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5. 후계경쟁(31)
* * *
“저 녀석은….”
유선혁 사장과 유상혁 부사장. 그들의 무리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낀 채 유선혁 사장의 뒤편에 시립해 있는 거구의 남자.
그 체형과 갈색 머리칼은 애쉬의 눈에 상당히 낯이 익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며칠 전에도 봤던 녀석이었으니까.
애쉬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았으나, 착각이 아니라는 듯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저놈이 왜 저기 있지?’
조인 디아벨.
얼마 전 유흥 시설, The Paradise의 파이트 클럽에서 그와 경기를 한 뒤 이상한 명함만 남기고 사라진 남자가 유선혁 사장의 진영에 서있었다.
“용병이라더니, 저쪽이랑 같이 일하고 있었나?”
“네?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냥 저쪽에 아는 얼굴이 하나 있어서.”
애쉬가 자신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어오는 빌헬름에게 대답했다.
이런 자리에서 본 게 대수롭다고 할 정도로 친한 녀석은 아니었지만, 나름 좋게 본 녀석이라 그런지 괜한 거리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직접 부딪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쩔 수 없이 하겠지만, 반대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 조인 디아벨에게서 시선을 돌린 애쉬는 그쪽에서 신경을 거뒀다.
언젠가 좋지 않은 곳에서 만날 운명이라면 결국 만날 것이고, 아니라면 만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쪽에서 신경 써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럼 다른 쪽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린 배부터 채우자.”
“네? 오자마자 식사부터요? 음식이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구경이라도….”
“애도 아니고.”
“그치만 영화에서나 보던 상류층의 파티라구요.”
유진혁 회장의 생일 축하연인 만큼 연회장에 준비된 음식들은 최고의 셰프들이 준비한 것들일 터.
그것들이 탐스럽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밥이나 먹고 가는 건 너무도 아까웠다.
빌헬름은 아쉬운 듯 주변을 돌아봤다.
연회장 내에는 온갖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개중에는 유성 그룹 이사 측의 가족인지 젊은 사람들도 제법 보였는데, 역시나 다들 관리를 잘 받아서 훤칠하고 예쁘장한 게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빌헬름은 제 나이대의 아리따운 여성 자제들을 바라보며 상상했다.
이런 장소를 따분해하는 상류층의 아가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런 건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 아닌가.
애쉬도 그런 빌헬름의 간절한 눈빛을 알아보곤 툭 던지듯 말했다.
“그렇게 놀고 싶으면 갔다 오던가.”
“와!”
애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빌헬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그에 애쉬는 고개를 저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코가 깨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나중에 울지나 마라.”
“안 그래요!”
신이 난 빌헬름이 대답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서령이 오늘의 축하연에 대해 말할 때부터 기대하고 있는 것 같더라니. 처음부터 저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애쉬는 잠깐 그런 빌헬름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음식을 들고 와 식사를 즐겼다.
“으음. 이건….”
맛있네.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음식들을 가져온 애쉬가 한 입 먹고는 작게 감탄했다.
화려하고 먹음직스런 외관과 그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맛.
애쉬는 여태껏 재벌들의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이런 것을 매일 먹고 산다는 것이 처음으로 부러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즐기던 애쉬는 트레이 위에 칵테일과 와인 따위를 채운 잔을 얹고 지나가던 사용인을 불러 세웠다.
“여기 위스키는 없나?”
“…위스키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은 준비된 게 없지만, 잠시 기다려주시면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쟁반에 칵테일과 와인 따위를 채운 잔을 얹고 지나가던 사용인이 위스키를 요구하는 애쉬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가도 곧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이 넓은 저택에 위스키 하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택에 머무는 이들의 개인 음주용으로 준비된 것이지, 연회용으로 준비된 물건은 없었기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그 정도로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지는 않지 않은가.
그런 사용인의 말에 애쉬가 손을 저었다.
“그럼 됐어. 굳이 준비할 것까지야.”
“금방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다니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유성 그룹 내에서 한 자리 차지한 인물들, 혹은 그 관계자다보니 사용인도 최대한 하객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쉬는 그런 사용인의 친절을 사양했다.
당장 준비된 게 없다는데 굳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예. 그럼 그 외에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불러주십시오.”
결국 애쉬의 거절을 받아들인 사용인이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애쉬는 그렇게 사용인을 떠나보낸 뒤 위스키 대신 다른 음료와 맛보지 못한 음식들을 들고 왔는데, 원래 그가 있던 자리에 손님이 생겨 있었다.
“오, 왔군. 먼저 발견했으면 인사라도 하지 그랬나, 친구.”
덩치에 맞지 않게 능청맞은 목소리. 슬쩍 내린 선글라스 밑에는 적갈색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다.
애쉬는 자신의 자리 맞은편에 앉은 남자, 조인 디아벨을 발견했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가져온 음식과 음료 잔을 내려놓았다.
“뭐, 일 때문에 바쁜 거 아니었어?”
“바쁘긴. 이런 자리에서 경호원이야 장식품이나 다름없는데. 이거 정말 섭섭하구만.”
섭섭하다며 선글라스를 벗어 내려놓는 조인 디아벨.
그러나 애쉬는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음료를 입으로 가져가며 가볍게 대답했다.
“뭐 어때. 기껏해야 하루 본 사인데.”
“뭣, 지난날의 추억을 잊었단 말인가?!”
노골적으로 충격 받았다는 듯 표정을 바꿔 보이는 조인 디아벨. 여전히 감정 표현이 풍부한 남자다.
애쉬는 그런 그의 물음에 픽 웃으며 대답해줬다.
“추억? 네가 나한테 한 대 맞고 뻗은 건 기억하지.”
“잠깐. 그건 애초에 전제 조건부터가 잘못됐다고. 아무리 나라도 출력을 50%나 제한한 상태로 초고위급 강화 인간을 이길 수는 없단 말이지.”
특히나 무기도 없고, 신체 능력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격투기에선 더욱 그렇다며 열변을 토하는 조인 디아벨이었으나, 애쉬는 그런 그의 변명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허접.”
“커헉.”
“그래봐야 한 방에 턱이 돌아가서 드러누웠다는 사실은 안 바뀐다고.”
그리고 자신이 출력의 50%를 제한했다고 떠들고 있었으나, 애쉬 쪽도 전력의 50%도 다하지 않은 상태였다.
양측 다 전력을 다한다고 뭐가 바뀌기나 했겠는가.
허접이라는 한 마디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틀어진 조인 디아벨을 앞에 둔 애쉬가 만족스럽게 식사를 계속했다.
이번에 가져온 음식들 또한 그의 입맛에 무척이나 잘 맞았다.
그렇게 애쉬가 식사를 즐기는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늘어졌던 몸을 다시 세운 조인 디아벨이 물어왔다.
“그보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친구도 유성 그룹 고위 임원의 자제였나?”
The Paradise에 처음 들렀으나 50층까지 뚫은 것을 봐도, 그 신체 강화 수준을 봐도 그렇다.
모두 일반적인 재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었으나, 역시나 정답은 아니다.
“아니, 나도 너랑 마찬가지로 경호원인데.”
“음? 경호 대상은 어디 두고?”
“저기.”
애쉬가 턱짓으로 서령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에아임, 베일라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령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본 조인 디아벨이 작게 감탄했다.
“오. 고용주께서 대단한 미인이시군. 경호할 맛이 나겠어. 반면 내 쪽은….”
조인 디아벨이 자신의 호위 대상인 유선혁 사장 쪽으로 눈을 향했다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애쉬도 마찬가지. 조인 디아벨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재수 없는 얼굴을 보고는 인상 쓰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면상만 봐도 즐거웠던 식사 시간이 불쾌해지는 느낌.
역시 얼굴만 봐도 밥맛 떨어지는 안경잡이보다 고운 아가씨가 호위 대상인 편이 몇 배는 힘이 날 것 같다.
“부럽군.”
“운이 좋았지.”
조인 디아벨의 목소리에 애쉬가 대꾸했다. 서령이 아니라 저런 놈이 상사였다면 때려 쳤어도 진작 때려 쳤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저 상판을 갈아버려서 또 수배가 붙었겠지. 정말 다행인 일이다.
애쉬는 유선혁 사장의 면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유명한 PMC 소속이라더니, 진짜 이름이 있긴 한 것 같네. 이런 자리에까지 대동하는 걸 보니까.”
전에도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유성 그룹의 후계 후보 중 하나가 전속으로 이런 자리까지 데리고 다닐 정도면 확실히 이름이 있는 곳일 터였다.
적어도 개인 경호원만큼은 신용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 애쉬의 말에 조인 디아벨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아마 업계에서 우리 회사만큼 유명한 곳은 없을 걸.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지.”
“그래놓고 이름은 안 알려주겠다?”
“그냥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않나. 하지만 분명 자네도 들어봤을 거야, 친구.”
조인 디아벨이 한번 맞춰보라는 듯 웃었지만, 애쉬는 여전히 감이 잡히는 게 없었다.
그쪽 업계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조인 디아벨은 애쉬 또한 자신과 같은 용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애쉬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슬럼에서 굴러먹던 해결사였다. 용병 업계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모르겠는데.”
“모르는 걸로 괜찮지 않나. 소속된 회사 하나로 우리의 관계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뭐, 그것도 그렇지.”
어차피 녀석이 어디 소속이든 애쉬의 안에서 그는 그저 조인 디아벨이라는 재밌는 놈 정도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대충 소속에 대한 얘기에서 넘어간 둘은 잠시 자리를 같이하며 잡다한 얘기를 나눴고, 그것은 유선혁 사장 측의 사람이 조인 디아벨을 찾으러 올 때까지 계속됐다.
“실례하겠습니다. 조인 님, 스테일 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벌써? 지금 시간이….”
“오후 7시 정도 됐습니다.”
“오, 이런. 신나게 떠들다 보니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군. 먼저 일어나야겠어.”
“편할 대로.”
조인 디아벨이 애쉬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고,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었고, 덕분에 시간은 잘 때울 수 있었다.
“그럼 먼저 가있겠습니다.”
“그래. 인사만 하고 곧 따라가지.”
조인 디아벨을 찾으러 온 유선혁 측 인사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곧 뒤따라간다며 답한 조인 디아벨도 이제 완전히 자리를 떠날 태세다.
‘나도 슬슬 아가씨 쪽에 합류해야겠네.’
그런 둘을 보며 애쉬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조인 디아벨이 장난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 8시 쯤 2구역의 국립공원에서 작은 축제가 열린다더군. 한 번 가보면 그쪽의 어여쁜 아가씨가 좋아하지 않겠나?”
“…응? 뭔 소리야.”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애쉬가 정말 뜬금없이 말하는 조인 디아벨을 향해 의문어린 시선을 향했다.
아직 이곳 축하연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고, 2구역의 국립공원에서 9시에 열린다는 축제에 시간을 맞춰 가려면 지금 당장 출발해야했다.
거기에 가보란 말은 그냥 오늘 유진혁 회장의 생일 축하연에 불참하라는 소리랑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조인 디아벨은 애쉬의 의문이 담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웃으며 말했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친구. 분명 자네의 고용주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테니 말이야. 아직 한창 그런 걸 좋아할 때 아니신가.”
“여길 버리고 국립공원 축제에 가라고?”
“하핫,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도 뭐,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나.”
“…….”
“그럼 이쪽은 찾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네.”
잘 생각해보게.
끝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떠들어대곤 자리를 떠나는 조인 디아벨.
애쉬는 그가 무슨 뜻으로 저런 제안을 한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다가 끝내 그 의미를 찾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군.’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시간은 오후 7시 30분. 유진혁 회장의 생일 축하연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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