솟아났다.
“아까 말했던 대로 좀 봐줄 테니까 얼마든지 들어와 봐.”
“하하하.”
* * *
“으음….”
목이 녹아들 것처럼 푹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침구류. 그리고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따뜻한 체온들까지.
정말 간만에 두 명의 여자와 즐거운 밤을 보낸 애쉬는 그녀들을 깨워 함께 식사를 한 뒤 방에서 내보냈다.
그렇게 전날 성욕에 이어 수면욕, 그리고 오늘 식욕까지 모두 해결한 애쉬는 자신이 파이트 클럽의 이벤트 경기에서 완전히 혼절시켜버린 조인 디아벨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잘 일어났을라나.’
계속 잘 버티길래 마지막엔 힘을 조금 더 줘서 턱주가리를 날려버렸는데, 아무리 목을 단련한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 정도라면 뇌에 충격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이보그 같았는데, 출력을 제한한 것도 솔직히 마음에 걸렸고.
나름 하루를 재밌게 보내도록 도운 녀석이니만큼 찾아가서 안부라도 물을까 생각한 애쉬였지만, 그가 직원에게 조인 디아벨의 위치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미 그가 떠났다는 말 뿐이었다.
“아 그분께서는 오늘 오전에 나가시는 걸 봤습니다. 기존에는 며칠 동안 이곳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셨는데, 지금은 아마 완전히 떠나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예,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대답한 어린 직원에게 팁을 조금 넘겨준 애쉬는 다시 카지노를 찾았고, 거기서 만난 다른 직원에게 조인 디아벨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예, 조인 디아벨 님께서 고객님께 전해달라고 맡겨두신 물건이 있습니다. 무슨 명함 같았는데….”
“오, 그래?”
“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애쉬에게 소식을 전한 것은 조인 디아벨이 노리고 있다던 그 여성 딜러였는데, 지명권이 없었는데도 개인적으로 어찌어찌 잘 꼬셔서 하룻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인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짧게 부탁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애쉬는 그녀로부터 명함을 하나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영문 글씨와 숫자, 그리고 코드가 적혀있는 명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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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ing D – 28340]
[Code : AD16189336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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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는 명함에 적힌 것들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의미가 있으니 준 거겠지, 하고 그것을 잘 챙겨두었다.
여러모로 재밌게 즐긴 하루의 유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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