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5. 후계경쟁(39)
* * *
파박!
애쉬가 있던 곳을 지나쳐 바닥과 벽에 박혀 들어가는 바늘들.
몸을 던져 그것들을 피한 애쉬는 그 짧은 체공 시간 속에서 이상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박힌 바늘들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곧 액체처럼 바닥에 퍼져버리는 것이다.
‘뭔….’
탓, 몸이 바닥에 닿기 전 바닥을 짚고 튕기듯 일어선 애쉬는 다시 한번 액체로 변한 바늘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젠 움직이기까지 한다고?’
이제는 바늘들이 변한 회빛 액체가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타다다당!
자신들의 동료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듯 물러난 애쉬에게 계속해서 쏟아지는 총탄들.
비처럼 쏟아지던 총탄들을 피하면서도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에 계속해서 시선을 주던 애쉬는 곧 그것이 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처음에는 그저 바늘이 액체가 됐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신경을 집중하자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핏 보면 액체처럼 보이는 저것은 액체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 무척이나 작은 무언가의 집합이었을 뿐.
“왜, 그게 뭔지 궁금한가?”
쏟아지던 총탄을 피하던 애쉬가 계속해서 그것에 시선을 향하는 것을 확인했는지 조인 디아벨이 하하, 웃으며 물어왔다.
그가 입을 열어 묻자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사격.
자신들의 상사인 조인 디아벨과 애쉬에게 대화의 여유를 주기 위함인지 이윽고 완전히 끊긴 사격은 총탄을 피해 몸을 바삐 움직이던 애쉬로 하여금 조인 디아벨과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애쉬는 가만히 선 채 그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조인 디아벨은 천천히 움직여 자신이 창처럼 던졌던, 그리고 애쉬를 향해 수천에 달하는 바늘들을 쏘아냈던 매끈한 막대를 향해 움직였다.
어느새 꾸물거리며 움직이던 회빛의 액체 비슷한 무언가는 원래의 위치, 그러니까 가운데의 얇은 심이 드러난 막대에 가까워져 있었다.
조인 디아벨은 자신의 발밑에 위치한 막대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이건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집어든 막대의 끝으로 다가온 회빛 액체를 콕 찍는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막대를 타오른 회빛 액체가 심이 드러나 있던 막대의 빈 곳을 채워 넣었다.
빈 곳을 완벽히 다시 채워 넣으며 원래의 매끈한 모습을 되찾은 막대.
조인 디아벨은 자신이 들고 있는 막대를 내려다보며 애쉬에게 물었다.
“방금 바닥을 기어오던 것들. 그게 뭔지 아나?”
“…….”
“뭔가 대답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야박한 친구로군. 뭐, 됐어. 가만히 있는 걸 보면 궁금하긴 한 걸 테지.”
애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조인 디아벨은 혼자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떠들더니 막대를 들어 올렸다.
“자, 보게.”
샤르르륵. 매끈한 막대를 이루고 있는 무언가는 이번엔 모래와도 같은 모습으로 조인 디아벨의 팔을 타고 올라가더니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팔 전체를 감싸는 회색 건틀릿과도 같은 모습.
분명 액체, 그리고 모래와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으나 이제는 무척이나 견고한 느낌의 건틀릿으로 형상을 바꾸고 있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
건틀릿으로 변한 그것의 주먹을 한 차례 꽉 쥐어 보인 조인 디아벨은 막대와 건틀릿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정체를 밝혔다.
“그들은 이걸 나노머신이라고 하더군.”
“…나노머신?”
“그래. 신기하지 않나? 이 건틀릿, 이 막대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로봇이라는 게.”
“…….”
애쉬는 차마 조인 디아벨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방금 막대가 움직여 하나의 건틀릿을 만든 참이다.
저런 것을 보고도 신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애쉬는 그 나노로봇이라는 것들이 팔을 타고 오르며 건틀릿을 만든 순간부터 온 신경을 거기에 빼앗긴 차였다.
멋이고 뭐고 따지기 전에 너무 영화 속 그래픽으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아닌가.
“아주 복잡한 기능까지 구현해낼 수는 없지만, 신경 인터페이스와 동기화하면 이렇게 모양을 바꾸거나, 이렇게 움직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조인 디아벨은 애쉬의 정면에서 시연이라도 하듯 그 나노머신이라는 것을 움직여 건틀릿의 모양을 바꾸기도 하고, 또 건틀릿을 이루고 있던 것을 회수하여 칼 한 자루를 만들어 보이는 등의 기능을 선보였다.
처음에는 신기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애쉬였으나 곧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친절히 가르쳐주고 보여주는 거지?
아무리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곤 하지만 이미 양쪽 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뽑아든 상황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은 프로로서의 기본.
오랫동안 용병 생활을 해왔다는 조인 디아벨이 그런 것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애쉬가 그런 눈치를 보이자 그를 읽은 조인 디아벨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설명해주는지 궁금하겠지? 그 이유는 전에도 말했던 것의 연장선이야, 친구.”
“전에 말했던 거?”
“그래. 파이트 클럽에서도 말하지 않았나. 실력을 보고 괜찮으면 내가 소속된 곳에 스카웃할 수도 있다고.”
그 얘기였나.
그 말을 들은 애쉬는 곧 조인 디아벨이 보인 행동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쉬를 자신이 속한 조직에 스카웃 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굳이 나노머신이니 뭐니 하며 설명한 이유도 그를 스카웃할 조직의 기술력과 규모 따위를 대충 짐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겠지.
조인 디아벨의 의도대로 애쉬는 그가 속해있다는 조직이 꽤나 대단한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술을 개발할 정도라면 그 재력과 연구진의 규모도 상당할 터였으니.
조인 디아벨은 애쉬에게 얘기를 계속했다.
“짧지만 본 자네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 처음 먹은 한방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솔직히 나로서도 따라할 엄두가 안 날 정도였어.”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속도로 달려들며, 쏟아지는 총탄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고, 또, 그렇게 발사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나노머신의 투사체조차 반응하여 피해냈다.
자신의 개조 신체를 믿고 어느 정도 받아내며 뚫는 것이라면 모를까, 저런 식으로 완벽하게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 있는 조인 디아벨로서도 불가능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속한 곳으로 오게, 친구. 받아들인다면 자네와 그 주변인의 안전 정도는 보장할 수 있으니.”
“나와 내 주변인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그래.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의 계획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야. 자네만 동의한다면 당장 저쪽의 후안도 멈춰주지.”
조인 디아벨이 슬쩍 시선을 서령과 다른 일행이 위치한 개인실 쪽으로 돌렸다. 그곳의 입구는 후안이라 불린 악마 가면과 남자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유성 그룹 측 인원들과 무어라 떠들고 있을 뿐 당장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애쉬가 조인 디아벨과 이런 얘기나 떠드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 곧 저쪽에서도 싸움이 시작될 것이었고, 애쉬는 그 전까지 이 자리를 끝내야했다.
저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여서 끝내든, 조인 디아벨과 다른 놈들을 모조리 쳐 죽이든.
거기까지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려던 애쉬였지만, 그는 곧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거….’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 재력, 기술력, 그리고 뛰어난 실력자들이 가득한 부대까지.
조인 디아벨은 분명 자신이 속한 곳에서 실력만 두고 본다면 중하위권이라고 했던가.
그 모든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애쉬가 알고 있는 어딘가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회사’
여태껏 그가 상대했던 모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과 신체 능력을 갖고 있던 ‘아델’, 그리고 땅거미 부대가 속해있던 곳이다.
설마 조인 디아벨, 그리고 가면의 남자들이 속해있는 곳이 바로 그곳일까?
애쉬는 정말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회사’의 흔적을 찾은 것 같았다.
“그 제안에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음,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주겠네.”
“네가 소속된 조직, 이름이 뭐지?”
“아, 그게 궁금했나. 들으면 분명 놀랄 거야, 친구.”
조인 디아벨이 그 정도는 대답할 수 있다는 듯 반응했고, 애쉬는 그의 입에 신경을 집중했다.
정말로 그가 속한 곳이 ‘회사’일 것인가.
그러나 애쉬의 기대와 달리 조인 디아벨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회사’라는 명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속한 곳의 이름은 ‘웃는 악마’라고 불리고 있지. 아마 자네도 들어봤을 걸?”
“…웃는 악마?”
“그래.”
“아.”
조인 디아벨은 자신이 속한 곳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애쉬는 듣도 보도 못한
그 이름에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조인 디아벨만 한 녀석의 실력이 그 안에서는 중하위권에 불과한데다, 나노머신이라는 것을 만들어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곳이라면 ‘회사’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아닌 것이다.
그런 애쉬의 표정을 읽은 조인 디아벨이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 애쉬를 쳐다봤다.
“음, 놀란 표정이 아니군.”
“그야 전혀 안 놀랐으니까.”
애쉬가 대답했다. ‘웃는 악마’라고 했나? 조인 디아벨은 자신이 속한 곳이 무척이나 유명하며, 그런 곳에 속한 것을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애쉬는 그런 촌스러운 이름의 조직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허, 아니. ‘웃는 악마’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 연방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몰라. 제안은 거절이니까 다시 시작하자고.”
원하는 얘기를 들었으니 더 이상 대화할 필요는 없다.
조인 디아벨의 말을 끊은 애쉬가 내리고 있었던 단검과 권총을 다시 치켜들었다.
스카웃 제안?
그딴 건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어디에 소속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가면을 쓴 채 이런 곳이나 테러하고 다니는 놈들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구린내가 풀풀 나는 짓거리밖에 안 하겠지.
“어떻게 이쪽 일을 하면서 ‘웃는 악마’를 모를 수가….”
“‘회사’인줄 알았더니,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당황한 듯한 느낌의 조인 디아벨을 두고 애쉬가 중얼거렸다.
나노머신에 의한 예상치 못한 공격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게 전부다.
어서 여길 끝내고 서령 쪽도 마무리 지은 뒤 손이 닿는 한계까지 유성 그룹의 중역들을 구한다.
그럼 서령이 후계 경쟁의 승리자가 되는 게 더 수월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조인 디아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애쉬의 움직임을 뚝 멎게 만들었다.
“‘회사’? 자네가 어떻게 그 존재를 알고 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