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5. 후계경쟁(42)
* * *
“시시하긴.”
애쉬는 몸과 머리가 분리된 악마 가면, 후안과 그 부하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놈은 분명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을 실력자였지만, 그렇다고 그와 마찬가지로 악마 가면을 쓰고 나타났던 조인 디아벨에 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전력으로 움직인 애쉬의 공격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한 것을 보면 같은 악마 가면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의 실력차는 제법 있는 것 같다.
조인 디아벨처럼 완전히 전신을 갈아치운 것은 아닌 듯 잘려나간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확인한 애쉬는 곧장 다음 장소로 움직였다.
타다다당!
악마 가면이 던져대던 폭발물의 소음이 사라지자 더 자세히 들려오는 총격음들.
아직 잔당이 남아있는 것 같으니 전투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먼저 정리한다.
*
“커헉…!”
날 길이가 기껏해야 한 뼘도 되지 않는 군용 대검.
하지만 그 짧은 날이 빛을 발하자 두터운 인간의 목이 단숨에 날아간다.
총격음이 들려오던 장소로 향한 애쉬는 곧 가면의 남자들과 전투 중이던 베일라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녀를 도와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고맙습니다. 신세밖에 안 지는군요.”
옆구리를 짚은 베일라가 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애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애쉬나 되니까 쉽게 목을 날려버린 것이지, 경호원들 중에서도 제법 실력이 뛰어난 편에 속했던 베일라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듯, 몸 곳곳에 상흔이 남아 있었다.
악마 가면이 아닌 일반 가면의 남자들 또한 만만치 않은 이들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베일라의 감사 인사를 가볍게 받아넘긴 애쉬가 보이지 않는 다른 일행의 행방을 물었다.
설마 벌써 당한 건 아니겠지.
“감사 인사는 됐어. 그보다 아가씨는?”
“전투가 일어남과 동시에 에아임 수석비서, 빌헬름 씨와 후방으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회장님 측으로 합류하라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타앙!
합류를 마쳤을 것이라 말하려던 베일라가 들려온 한 발의 총성에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숫자가 많고, 무장이 더 좋은 유진혁 회장 쪽은 이미 정리가 됐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부 끝난 게 아니었나?
동시에 눈을 맞춘 애쉬와 베일라는 발걸음을 빨리해 총성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둘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적과 아군의 교전 따위가 아니었다.
“아아아악!!”
“대답하라고!!”
“히익! 사, 살려줘!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얼굴로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서령과 그녀가 겨눈 권총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유진혁 회장을 향해 살려 달라 비는 유선혁.
유선혁의 옆에서는 안 그래도 허벅지에 총을 맞았던 유상혁이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설마 아가씨가 쏜 건가?”
애쉬가 상상도 못한 광경에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영화를 보면 복부에 총을 맞고도 잘 걸어 다니는 주인공들이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배와 가슴은 중요 장기들이 밀집된 곳. 어딘가를 총탄에 잘못 맞기라도 하면 그대로 사망할 수도 있는 기관들이 있는데도 그곳을 쐈다는 건 정말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일단 저는 이사님을 말려보겠습니다.”
“어, 그래.”
베일라가 여전히 분노의 불꽃을 꺼뜨리지 못하고 있는 서령을 향했고, 애쉬는 그런 그녀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숫자가 조금 줄어든 유진혁 회장의 경호원들과 비서들.
빌헬름은 서령의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고, 유진혁 회장은 아까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얼굴로 서령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쉬 같은 경우에는 허벅지에서도 위험하지 않은 부분을 쐈지만, 서령은 정말 위험할 수 있는 부분에 사격을 가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정말 애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인간 군상들이 아니었다.
“이건….”
드물게도 애쉬가 심각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기계 부품들과 인간 가죽을 쓴 머리들.
부서지거나 총탄 자국이 난 채 바닥을 구르는 머리들은 그 숫자도 여럿이었고, 때마침 유진혁 회장 측에서 줄어든 인원수와 비슷했다.
‘설마 인간형 안드로이드인가?’
시 정부에서 제정한 법률이 아니라 그보다 위, 연방에서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일명 휴머노이드의 사체로 보인다.
인간의 가죽을 썼을 뿐인 기계 더미에 사체라는 말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외에는 따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렇게 지칭하기로 했다.
그것을 한 차례 둘러본 애쉬는 다시 한번 유진혁 회장에게 시선을 돌린 채 생각했다.
‘사건이 터져서도 크게 긴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
일반적인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휴머노이드들의 호위.
경호원 뿐 아니라 비서의 것으로 보이는 사체도 있는 게, 유진혁 회장이 대동하고 다니는 인원들의 대부분, 혹은 전부가 인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 같았다.
그렇다면 못해도 십수 명의 안드로이드가 호위하는 셈이니 무서울 게 없었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계들의 호위를 받으면 폭발물이 터진다 한들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으로라도 폭발을 막아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을 눈과 머릿속에 담아둔 애쉬는 다음으로 서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정하십시오, 이사님!”
“당장 놔요!!”
“진정하세요!”
“다, 당장 이 미친년을 말려!”
“그쪽은 좀 닥쳐!”
“사, 살려줘…. 이러다 진짜 죽어. 죽는다고….”
분노한 서령에 의해 난장판이 된 상황.
서령은 베일라와 빌헬름이 말리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총구를 두 형제에게 향하며 위협하고 있었고, 유선혁은 거기에 기름을 붓질 않나, 총에 맞기 전까지만 해도 한창 기세 좋았던 유상혁은 누군가 치료라도 해달라며 신음하고 있었다.
애쉬는 일단 저곳부터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당장 서령의 뒤편으로 향해 그녀가 들고 있던 총을 뺏어들었다.
그러자 분노의 눈길을 돌렸던 서령이 애쉬를 발견하곤 악을 질렀다.
“애쉬? 왜 말리는 거예요!! 이 새끼들은 당장 죽여도…!!”
“흥분부터 좀 가라앉히지 그래. 이러다 말리는 아군도 쏘겠어.”
“됐으니까 당장 내 총이나 내놔요!!”
애쉬의 말에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서령.
아니, 애쉬마저 자신을 말리자 더 흥분한 듯 그에게 달려들어 총을 뺏으려 했지만, 애쉬는 그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먼저 사과하며 손을 뻗었다.
“이거 안되겠네. 미리 사과한다. 미안.”
쫘아악!
듣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크게 울리는 소리.
전에 없이 분노한 서령에 의해 소란스러웠던 사위가 순간 적막에 빠져들었다.
“헉….”
“…애쉬 씨.”
놀란 빌헬름과 베일라가 걱정스런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가 돌아간 서령에게 물었다.
“어때, 정신이 좀 들어? 아직 부족하면 한 대 더 때려줄 수도 있는데.”
“…….”
한 손으로 맞은 뺨을 감싼 서령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뺨을 맞으며 안이 살짝 찢어졌는지 입술을 타고 선혈 한 줄기가 흐른다.
그것을 본 애쉬는 자신이 힘 조절을 잘못했나 싶었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에 그런 생각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감정부터 가라앉히고 얘기하자고.”
“…어째서.”
“응?”
“어째서 말리는 거예요…? 어차피 저희랑은 적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든 상관없는 게 아닌가. 울분을 꾹 참은 서령이 물어왔다.
그녀는 진심으로 애쉬와 빌헬름, 베일라가 말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듯 했다. 지금 그녀가 보이고 있는 눈물은 빰을 맞았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나 고통이 아닌 분에 못 이겨 나오는 눈물이었던 것이다.
“어째서냐고?”
“네!! 왜 말리는 거냐고요!! 당신이라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라고 생각해?”
“그걸 제가 어떻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오는 애쉬에게 서령이 다시 한번 흥분해서 외쳤다. 대체 뭣 때문에 그녀가 이렇게까지 분노한 걸까.
이유를 생각하면서도 애쉬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장난기를 빼고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저 놈들을 불쌍히 여겨서 말리는 것 같아? 지금 나도 당장 저 놈들을 못 패 죽여서 안달인데?”
“그럼요? 그럼 어째서요?”
“그걸 생각하지 못하니까 한 대 맞은 거야.”
애쉬도 당연히 유선혁, 유상혁 저 두 놈들을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실제로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실행할 생각이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서령을 말린 이유는 당연했다.
저 둘이 아니라 유서령, 그녀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일전에 자신을 해하려던 인간을 살해하고 한참을 우울해했던 그녀였다.
또, 제 형제자매, 부모나 조부와 달리 인간성이 넘치는 모습이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그녀였고.
그런 그녀를 생각한다면 지금 한 순간의 충동에 이끌려 다시 슬픔에 빠질 일은 말리는 게 맞지 않겠는가.
평소의 생각이 깊은 그녀였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 이유였으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정신이 빠진 지금의 서령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방법이 다소 거칠긴 했지만, 나름 그녀를 생각해서 나온 행동.
그러나 애쉬는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시시콜콜 설명할 만큼 수 있을 만큼 낯짝이 두꺼운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걱정해서 말린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
애쉬가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곤 넘어가려하자 다시 분노하려던 서령이었지만, 재빨리 그녀에게 붙은 빌헬름과 베일라가 애쉬의 내심을 풀어 말하며 달랬다.
“이사님! 애쉬 씨도 이사님을 생각해서 그런 걸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진정하시고….”
“맞습니다. 부끄러워서 말 못할 뿐이지 분명 이사님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빌헬름과 베일라가 서령을 달랬고, 거기서 등 돌린 애쉬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는 어디 있어?”
“…….”
에아임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 애쉬의 물음.
흥분을 점차 가라앉혀가던 서령이 애쉬의 말에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양 멈췄고, 빌헬름과 베일라도 잠시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서령과 빌헬름은 그의 최후를 직접 목격했고, 베일라는 그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만으로 어찌 됐을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던 빌헬름과 베일라 대신 가라앉은 목소리의 서령이 애쉬의 물음에 답했다.
“…죽었어요.”
“뭐?”
애쉬가 서령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서령은 애쉬에게 말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되새기듯 다시 한번 대답했다.
“…죽었어요, 에아임은.”
죽었다고? 그 아저씨가?
대답을 들은 애쉬는 어째서 서령이 그토록 분노하고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반응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 에아임의 최후를 목격했겠지. 그렇다면 저렇게 분노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욱 이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테러와 그로 인해 사망한 자신의 가족 같은 인물.
하지만 이번 테러에 연관돼 있을 게 분명한 형제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면 미쳐 날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뒤 진짜 가족이라고 할 만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인물은 없는 애쉬였지만, 지구에서 자신의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했다면 분명 그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감하면서도 애쉬는 속으로 고개 저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결과적으로 이렇다 한들 저렇다 한들 정신을 다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에는 다를 게 없었다. 아직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인 디아벨, 그 녀석이 3구역의 담당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앞서 처치한 악마 가면, 후안이 다른 한 구역을 맡고 있었을 테니 아무리 못해도 한 구역을 더 담당하는 놈이 있다는 뜻이다.
막 에아임을 잃은 서령에겐 너무 가혹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감정에 휘둘려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애써 서령에게서 눈 돌린 애쉬는 빌헬름과 베일라에게 죽어가는 유상혁의 치료와 에아임의 사체 회수를 부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 끝나면 모이자고. 저기 저 놈들 말고도 얘기를 들어봐야 할 녀석이 있으니까.”
안쪽까지 정리가 끝났으니 이제 조인 디아벨, 녀석을 데려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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