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5. 후계경쟁(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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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빨아들일 듯한 까만색이면서도 반짝이는 서령의 눈동자와 달리, 탐욕스럽게 집어 삼키기만 할 뿐 그 무엇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검은 눈.
애쉬는 그 눈만 보고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놈은 쓰고 있는 악마 가면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놈이다.
‘어지간히도 많이 죽였나보군.’
딱 느껴지는 기세부터가 그랬다. 살기가 완전히 몸에 배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버린 인간.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를까.
사실 처치한 인간의 수로 따지자면 애쉬도 할 말이 없긴 했지만, 적어도 그는 저 악마 가면이 풍기는 분위기처럼 일상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애쉬와 악마 가면 간에 있었던 찰나의 시선 교환이 끝나고, 경호원들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는 가면의 무리.
저택 중앙의 복도가 워낙 넓었기에 양측을 합쳐 총합 일백에 가까운 숫자가 대치하고 있음에도 그 공간에는 넉넉함이 있었다.
“망할, 완전히 중무장을 하고 왔잖아….”
그렇게 양측 세력이 대치 상태로 들어가자 경호원들이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저택 내를 수색하며 어떻게든 수급한 무기를 들고 있는 경호원들과 달리 상대방은 개인 화기에 더해 수류탄 따위의 폭발물까지 들고 있는 상태.
이대로 정면으로 부딪힌다면 이들은 순식간에 작살날 것이 분명하다.
경호원들도 관련 교육을 받은 나름의 전문가들이었기에 그런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고, 하나씩 시작된 암울한 분위기는 점차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애쉬가 그런 경호원들을 상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 싸우기 전부터 져 있구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닙니다.”
애쉬의 목소리를 들은 베일라가 다른 경호원들을 대신 변호했다.
숫자도 저쪽이 더 많은데, 심지어 장비에서마저 엄청난 격차가 있다.
솔직히 베일라 또한 서령과의 수 년 간 쌓은 정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를 피했을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와 다른 생활을 했던 베일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다른 경호원들은 어떻겠는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경호원들 또한 인간인 이상 이탈자가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베일라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은 애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네.”
애쉬 자신이 앞으로 치고 나가서 시선을 끌며 경호원들에게는 엄호와 방어만 맡기는 수밖에.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부딪혀 이쪽이 단숨에 쓸려버리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진다.
빌헬름의 작업을 마칠 시간도 벌어줘야 했고, 또 서령을 비롯한 다른 하객들이 당하지 않도록 통제실로의 접근 자체를 막아야 했는데, 뒤를 지키는 경호원들이 없어진다면 큰일이었다.
제아무리 초인이라곤 하지만 애쉬도 결국엔 한 명의 인간.
혼자서 수십 명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었고, 분명 그의 방어선을 뚫고 중앙 통제실까지 닿는 놈들이 나올 것이다.
‘특히 저놈이 있으면 더 그럴 확률이 높지.’
여유롭게 이쪽을 보고 선 악마 가면을 바라본 애쉬가 생각했다.
녀석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진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인 디아벨의 경고로 봐서는 분명 겉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뭔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애쉬가 한 발 나서는 것을 본 베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저들의 무장 상태라면 아무리 애쉬라도 힘들지 모른다. 몇 명도 아니고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총격을 가하는데 거기서 멀쩡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상식에 기반한 물음.
그러나 애쉬는 그 질문을 가볍게 부정했다.
“아니, 없는데.”
“예?”
“그냥 내가 가서 일차적으로 놈들을 치고, 너희는 뒤에서 총질을 한다. 그게 끝이야.”
“…그게, 무슨.”
애쉬의 심플한 대답에 베일라가 말을 다 잇지도 못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완전히 미친 짓이 아닌가.
돌아온 대답에 당황한 베일라는 그를 말리려 했지만, 애쉬는 가볍게 그녀의 목소리를 뿌리치곤 앞으로 나아갔다.
“자,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방법을 생각….”
“백날 머리 싸매고 고민해봐, 뭐가 나오나.”
그런다고 없는 게 생길 리 없지 않은가.
외부의 도움도, 추가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베일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호원들의 사이를 지나 통제실 방어 팀의 맨 앞까지 나온 애쉬.
그러나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옮겼다.
“어, 어?”
“이봐! 어딜….”
애쉬가 나아가는 걸 발견한 경호원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역시나 신경 쓰지 않고 움직인다.
점점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정면에서 대치하던 상대방 측이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10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던 것이 90, 80미터까지 가까워지고 이제는 50미터 안쪽까지 들어왔다.
이제는 일반인이라도 맨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명확히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
상대방 측은 애쉬가 홀로 다가옴에도 그에 대한 정보를 들은 듯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악마 가면의 지시가 없는 것인지 다짜고짜 사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애쉬는 걸음을 뚝 멈춘 채 상대방 진영을 훑어봤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놈들답게 기본적인 장비의 수준도 높았고, 실탄이 꽉 찬 탄창을 잔뜩 매고 있는 것이 별도의 보급도 필요할 것 같지가 않았다.
어차피 저 탄이 모두 쓰이기도 전에 전투가 끝날 테니까.
하지만 애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악마 가면도, 잡다한 일반 가면들의 무장도 아니었다.
‘확실히 장비 차이가 심하긴 한데…. 저건 뭐지?’
그것은 관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길이는 대략 2미터, 폭은 수십 센티 정도 되는 커다란 금속 상자.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는 듯 얼핏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잠금 장치가 달린 관이 무려 여섯 개나 후방에 들려 있다.
멀리서 볼 때는 사람에 가려졌던 것인지 이제야 발견한 게 이상할 정도의 부피였다.
그것을 발견한 애쉬가 입을 열어 자신의 정면,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악마 가면에게 대뜸 물었다.
“이봐, 저 뒤에 관짝은 너희가 들어갈 거라도 미리 가져온 거냐? 그런 것 치고는 숫자가 좀 적은데.”
여기서 전부 땅에 묻힐 텐데 인당 하나씩은 가져와야 하지 않겠어?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 그러나 애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질문이라고 하기도 뭐한 도발이었다.
어차피 부딪힐 수밖에 상대방에게 좋은 소릴 해봐야 뭐하겠는가. 신경이라도 긁어서 허점을 만들어내면 좋은 것이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런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그런 애쉬의 도발에도 일반 가면들은 침묵한 채 작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고, 서로의 사이에 있는 수십 미터 정도를 넘어 애쉬와 눈을 맞추고 있던 악마 가면도 낮은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혼자 나오다니, 용감하군.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주제넘은 만용?”
애쉬에게 묻는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답을 찾는 느낌.
그런 반응을 확인한 애쉬는 악마 가면이 무척이나 재미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장난이라는 걸 모르는, 분위기 깰 줄이나 아는 벽창호 같은 놈이다.
아마 짧은 대화에도 응하지 않겠지.
상대방에게서 뭔가를 캐내길 포기한 애쉬는 다른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했다.
바로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저놈은 ’회사‘에 대해서 좀 알고 있겠지.’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나름 부단장이라는 위치까지 오른 놈이니 그만큼 조인 디아벨보다 아는 것도 많을 것이다.
애초에 조인 디아벨은 스스로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 잘 모른다고 답했으니 비슷한 서열이라도 조인 디아벨보다 많이 아는 놈들이 있을 텐데, 부단장 쯤 되면 그보다도 훨씬 값진 정보를 얻어낼 수 있겠지.
그럼 가능하다면 한번 사로잡아볼까?
힘들 것 같긴 했으나 시도 정도는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정보를 캐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이렇게 서서 하는 대화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애쉬가 그렇게 결정내린 뒤 곧장 전투를 시작하기 위해 몸을 툭툭 털 때였다.
대화에는 일절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애쉬의 예상과 달리 상대방, 악마 가면 측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조인 디아벨과 다른 떨거지 하나를 처리했다지.”
“…그런데?”
나름 서열이 높은 조인 디아벨은 기억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한 쪽은 역시나 악마 가면들 중에서도 밑바닥에 있는 놈이었는지 떨거지 정도로 치부하는 물음.
악마 가면은 애쉬에게 오늘만 몇 번 들었던 얘기를 꺼내 물었다.
“그에게서 스카웃 제안을 듣지 못했나? 들었다면 어째서 거절했지? 네게 나쁠 건 없을 텐데.”
애쉬 자신의 도발 섞인 물음에는 제대로 대답도 않더니 자신이 궁금한 건 많은지 질문을 연속으로 쏟아낸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하려던 애쉬는 곧 생각을 바꿔 대답했다.
“스카웃 제안? 들었지. 제안을 어째서 거절했냐고? 그야….”
말끝을 흐리며 한 박자 쉰 뒤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가운데 손가락을 쭉 뻗는다.
그리고 최대한 재수 없게 입 꼬리를 끌어올린 애쉬가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니들 엿 먹이고 싶어서.”
“…….”
그의 대답을 들은 악마 가면이 잠시 조용해졌고, 애쉬는 그런 반응을 보며 픽 웃었다.
목소리와 말투만 들어도 벽창호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놈에게도 애쉬의 대답은 어지간히 황당했던 모양.
그렇게 몇 초 정도 애쉬를 조용히 바라보던 악마 가면은 직전의 말을 못 들은 것 마냥 무시하고 입술을 뗐다.
“…마지막으로 제안하지, ‘웃는 악마’에 들어와라. 권한이 없는 조인 디아벨이나 다른 떨거지는 명확한 조건을 내놓지 못했겠지만, 내가 건 조건은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다.”
그렇게 입술을 뗀 악마 가면은 현장에서 조건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서열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매년 지급되는 크레딧 또한 많아지고, 일정 서열까지 올라간다면 원치 않는 임무는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다.
악마 가면은 애쉬의 손에 당한 조인 디아벨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가 매년 받던 크레딧의 금액까지 정확이 얘기했는데, 그 양이 상상 이상이라 애쉬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또, 가끔 그런 녀석들이 있더군. 술과 섹스, 마약보다 목숨을 건 전투를 즐기는 미치광이들. 만약 네가 그런 경우라면 ‘웃는 악마’에 소속되는 것은 최고의 선택지가 될 거다.
너는 최소한 조인 디아벨 정도의 위치에서 시작할 테니 서열전에서 수많은 도전자들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너보다 윗서열의 강자들과도 싸워볼 수 있을 테니까.”
“오, 그건 좀 끌리는데.”
누가 봐도 장난기를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목소리로 애쉬가 대꾸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오로지 개인의 실력으로 모든 서열이 정해지는 집단이라니. 엄청나게 재밌어 보이지 않는가.
“‘웃는 악마’에 입단해라, 애쉬 론모어.”
악마 가면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제안했다.
기세를 보아 이것을 거절하면 정말로 끝. 그대로 전투 시작이다.
하지만, 애쉬는 항상 그래왔듯 상대를 엿 먹이는 것에 진심이었다.
“엿이나 먹어.”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뻗으며 다시 한번 악마 가면의 약을 올렸다.
돈도, 여자도, 마약도 필요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의 성향대로, 충동대로 움직일 뿐.
한 번 조지기로 했다면 끝까지 가는 것이 바로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이었다.
“…그게 네 대답인가.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유감이군.”
그런 애쉬의 대답을 들은 악마 가면이 예상했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천천히 그의 분위기가 뒤바뀐다.
차갑고 조용한 느낌에서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사나움으로.
그런 분위기를 읽었는지 악마 가면의 뒤에서 대기하던 가면들이 재빨리 움직여 금속 관 비슷한 물건을 조작한다.
저게 열리면 뭔가 특별한 무기가 나오겠지. 하지만,
“그걸 기다려줄 필요까지는 없지.”
스르륵.
그런 움직임에 반응한 애쉬가 먼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단숨에 발끝을 튕겨 적진에 달려들었고,그의 움직임에 반응한 일반 가면들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총격음을 퍼뜨렸다.
곧 애쉬의 뒤편에서도 경호원들이 지원 사격을 가하며 폭풍 전의 고요로 가득했던 복도는 하나의 전장이 되어갔다.
투두두두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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