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5. 후계경쟁(30)
* * *
“애쉬! 이러다 늦겠어요!”
알겠어.
초조하게 소리쳤지만, 방 안쪽에서는 여전히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은근히 그 늘씬한 몸매를 드러내는 블랙 이브닝드레스와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화장. 평소에는 잘 들지도 않는 핸드백을 어깨에 걸쳐 화사하게 꾸민 서령이 애쉬의 방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이러다 늦기라도 한다면 눈치를 엄청나게 받을 텐데.
슬슬 초조함이 그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려 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잘 차려입은 애쉬가 나왔다.
“아, 미안. 전에 챙겨줬던 넥타이핀 좀 찾느라.”
중요한 자리라는 말을 기억했는지 평소보다 신경 쓴 듯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
입고 있는 정장은 얼마 전 직접 백화점에 찾아가 맞춤 제작한 수고가 헛되지는 않았는지 마른 듯 탄탄한 몸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멋들어진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옷을 입다 답답했는지 셔츠의 윗단추를 몇 개 풀어 뒀고, 넥타이와 넥타이핀은 손에 따로 들고 있는 게 눈에 걸렸지만 그런 건 이동하는 와중에 매어줘도 될 것이었다.
“빨리 가요.”
“어.”
서령은 애쉬를 재촉해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내려간다. 서령이 타고 갈 차량 옆에는 먼저 준비를 마친 에아임과 베일라, 빌헬름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량 옆에서 자신들끼리 뭔가를 얘기하던 셋은 다가오는 서령과 애쉬를 발견했다.
“오…. 정장이 굉장히 잘 어울리십니다.”
“으음. 평소에는 청바지나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확실히 다르군요.”
“저도 애쉬 씨의 정장 차림은 처음 보는데 신기하네요.”
다가오는 애쉬의 옷차림을 본 에아임과 베일라, 빌헬름이 순서대로 감탄했다.
서령도 그의 정장차림을 다시 보곤 여전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나 한가롭게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경호원 분들도 준비가 다 끝났죠?”
“예.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럼 바로 출발하죠, 에아임.”
“알겠습니다.”
베일라에게 경호원들의 상태를 물은 서령은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마자 에아임에게 말했고, 에아임도 서령의 그런 급한 기색을 알았는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다섯 명이 다 올라탄 뒤 시동을 걸어 출발한다. 평소보다 좀 더 큰 차량을 골라 다섯 명이 탔는데도 탑승 공간이 비좁거나 하지는 않았다.
“에아임, 5시 반까진 도착해야하는데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요?”
“지금이 4시 40분이니 급하게 간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당연히 자율 주행으론 불가능하고, 에아임처럼 직접 운전하는 식으로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예. 최대한 빨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난 차량이 도로를 달렸다.
“애쉬, 잠깐 이쪽으로 와 보세요.”
“왜?”
“넥타이는 매야죠.”
“좀 이따 매면 안 되나? 답답한데.”
“직접 매시게요?”
“아니. 맬 줄 몰라.”
“그럼 그냥 이쪽으로 대세요. 넥타이도 주시구요.”
서령의 강권에 애쉬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하얗고 고운 손이 단추를 하나하나 꿰고, 넥타이를 두른다.
애쉬는 천천히 모양새를 잡아가는 넥타이와 자신의 정면, 바로 눈앞에서 집중하고 있는 서령을 내려다봤다.
끝이 살짝 웨이브진 새까만 단발과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묘하게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눈매와 흰 피부에 톡 찍힌 눈물점까지.
오늘의 애쉬가 그렇듯 어깨가 드러난 블랙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평소의 어린 느낌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한 명의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애쉬는 괜히 자신의 목 근처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길과 부드러운 숨결, 은은한 향기가 의식되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것들이 괜히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다.
애써 그런 느낌들을 무시하고 서령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린 애쉬는 묘한 눈길로 자신과 서령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셋을 발견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그냥 이것저것….”
빌헬름이 백미러를 통해 서령과 애쉬를 바라보던 앞좌석의 둘을 대신해 대답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보다 애쉬를 한참은 먼저 알아온 빌헬름에게도 최근의 애쉬가 보이는 모습들은 신기한 것들뿐이었다.
그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애쉬 론모어가 귀한 집 따님 하나한테 묶여서는 꼼짝 못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서령이 적이라면 그 누구라도 가차 없이 처리해버리는 애쉬의 본모습을 모르기에 있을 수 있는 일 같기도 했지만, 왠지 알게 된다고 해도 크게 변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애쉬가 굳은 채로 서령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이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묘한 시선을 보내오는 사이.
마무리로 애쉬의 넥타이에 핀까지 깔끔하게 꽂아준 서령이 고개를 들었다.
“자, 다 됐어요. 넥타이 매는 법 정도는 알아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분명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쓸데가 있을 테니까.”
“…그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뒤늦게 분위기를 알아챈 서령의 질문에 애쉬가 어색한 느낌으로 대답했다. 이어서 고개를 든 서령이 애쉬 옆자리의 빌헬름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빌헬름도 슬쩍 눈을 돌려 대답을 피했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방금 둘의 모습이 막 사귄 풋풋한 연인 사이처럼도 보였다고.
* * *
“차량은 맡겨주신 뒤 바로 입장하시면 될 겁니다.”
“아, 예.”
주차요원의 말에 차를 세운 에아임이 대답했다. 그리고 뒤로 눈치를 보냈다.
차량은 주차요원이 알아서 주차를 해줄 테니 이제 차에서 내려 저택의 연회장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챈 일행은 하나둘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덜컥.
“와…. 여긴 진짜 별세계인데요?”
앞서 내린 서령과 빌헬름보다 한 박자 내리는 것이 늦은 애쉬의 귓가에 빌헬름의 감탄이 들려왔다.
그에 애쉬도 주변을 돌아봤다.
어스름이 깔린 하늘.
전체적으로 고풍스런 느낌의 저택이 중심에 떡하니 서있고, 그 주변을 대리석 바닥과 푸르른 정원이 가득 매우고 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만났던 유장혁 부회장의 저택과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지만 이곳은 좀 더 빈티지틱한 분위기가 흘렀고, 전체적인 크기가 조금 작은 대신 특별한 것들이 보였다.
“저기 저거 보이세요? 제가 뒷세계의 커뮤니티에서 봤는데 저게 펼쳐지면 어지간한 포탄으로도 뚫기가 힘들대요. 저걸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이야….”
예를 들면 저택을 중심으로 주변을 두르도록 쫘악 펼쳐진 격벽상승장치 같은 것.
그것을 발견한 빌헬름이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저게 20미터 이상까지도 솟아오른다는데, 진짜 펼쳐지면 이 저택은 완전 벙커, 요새나 다름없을 거예요. 이 저택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면 최소 수억에서 수십억은…….”
역시나 연방에서도 손에 꼽는다는 대재벌, 유성 그룹의 유진혁 회장의 저택이라는 것일까.
이런저런 정보에 밝은 빌헬름이 하나씩 알아보고 이건 뭐고 저건 얼마고 얘기를 떠드는데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튀어나왔다.
당장 저택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온 금액만 이번 서령의 의뢰금으로 쳤을 때의 애쉬를 수십 번도 더 고용할 돈.
그는 관심이 없는 분야라 잘 몰랐지만, 역시나 이런저런 정보에 귀가 밝은 빌헬름은 그것들을 대부분 알아봤다.
“아니, 저건 이번에 유성에서 만들었다던 SPDS017 레이저 센서? 저건 발표만 됐지 출시도 안 된 제품인데…….”
“그래그래, 잘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걷기나 해.”
애쉬가 눈을 빛내며 계속해서 떠들려는 빌헬름의 입을 막았다. 이렇게 계속 두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떠들 것 같다.
그래서 애쉬는 그냥 이 저택이 그냥 저택이 아니라 돈을 처바른 요새구나, 하는 느낌으로 알아듣고 빌헬름의 끝나지 않은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죠.”
저택의 홀 앞에 도착하자 일행을 안내하듯 앞서 걷던 에아임과 서령이 잠시 뒤를 돌아봤다.
언제나 무뚝뚝한 베일라도, 열심히 무어라 떠들어대던 빌헬름도, 그리고 조용히 따라 움직이던 애쉬도 모두 자리에 있다.
그것을 확인한 에아임은 미리 준비한 초대장을 들어 연회장 입구의 경비에게 보였다.
“예. 초대장은 확인했습니다. 잠시 스캔이 있을 텐데, 혹시나 호신 물품들을 갖고 계신 분들은 모두 이곳에 맡긴 뒤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경비의 말에 대답한 서령이 베일라와 애쉬를 돌아봤다. 베일라는 자신이 지닌 권총과 기타 물품들을 반납했고, 잠시 고민하던 애쉬도 갖고 온 검을 경비에게 맡겼다.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오늘 이곳의 연회에 참여할 이들이 모두 어떤 이들인가.
아무리 유성그룹 내에서만 여는 축하연이라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사장, 부사장급의 최고위급 이사들이었고 그들이 데리고 온 경호원들의 숫자만 못해도 수백은 될 터였다.
게다가 이만큼이나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는 곳인데 굳이 검이 필요할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기를 모두 맡긴 뒤 스캔을 통과한 일행은 문을 열고 연회장으로 들어섰고, 그런 그들을 화려한 연회장의 빛과 음악,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맞이했다.
*
“오, 유서령 이사님 아니십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환영 감사해요.”
서령이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지지하기로 했던 유성 미래전자의 사장과 부사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역시나 제 편인만큼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다.
“전 잠시 얘기 좀 하고 올 테니 연회를 즐기고 계세요.”
“어, 수고.”
서령의 말에 애쉬가 단번에 호의를 받아들였다. 솔직히 피곤하게 정치적 얘기를 하는 자리까지 따라다니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러나 베일라는 언제나 그래왔듯 그런 자리조차 마다하지 않고 쫓아갔다.
“저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지킬 사람은 한 명쯤 있어야 하니까요.”
흘깃 경호원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않을 거냐며 게으른 애쉬를 바라보는 베일라. 하지만 애쉬는 못본 척 그런 시선을 무시했다.
이런 곳에서 사고를 치면 그건 후계경쟁이 아니라 그냥 인생이 끝인데, 아무리 후계경쟁의 경쟁자들이 멍청하다고 해도 일을 치겠는가.
괜한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그럼 애쉬랑 빌헬름 씨는 쉬고 계세요.”
“네. 이사님도 고생하세요.”
“가요, 베일라 씨.”
“예.”
서령이 에아임과 베일라를 이끌고 자신의 지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애쉬는 빌헬름과 함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주변을 둘러보며 얘기했다.
“저기 저 놈은 누구야?”
“아, 그쪽이 쌍둥이 중 동생인 유성혁 부사장이에요. 반대편에 있는 여자가 다른 한 명인 유선화 부사장이구요.”
“그래? 아가씨랑은 별로 안 닮았네.”
애쉬가 자리한 곳으로부터 약 40미터 정도 밖. 한 쌍의 남녀가 주변인들과 얘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바로 서령의 경쟁자인 쌍둥이 남매 쪽이다.
중심에 선 남자, 유성혁 부사장은 조금 소심한 편으로 보였고, 여자, 유선화 부사장은 당당한 게 같은 쌍둥이여도 성격이 많이 갈리는 것 같았다.
만약 애쉬 혼자 왔다면 그들을 알아볼 수 없었겠지만, 빌헬름은 이번 유진혁 회장의 생일 축하연에 참여한 이들 중 대부분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애쉬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었다.
“저쪽은 뭐, 부회장이고. 저기 정 반대편은?”
이 연회장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쪽. 그 중심에 선 유장혁 부회장을 알아본 애쉬가 이번에는 정 반대편에 위치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쪽은 유성호텔의 이한설 사장이네요. 아시죠? 우리 이사님 모친.”
“아, 저 아줌마가.”
유장혁 부회장과 꽤나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와인 잔 하나를 들고 떠들고 있는 여자.
‘저 여자가 그 막장 가족의 마지막 한 명이란 말이지.’
애쉬는 밝은 눈으로 이한설 사장에게 집중했다. 나이가 이제 예순에 가깝다고 알고 있는데, 외모는 기껏해야 4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저렇게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외모 관리에 돈을 엄청 쏟았겠지.
확실히 나이가 들기는 했어도 서령의 모친이라는 것인지 그 미모가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애쉬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이 연회장의 중심이 되고 싶다는 것인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 놈들.
면상만 봐도 띠꺼운 기운이 흘러넘치는 게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럼 저쪽에 있는 게 그놈들이겠네.”
“네. 저쪽이 전에 이사님을 습격했다던 유선혁 사장이랑 유상혁 부사장 쪽이에요.”
“그래 보여. 얼굴을 한 대씩 후려주고 싶게 생겼네.”
애쉬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일을 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한 방 먹여줄 것이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던 애쉬는 문득 자신의 눈에 들어온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저 녀석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