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21화 (121/230)

〈 121화 〉 5. 후계경쟁(45)

* * *

“…어릴 적, 제게 에아임을 붙여준 건 분명 회장님이셨죠.”

“그래.”

“어째서죠?”

“뭐가 말이냐.”

“어째서 에아임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제게 숨기신 거냐구요.”

서령은 유진혁 회장의 비서들이 한 자리에 같이하고 있음에도 말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물었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꿈의 나라에 살던 그녀는 이제 현실을 살고 있었다.

아비가 죽고 가족과도 같았던 비서가 죽었다.

심지어는 죽은 비서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형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였다는 게 밝혀진 지금, 그녀가 끝없이 오르고 있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개인실에서 애쉬가 한 차례 말리지 않았다면 이미 유진혁 회장에게도 그 분출할 곳 없는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을지 몰랐다.

침착한 척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가슴 속에 묻은 서령의 물음.

그러나 유진혁 회장은 그런 서령의 감정을 읽었음에도 과거처럼 자애의 가면을 쓴 채 그녀를 위로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숨기면 안 되느냐?”

“네?”

“에아임, 그 아이가 안드로이드였다는 것으로 변하는 게 있느냐, 이 말이다.”

“그건.”

딱 잘라 말하는 유진혁 회장의 목소리에 서령이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에아임의 정체가 사실은 안드로이드였다는 사실로 인해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서령과 에아임이 쌓아온 신뢰와 추억은 모두 현실이었고, 또 에아임이 서령을 위해 목숨 바친 것도 모두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서령은 분노만큼이나 자신의 가슴 속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불안이었다.

에아임 펠튼은 그녀의 조부인 유진혁 회장과 그 밑에 존재하는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십수 년 간 유서령이란 인간을 위해 일해 왔으며 이제는 목숨까지 바쳐 그녀를 구한 에아임의 모든 행동이 그저 프로그래밍 된 사고와 행동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그녀가 마지막 가족이라고 생각한 에아임의 모든 애정과 정성, 그리고 희생이 모두 기술자들의 설계에 의한 것이었다면?

자신의 가슴 속, 불안이라는 감정을 발견한 서령은 그런 생각이 들자 온 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불안 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 자신은 유진혁 회장에게 그 정체를 숨긴 책임 따위를 묻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유진혁 회장과의 대화에서 어떻게든 에아임 펠튼이라는 안드로이드가 아닌, 한 인간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유진혁 회장의 입으로, 에아임 펠튼이란 존재는 자유롭게 사고하는 한 명의 인간이나 다름없으며, 여태까지 유서령과 함께해온 모든 것은 그 인간의 의지였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유진혁 회장이 그 모든 감정을 읽고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닿은 서령은 자신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하나조차도 거짓이라면 어떡하지?

마지막으로 그녀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던 에아임 펠튼이라는 기둥이 무너져버리면, 서령 자신마저도 무너질…….

“추워? 왜 그렇게 떨고 있어?”

턱. 뒤에서 다가온 손길이 서령의 어깨에 닿았다.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던 서령은 고개를 돌려 그 따뜻한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대충 만든 붕대 따위를 감고 있는 손과 거기에 이어지는 몸을 따라가면 어느새 다가온 잿빛 머리칼, 진청색 눈동자의 해결사가 있다.

그를 발견한 서령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가슴 속을 좀먹던 불안감이 천천히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이리도 빛날 수 있을까.’

주변에 있으면 그 존재를 발견하지 못할 수가 없고,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전해준다.

누가 봐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척척 해내지 않나, 게으를 때도 있긴 하지만 할 때는 누구보다도 칼같이 정리하는 게 바로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태양과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애쉬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을 터였다.

그를 발견하고 잠시 멍해졌던 서령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애쉬는 인간이 맞죠?”

“뭐?”

그 물음을 들은 애쉬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서령 본인이 말하고도 느꼈지만, 정말로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대체 자신은 무슨 대답을 바라고 이런 것을 물은 것일까.

스스로도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곧 그것을 취소하려던 서령이었지만, 황당한 표정을 지었던 애쉬는 언젠가 비슷한 물음에 내놓았던 대답을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갑자기 무슨 질문인진 모르겠지만 저번에도 말했잖아. 난 100% 순수 인간이라고.”

“아, 그랬죠.”

“그래.”

상황이 다름에도 저번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한 태도와 대답.

강화 시술도 받지 않은 순수 인간이라는 애쉬가 어떻게 그처럼 움직일 수 있는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서령은 그 대답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

“슬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죠.”

빌헬름과 유진혁 회장의 비서들이 각자의 단말기와 연결 단자로 내부 시스템에 접속했다. 방화벽을 바로 눈앞에 둔 상황.

시스템을 장악한 상대방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방화벽을 건드는 순간 그들의 침입을 눈치 채겠지만, 이곳으로 통하는 입구는 애쉬와 베일라를 비롯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

경호원들을 믿고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럼.”

눈을 감고 집중한 상태의 빌헬름이 가장 먼저 방화벽에 손을 댔다. 그와 동시에 유진혁 회장의 비서들도 곧장 달려들어 보안을 해체한다.

상대방도 막기 위해 시간을 끌며 이곳 통제실을 공격해올 테니 이제부터 타임어택 시작이었다.

곧장 작업을 들어가는 빌헬름과 비서들이었으나,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이거, 어지간히도 꼬아놨습니다.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밖에서 충분히 막아줄 수 있을 테니 믿고 가죠.”

긴장에 딱딱하게 굳은 비서의 목소리에 빌헬름이 대답했다.

베일라와 애쉬를 비롯한 수십의 경호원들.

솔직히 다른 경호원들은 좀 못미더웠지만, 검을 되찾은 애쉬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그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이거 일단 폐쇄 회로 쪽부터 복구해야겠어.’

작업을 시작한 지 일 분. 자신이 맡은 파트를 마친 빌헬름이 생각했다.

진척이 생각보다 느리다. 다른 비서들이 손대고 있는 부분을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폐쇄회로를 복구해 CCTV를 보며 적들이 다가오는 경로와 무장 상태, 그리고 기타 유력 인사들의 안위를 살피는 것도 중요했다.

빌헬름은 곧장 의식을 돌려 폐쇄회로 쪽에 손을 댔다. 그러자,

‘어, 막아?’

즉각적으로 상대방의 반응이 돌아온다. 저택 내의 보안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으면서도 폐쇄회로 쪽에도 신경 쓸 새가 있는지 빌헬름이 부수려고 했던 쪽의 경계가 뒤틀리며 변화했다.

말 그대로 ‘폐쇄’기에 방화벽이 존재하지 않는 폐쇄회로의 입구 자체를 뒤틀어 막는 수법.

상대방도 자신들의 숫자나 무장 등의 정보를 넘기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여기는 어때.’

빌헬름은 회로의 입구에서 뱅 돌아 다른 곳에 구멍을 뚫기 위해 손을 댔다. 하지만 이번에도 칼같이 반응이 돌아온다.

그 다음으로 다른 곳을 한번 더 찔러보지만 역시나 순식간에 반응해 막는 상대방.

정규 루트가 아닌 곳의 침투 공작은 이렇게 빨리 알아채기가 쉽지 않은데, 역시나 상대방은 대단한 실력자인 게 분명하다.

그것을 느낀 빌헬름은 갑자기 오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하핫.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작업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B­1 루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물어오는 비서에게 얼버무린 빌헬름은 비서의 통제에 따라 보안 시스템을 복구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도 폐쇄회로의 얼굴모를 상대방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공격과 방어의 연속.

빌헬름이 어찌어찌 구멍을 하나 뚫는가 싶으면 금세 막아버리길 반복한다.

‘재밌네.’

이게 얼마만일까. 이런 해킹도 테니스나 탁구처럼 오고 가는 공방이 있어야 재밌는 법이다.

상대를 찾을 수가 없어 이런 식의 공방을 펼쳐본 게 얼마 전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된 빌헬름은 이런 작업이 재밌게까지 느껴졌다.

“일단 F­5번 복구 완료했습니다! 상대방의 반응이 조금 느려진 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이쪽보다 소수인 것 같은데, 계속 작업하면 제대로 중앙 시스템까지 복구를…….”

‘그거 나랑 싸우고 있어서 느려진 거라고!’

비서들의 목소리에 빌헬름이 속으로 소리쳤다. 저들은 지금 폐쇄회로 쪽에서 오가는 공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매 초마다 수십 번의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는 빌헬름과 상대방의 싸움은 애쉬의 움직임을 보는 것처럼 전문 프로그래머들의 시선에서 봐도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공방이 계속되길 몇 분. 이제 슬슬 신경을 보인 시스템 쪽으로 돌릴 법도 한데 상대방은 여전히 빌헬름과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분명 그쪽도 상대를 찾기 힘든 실력자일 텐데, 이렇게까지 싸움이 길어지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빌헬름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한번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고…!”

이제는 빌헬름과 자존심 싸움의 전장이 된 폐쇄회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집중한 빌헬름이 이를 악물고 공방에 전념했다.

* * *

“아직은 조용하네.”

“예. 방금 막 작업을 시작했다니 아마 상대방도 이쪽으로 공격을 올 겁니다. 여기서 보안 시스템을 복구하는 순간이 바로 저들의 계획이 실패하는 순간일 테니까요.”

일부러 자신들의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객들의 무리를 찢어놓고 살생부에 따라 죽여 가던 놈들이었지만, 이곳에 다시 큰 무리가 생긴데다 보안 시스템을 복구해 격벽을 내리려 하고 있으니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 통제실 입구에서의 싸움이 최후의 전장이 되겠지.

분명 상대방도 전력을 모아 공격해올 테니 시간이 좀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그 부단장이란 놈도 오겠지.’

조인 디아벨이 경고했던 검은 머리칼의 악마 가면.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애쉬를 직접 상대하고, 그의 움직임을 본 조인 디아벨이 그렇게까지 경고할 정도라면 분명 보통 놈은 아닐 것이었다.

게다가 조인 디아벨 같은 놈들을 수십이나 밑에 두고 있을 정도라면…….

‘최소한 아뎀, 그 꼬맹이 이상이겠군.’

애쉬가 여태껏 상대해봤던 이들 중 가장 빠르고, 강하고, 실력이 뛰어났던 ‘땅거미 부대’의 아뎀.

녀석은 말도 안 되는 개조 신체로 애쉬의 움직임을 일순간이나마 거의 따라잡을 수준이었는데, 이번에 올 녀석은 과연 어떤 놈일까.

총잡이?

아니면 말도 안 되지만 애쉬 자신처럼 칼잡이일까?

원래는 게임이었던 세계이니만큼 칼잡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무척이나 재밌을 터.

상대방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단 애쉬는 곧 기대어 있던 벽에서 떨어져 똑바로 섰다.

“왔네.”

“…적입니까?”

“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무거운 발소리들.

말 그대로 전력을 모은 듯 이곳 중앙 통제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의 숫자에 모자라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숫자의 적이 오고 있었다.

애쉬의 대답을 들은 베일라가 무기를 꺼내들고 대기하던 다른 경호원들에게 외쳤다.

“다들 준비하십시오! 놈들이 옵니다!”

“…진짜 왔군.”

“망할. 유성 그룹 경호원이라길래 편하게 돈이나 받아먹는 줄 알았더니.”

경호원들 중 섞여있던 몇 명의 슬럼의 갱들, 레이라의 부하로 추정되는 이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긴장한 기색으로 무기를 꺼내들고 복도 쪽을 경계했다.

그리고 곧 애쉬가 말한 대로 수십에 달하는 적의 무리가 나타났으며,

‘저 놈은.’

애쉬는 그 가장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검은 머리칼, 악마 가면의 남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

‘……그때 마주쳤던 녀석인가.’

검은 머리칼의 악마 가면.

그 또한 언젠가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사고가 날 뻔 했을 때 마주쳤던, 수상할 정도로 얼굴을 가린 남자를 기억했다.

그 날 느꼈던 감각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둘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멈춘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