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5. 후계경쟁(29)
* * *
“애쉬. 시간 나면 같이 옷이나 사러 갈까요?”
“응? 갑자기?”
호위 대상인 서령이 업무를 쉬는 휴일. 간만에 같이 자유 시간을 갖게 된 애쉬에게 서령이 제안했다.
이렇게 뜬금없이 옷이나 사러가자니. 데이트 신청인가 싶었지만, 곧 이어진 서령의 말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갑자기라뇨. 아까 다들 모였을 때 말씀드렸잖아요. 곧 회장님 생신이 있다고.”
“…아. 그랬었나.”
매년 있는 유진혁 회장의 생일. 그게 가까워졌다고 했었나. 딴 짓하느라 대충 흘려들어서 잘 기억은 안 났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얼핏 그것을 떠올린 애쉬가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왜냐구요?”
애쉬의 반응을 본 서령이 몰라서 묻냐는 듯 몇 발자국 움직여 그의 옷장을 휙 열어젖혔다.
이제는 완전히 거리감이 사라져 친구 같은 관계가 되어버렸기에 할 수 있는 과감한 행동이다.
“이것 좀 보세요.”
옷장을 열어젖힌 서령은 애쉬에게도 보라는 듯 그 앞에서 비켜섰고, 그의 옷장 속 광경 세상에 드러났다.
“본인이 직접 보기에 어때요?”
옷걸이에 걸린 두터운 방탄, 방검 코트 몇 벌과 셔츠 몇 벌. 그리고 아래 칸에 보이는 청바지와 흰 티셔츠의 뭉치들.
그냥 그걸로 끝이다. 아무리 옷에 관심이 없는 애쉬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펼쳐놓고 보니 정말 처참할 정도였다.
애쉬는 침대에 늘어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령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뭐…. 그래도 괜찮지 않나?”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해 차마 그러지 못하겠고, 어쩔 수 없이 쥐어짜낸 말은 궁색하기 그지없다.
슬쩍 지나가면서 옷 한두 벌 꺼낼 때는 몰랐었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자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애쉬 자신이 보기에도 조금 심각하다 싶을 정도.
서령도 그런 애쉬의 눈빛을 읽었는지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는 당당히 말했다.
“괜히 우기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직접 보기에도 너무하다 싶죠? 어떻게 사람이 옷을 이렇게 안 살 수가 있어요?”
맨날 흰 티 아니면 셔츠에 청바지, 코트만 걸치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거추장한 것을 싫어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애초에 입을 옷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여기로 출장을 나와서 그런 거지….”
“벌써 출장을 나온 지 두 달은 됐는데요?”
“…….”
나름의 변명을 펼치려던 애쉬의 입이 서령의 반박을 이기지 못하고 꾹 닫혔다.
그렇다. 벌써 일 때문에 서령의 집에 머물게 된 지도 두 달 가까이 지난 것이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어떻게 살살 피해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애쉬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 알아서 좀 살 테니까….”
“아뇨, 오늘 같이 사러 가요. 회장님 생신에도 아무렇게나 입고 가면 안 되니까요.”
애쉬가 지금 당장이라도 주문하겠다는 듯 통신 단말기를 들었지만, 서령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통신 판매하는 옷의 수준이야 알만했고, 또 애쉬의 패션 센스를 믿을 수도 없다.
맨날 흰 티랑 검은 셔츠만 돌아가면서 입는 사람이 옷을 골라봐야 얼마나 잘 고르겠는가.
그렇게 아무렇게나 고른 옷을 입고 회장과 친인척들, 그리고 그룹의 최고위 임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 갔다간 엄청난 눈총을 사고 말 것이었다.
종의 흠은 그 주인의 흠이 되는 법.
물론, 실제로 애쉬가 그녀의 종은 아니었지만, 멋모르는 외부인들은 그렇게 볼 터다.
후계 경쟁에서 이런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만큼 평소에는 복장에 너그럽던 그녀도 깐깐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빨리 옷 챙겨 입고 나오세요.”
“…그래.”
결국 서령의 기세에 이기지 못한 애쉬는 그녀를 따라 집을 나섰다.
*
“일단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한 번씩 입어보죠.”
“뭐? 잠깐….”
“여기 옷 좀 한 벌씩 꺼내주시겠어요?”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백화점의 고급 정장점까지 끌려온 애쉬가 기겁했지만, 서령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서도 자신의 뜻대로 강행했다.
직원이 창고로 향하자마자 애쉬는 서령이 가리킨 정장들을 바라봤다.
못해도 수십 벌은 되어 보이는 숫자.
색감이 조금씩 틀리다는 것 말고는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모두 별개의 제품으로 구분되어 있다. 서령은 그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그에게 입혀보려는 것이다!
괜히 여자들의 쇼핑에는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소리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애쉬는 벌써부터 피로감에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신난 서령과 직원들은 그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워낙에 테가 좋으셔서 어떻게 해도 잘 어울리세요.”
“그렇죠? 이것도 괜찮네요. 여기서 이 부분을 이렇게 커스텀하고….”
“아,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릴 수는 있지만 이런 방식은 어떠신가요?”
옷의 단추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며 조정하려는 서령과 거기에서 한술 더 떠서 추가 옵션을 제안하는 직원.
애쉬는 옷 갈아입히기 게임의 인형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기, 나 목이 좀 마른데. 좀 쉬었다 하면 안 되나?”
“아, 마실 것은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음료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
아니, 그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닌데.
애쉬는 불필요할 정도의 과친절을 보이는 점원의 대답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 서령을 설득해보려던 그의 생각이 단번에 차단된 것이다.
1구역에서도 손에 꼽는 백화점 최상층에 위치한 매장들은 역시 진짜 재력가들을 위한 곳인지 사소한 음료 심부름 하나하나까지도 점원이 대신해주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따라오고 알아서 하겠다며 밀어붙이는 거였는데.
그냥 후딱 고르고 끝내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온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애쉬는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버거울 정도의 정신적 피로감에 마른 세수질을 했다.
그런 애쉬를 보고 서령도 조금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음, 어쩌다보니 규모가 커지긴 했는데, 최대한 빨리 고르고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피곤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다음이 또 있다고?”
“당연히 넥타이랑 악세서리도 골라야죠.”
“아…….”
피곤한 기색의 애쉬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주는가 싶었던 서령의 말은 첫 의도와 다르게 절망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계속해서 이어진 영겁과도 같은 세 시간.
애쉬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
“그럼 결제는 항상 하시던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네. 제작은 언제쯤 완료될까요?”
“보통 맞춤 주문을 넣으시면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는 기다려 주셔야 하는데, 유서령 고객님 같은 경우에는 최우선 대상이시기 때문에 며칠 내로 배송까지 완료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잘 부탁드릴게요.”
“예. 오늘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로 도움이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가요, 애쉬.”
“…어.”
직원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허리를 90도 각도까지 접어 인사한다. 서령은 멍한 상태의 애쉬와 팔짱을 낀 채 이끌어 움직였다.
쇼핑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애쉬와 달리 상쾌한 듯 무척이나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조금 아쉽네요. 애쉬가 너무 힘들어하지만 않았어도 좀 더 둘러보는 건데….”
…아쉽다고?
애쉬는 서령의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탄환과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을 가로질러 달리지, 다시는 이런 쇼핑에 끌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 다짐했다. 앞으로는 결코 방심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겠노라고.
만약 이 다짐을 잊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은 그가 인간이길 포기한 날이 될 것이다.
“아, 애쉬.”
“으응?”
애쉬는 자신을 부르는 서령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여기서 쇼핑을 더 하자는 건 아니겠지?
아직 백화점 안이었고, 또 집을 나오며 서령에게 오늘은 원하는 대로 따라주겠다는 무책임한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서령이 눈 딱 감고 하루 종일 그를 끌고 다닌다고 하면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어길 수도 없고.
겁에 질린 애쉬에게는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서령이 그를 부른 이유는 추가 쇼핑 같은 게 아니었다.
“살 것도 다 샀으니 저기서 잠깐 쉬고 갈까요?”
서령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엘리베이터 옆의 층별 배치도.
그 중에서도 백화점 멤버십에서 일정 등급 이상을 달성한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백화점 VIP라운지 카페였다.
그곳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애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쇼핑만 아니라면 뭐든지 OK였다.
“휴, 그래.”
“그럼 가요.”
애쉬와 서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라운지로 향했고, 그곳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하신 음료입니다.”
“아, 감사해요.”
“아닙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달그락. 카페의 점원이 쟁반에서 음료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간다.
애쉬는 향긋한 커피 향을 느끼며 잔을 들었다.
“이게 한 잔에 15,000코너(1만5천Couner=7만5천원)나 하는 커피란 말이지.”
“네. 솔직히 조금 비싼 감이 있긴 해요. 그래도 이런 날이 아니먼 언제 먹겠어요.”
잔을 입에 가져가기 전, 향을 먼저 맡는 애쉬를 보고 서령이 작게 미소 지었다.
애쉬도 그렇지만, 그녀의 경우 연방에서도 손에 꼽는 재벌가의 손녀였기에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재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사치를 즐기지 않고 서민적인 느낌으로 살아가는 서령이었기에, 그녀에게도 커피 한 잔에 이런 큰 금액을 쓰는 것은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애쉬의 옷에는 엄청난 금액을 쏟았으면서도 겨우 일만오천 코너짜리 커피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말이다.
“어서 정장이 왔으면 좋겠네요. 애쉬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면 베일라 씨도 깜짝 놀랄 걸요?”
“…그때도 그 패션쇼를 다시 해야 하나?”
“아뇨. 굳이 따로 하지 않아도 어차피 날이 되면 보여줄 건데요, 뭐.”
유진혁 회장의 생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10일 뒤다. 정장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을 터였다.
설마 다시 옷입히기 놀이의 인형이 되는 건가 싶어 벌써부터 질린 기색을 보이는 애쉬. 그런 그의 표정을 읽은 서령은 작게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후후, 애쉬도 거울로 봤잖아요. 평소랑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던데요?”
“난 그런 게 영 안 어울리는 타입이라.”
“아뇨! 제 말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말 잘 어울려서 놀랐다는 뜻이었어요.”
평소 장난기 많고, 가벼운 분위기로 가득한 애쉬였지만, 막상 그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정장을 차려입자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몸과 외모야 원래도 남과 비교할 것 없이 뛰어났고, 장난기에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살아나며 영화 속 캐릭터가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덕분에 백화점에서 근무하던 직원들도 꺅꺅거리며 신나게 옷을 갈아입히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서 서령으로서도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는 모습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정말 좋을 텐데….
서령이 그런 생각을 담아 애쉬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런 서령의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서령의 눈빛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던 애쉬가 툭 던지듯 물었다.
“왜?”
“아뇨, 아쉬워서요.”
“…설마 또 쇼핑하러 가자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후우. 서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가벼운 느낌만 보이고 있으니 두근거릴 새가 없지 않은가.
진지한 면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예전처럼….’
서령이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차량의 자율주행시스템을 해킹당하고 유선혁 사장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던 날의 기억은 이젠 다 아물어 작은 흉터만 남아있었지만, 그날 보였던 애쉬의 모습은 아직도 뚜렷했다.
어둠 속을 꿰뚫고 나타나 떨고 있는 자신을 안아주던 그의 모습.
‘그 품… 무척 넓고 따뜻했었지.’
“앗, 아니.”
무의식의 흐름대로 떠올리던 기억은 어느새 그의 품속까지 닿았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던 서령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서령이 갑자기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그녀의 정면에 앉아있던 애쉬가 영문을 모른 채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던 서령은 애쉬의 얼굴을 보자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도 조금 화끈 거리는 것 같은 게, 붉어진 건 아닐지 걱정된다.
서령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괜히 떠들었다.
“그,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갈까요?”
“아직 커피도 다 안 마셨는데.”
“아, 아아, 물론 그건 다 마시구요.”
비싼 커피인데 남길 수는 없지. 애쉬는 서령의 감정을 모른 채 커피에 집중했고, 서령은 그런 애쉬에게서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 그것을 식히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모로 바쁜 하루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