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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08화 (108/230)

〈 108화 〉 5. 후계경쟁(32)

* * *

­ 철컥.

연회장의 대문이 양옆으로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퍼진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하객들의 시선.

‘저게 유진혁 회장인가.’

식사를 마친 뒤 서령에게 합류한 애쉬도, 자신의 지지자들과 얘기를 나누던 서령도, 연회장 어딘가에서 여자를 꼬시려 노력하던 빌헬름도 모두 시선을 그곳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그래.”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사무실에서나 볼 법한 진한 회색의 정장차림. 뒤에는 스무 명은 될 비서와 경호원들을 거느린 한 남자가 사용인의 인사를 받으며 걸어 들어온다.

애쉬는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그 남성을 자신의 눈에 담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임에도 걸음걸음에 힘이 넘쳐나는 저 노령의 남성이 바로 ‘유성’이라는 거대한 그룹의 주인이 되는 유진혁 회장이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그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던 유장혁 부회장이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고, 그룹의 다른 중역들도 감히 먼저 다가가진 못했지만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목소리 높여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들 모두가 사회에서는 하나같이 수십, 수백의 부하들을 발밑에 두고 군림했을 이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들 모두가 단 한 명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치 왕의 앞에 선 신하들처럼 말이다.

애쉬가 그 장관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저쯤 되면 왕이나 다름없구만.’

빌헬름의 말에 따르면 최신예 보안 시설 및 방어 시설로 가득한 이 저택은 유진혁 회장만을 위한 왕궁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본다면 이 안에 있는 사용인들은 모두 왕궁의 하인. 경비들은 왕궁을 지키는 병사가 될 것이다.

그룹의 중역들은 앞서 생각했듯 왕의 신하 정도겠지. 그렇다면 서령은…….

“아가씨가 아니라 공주님인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낸 애쉬가 의문을 표하는 서령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헛소리 그 자체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서령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그렇게 애쉬가 대답을 피하자 서령은 궁금해 하는 것 같았으나, 곧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럼 저희도 인사드리러 가보죠. 회장님한테.”

그녀의 경쟁자들이 뒤늦을 새라 유진혁 회장에게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진혁 회장의 성격상 인사 조금 늦는다고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터였으나 반대로 늦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애쉬와 에아임, 베일라는 이제는 경쟁자들 앞에서도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서령을 뒤따라 걸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님.”

“그래. 네 쪽도 잘 되고 있단 얘길 들었다. 지금처럼만 하거라.”

“네. 더 노력할게요.”

서령이 유진혁 회장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의 어머니인 이한설 사장이 인사를 마치고 있었다.

지극히 예의바른 모습이었으나 그녀가 서령을 완전히 방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애쉬의 눈에는 그것마저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후계경쟁에 참여한 경쟁자 중 하나가 아닌 탓인지 다른 이들에 비해서 좀 더 여유롭게 인사를 끝마친 이한설 사장이 자신의 남편인 유장혁 부회장과 함께 물러난다

그 유진혁 회장의 아들 내외가 인사를 마쳤으니 그 다음은 손자, 손녀들의 차례.

“생….”

“생신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먼저 나서려던 경쟁자, 쌍둥이의 동생 쪽인 유성혁 부사장이 있었으나, 서령은 과감하게도 그것을 무시한 채 자신의 손윗사람인 형제, 자매들보다도 앞서 인사했다.

“그래. 고맙구나, 서령아. 하는 일은 잘 되고?”

“덕분에 무척이나 잘 풀리고 있습니다.”

유진혁 회장은 언제나 그렇듯 굳은 표정으로 서령을 대했으나, 한 발짝 떨어져서 둘을 지켜보던 애쉬는 어쩐지 그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들 내외의 인사를 받을 때만 해도 차가운 금속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좀 단단한 바위로 변한 느낌.

누군가는 어차피 둘 다 단단한 건 똑같은데 그게 무슨 차이인가 싶을 터였지만, 그 변화에는 분명 유의미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서령이 유진혁 회장과 대화하는 한편, 애쉬는 그녀에게 순서를 빼앗긴 쌍둥이들이 속삭이듯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꼬맹이가.”

“하. 많이 당돌해졌네.”

여전히 서령을 얕보는 태도. 하지만 저쪽은 맏이인 유선혁과 둘째인 유상혁 쪽 세력처럼 이쪽을 제대로 적대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어릴 적의 서령을 떠올리며 제법 컸네? 하고 놀라는 정도의 목소리였을 뿐.

하지만 저런 태도도 이 후계경쟁이 계속될수록 점차 바뀌겠지.

서령과 에아임, 빌헬름이 합작해 그려가는 그림은 놀랄 만큼 은밀해서 저들은 그 그림 속에 갇힌 뒤에나 자신들이 이쪽의 뜻대로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살핀 애쉬는 분노보다 짜증에 찬 쌍둥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방향, 진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선혁 사장과 유상혁 부사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정상적이지 않은 반응을 발견했다.

“…후우우.”

“…….”

서민들의 재산으론 꿈도 꾸기 힘든 옷들을 잘 차려입은 두 형제.

그러나 지금 한 쪽은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쉬고 있고, 다른 한쪽은 입을 꾹 다문 채 열 생각을 않는다.

자신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서령이 건방지게 첫 번째 순서를 빼앗았는데도 말이다.

‘좀 이상한데.’

후계경쟁의 시작부터 온갖 수작을 부리고 습격까지 해온 놈들이라기엔 너무도 얌전한 상태. 거기서부터 이상함을 느낀 애쉬는 처음부터 천천히 그들을 살폈다.

무테 안경을 쓴 쪽, 유선혁은 길게 떨리는 숨을 내쉬더니 지금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입술을 짓씹고 있었고, 또 다른 한 쪽, 서령의 둘째 오빠인 유상혁 부사장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음에도 그 미세한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들의 순서를 빼앗은 서령에 대한 분노 때문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그들을 자세히 살피던 애쉬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저런 반응은 분노한 이들에게서 나오는 반응이 절대 아니었다.

저건 차라리 분노라기보다는….

“…불안감?”

애쉬가 몇 번이나 직접 봐온 것. 그를 상대하던 이들이 때때로 보이곤 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지?’

애쉬가 자문했다.

저들의 표정과 태도, 그리고 미세한 떨림으로 그들이 지닌 감정은 파악했다. 그러나 애쉬는 저들이 그런 감정을 내비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유선혁 측에서 불안을 읽어낸 직후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머리를 팽팽 돌렸다.

찰나의 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점차 다가오는 자신들의 파멸을 예견했기 때문?

아니. 그렇다기엔 이번 축하연 직전까지 들려오던 소식이 너무도 활동적이다.

애쉬에게 금고를 털린 뒤 저들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변했고, 그런 만큼 나름의 성과도 보이고 있었다.

쌍둥이 쪽을 치고 뭔가를 얻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게 얼마 전 아니었던가.

또, 여태껏 빌헬름의 솜씨를 눈치 채지 못했던 저들이 이제 와서 그것을 알았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자금원들을 정리당한 직후, 길길이 날뛸 때 진작 들켰겠지.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일까.

서령과 빌헬름의 브리핑 때마다 대충 듣고 흘렸던 애쉬로서는 그들이 저런 불안감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좀 제대로 들어둘 걸 그랬나.’

그랬다면 저들이 지금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그렇게 찰나의 순간동안 온갖 추측과 생각을 마친 애쉬의 귓가에 베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안?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애쉬가 생각에 빠지기 직전,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것인지 그것의 의미를 물어온 것이다.

“아니, 음….”

애쉬는 버릇처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길 뻔 했지만, 이내 자신이 흘려들었던 모든 브리핑들을 집중하여 들었던 인물이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을 뭉겠다.

그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베일라와 에아임. 모든 브리핑에 참여하고 집중해서 들었던 그들이라면 후계경쟁의 현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베일라는 애쉬 자신과 마찬가지로 육체 계열인데다 경호원의 입장이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랐으나 인텔리 계열, 그것도 이번 후계경쟁에서 서령, 빌헬름과 함께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는 에아임이라면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물쩍 넘어가려던 애쉬는 그런 생각에 곧장 말을 틀어 자신이 본 것을 둘에게 전달했다.

“……해서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으음. 글쎄요. 불안해 보인다라…. 베일라 씨는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저도 따로 짚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저보다 수석비서 님이 먼저 눈치 챘을 겁니다.”

그러나 애쉬의 설명을 들은 에아임과 베일라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경쟁자들의 모습. 그것만 보고 무언가를 판단하기엔 역시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둘의 대답을 들은 애쉬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흠….”

자신이 믿었던 둘조차 감을 못 잡다니.

뭔가 해답이 나왔다면 속 시원하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되니 괜히 신경이 쓰이고, 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저들의 불안이 옮았는지 애쉬 자신조차 조금씩 불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진짜 오늘 무슨 일이라도 치려고 하나?”

“예? 설마요.”

“아무리 저들이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일을 벌일 수 없을 겁니다.”

애쉬의 말을 들은 에아임과 베일라가 무슨 소릴 하냐며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이곳은 무려 유진혁 회장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고 있는 대저택.

유성 그룹의 모든 중역들이 모인 곳에서 일을 치고도 그룹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자는 바보 천치가 분명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후계경쟁을 주최한 유진혁 회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고 말이다.

공권력은 당연하고 시 정부 전체가 관심을 모으고 있을 이곳에서 사고를 친다?

그것은 애쉬가 있던 지구로 친다면 대기업 재벌의. 아니, 이 세계에서 거대 기업들이 가지는 위상을 따진다면 한 나라의 국가 원수의 생일 축하연을 테러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준하는 중형이 떨어질 범죄 행위.

물론, 아무리 이 세계의 기업가들이 지닌 힘이 강력하다고 진짜 국가원수가 아닌 만큼 사형까진 힘들지 몰랐으나 그들이 지닌 힘을 동원한다면 정말 죽는 것보다도 더한 지옥을 살게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가씨께서 오시는 군요. 이 얘기는 이쯤 하고 잠시 돌아가 쉬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오셨으니 곧 축하연이 진행될 겁니다.”

“예. 그렇게 하죠.”

서령이 유진혁 회장과의 인사를 끝마쳤는지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에아임과 베일라는 애쉬의 말을 가볍게 넘겨듣고는 서령을 반겼다. 애쉬도 한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아, 애쉬! 이제 얘기도 어느 정도 끝났는데, 와인이나 한 잔 할까요?”

“…그래. 오늘은 과음 하지 말고.”

“정말, 안 해요!”

자리로 되돌아온 뒤 서령의 장난스런 제안에 대답하는 애쉬.

에아임과 베일라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며 그의 말을 부정했지만 어째서일까.

애쉬는 가슴 속에 계속해서 그 불안의 잔류감이 남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감은 맞아 떨어졌다.

[……하여, 유성 그룹은 이번 분기를 총 4.2%의 성장률을 보이며 마무리 했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 콰아아앙!!!

“꺄아악!!”

“뭐, 뭐야!!”

“가드! 가드!!”

“무슨 일이야!!”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는 축하연.

폭발로 인해 먼지가 떨어지는 천장 아래서 온갖 비명소리와 경비를 찾는 소리, 그리고 혼란에 빠진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꿰뚫었다.

[아아.마이크 테스트. 잘 되고 있는 건가?]

[예.]

[좋군. 자자, 그럼 지금부터 연회장 내의 하객 분들께서는 제가 하는 말에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서로 죽여주십시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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