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5. 후계경쟁(49)
* * *
파바바박!!
칼날이 대기를 가르면 후두둑 반으로 갈라진 수십의 벌들이 떨어진다.
한 번 이어진 칼날은 제아무리 조그맣고 빠른 벌들이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수십이 떨어졌다고? 그렇다면 수백, 수천, 수만의 숫자로 메꾸면 된다.
애쉬는 과거 이랬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급히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지만, 그럼에도 몰려드는 벌떼를 모조리 막아낼 수는 없었다.
픽.
뭔가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따끔한 느낌이 드는 순간 반응하여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예리한 통증과 함께 몸 안에 뭔가가 퍼져나가며 감각이 마비되는 것을 느낀다.
‘이런 씹…!’
애쉬는 다시 한번 피하지 못하고 쏘인 어깨의 감각에서 신경을 거두며 속으로 욕지거릴 내뱉었다.
이게 벌써 몇 발 째지?
방금 쏘인 어깨를 제외하더라도 대충 느껴지는 것만 다리, 팔, 허리 등등 열 곳에 가깝다.
심지어 같은 인공 벌이라도 독샘에 갖고 있는 내용물이 다른 듯, 어딘가에서는 타는 듯한 통증이, 또 어딘가에서는 개미가 혈관 속을 기어다니며 마구잡이로 물어뜯는 듯 간지러우면서도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것은 혈류를 타고 몸 안을 흐르며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지만, 애쉬가 적에게 입힌 피해는 겨우 일천 정도의 벌들을 베어낸 게 전부.
그나마도 애쉬라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수만에 달하는 벌떼 중 일천이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쪽의 몸은 하나인데, 몇 종의 독에 중독당하며 입힌 피해가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은 상대방과의 피해 교환이 제대로 성립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망할, 저걸 진짜 어떻게 뚫지?’
다시 한번 전력으로 몸을 움직이며 벌들을 베어낸 애쉬가 생각했다.
그의 육체 성능 탓인지 독이 퍼지는 속도도 제법 느린데다 받고 있는 영향도 아직은 크지 않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끈다면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그 말은 곧 머리가 좋으면 몸이 편해진다는 뜻이었지만, 그것은 반대로 뒤집어도 충분히 성립되는 말이었다.
바로 몸의 성능이 좋으면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는 것.
애쉬는 여태껏 몸의 성능이 워낙 좋아 전투에 있어서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몸이, 감각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모든 전투를 종결지을 수 있었으니.
쏘아진 총탄을 똑바로 보며 피하고, 튕겨내고, 베어내는 육체 능력과 수백 미터 바깥에서 실행된 저격까지 본능적으로 피해내는 믿을 수 없는 감각.
그는 어지간한 속도의 칼날이라면 피부에 닿는 순간 반응하여 몸을 빼는 것으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을 정도의 반사 속도를 갖고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몸으로 부딪히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리는 날갯짓 소리와 시야를 가득 메우는 어마어마한 물량, 원거리 공격과 폭발물조차 완벽하게 막아내는 내구성.
워낙 숫자가 많다보니 한번 포위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해도 금세 둘러싸이고 만다.
게다가 상대방은 바보라 가만히 있겠는가?
악마 가면은 이미 애쉬의 전투 능력을 경계하고 있는 듯 접근에 성공하는가 싶으면 자신 주변에 두르고 있던 벌떼를 이용해 시간을 끌고 다른 곳의 벌떼를 불러들여 다시 견제했다.
그를 천천히 말려 죽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부우우웅!!
“흐읍!”
다시 한번 몰려드는 수천, 수만 마리의 벌떼.
애쉬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최대한 밀도가 낮은 방향을 찾아 움직였고, 자신에게 가까운 인공 벌들을 모조리 베어내며 포위망을 돌파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막대한 숫자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고, 왼쪽 종아리와 허리, 그리고 검을 쥔 오른팔에 침을 맞고 말았다.
핏.
하얗던 셔츠는 독침에 꿰뚫린 곳에서 송골송골 흘러나오는 까만 피에 엉망이 된 지 오래.
온갖 독에 중독된 채 쉬지 않고 움직이다보니 퍼지는 속도도 가속된 것인지 슬슬 몸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
몸이 느려진 것을 확인한 애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라, 생각해.’
그야말로 공방일체.
저 인공 벌떼는 분명 대단한 병기였다.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쉬는 그 대단한 병기를 이긴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던가.
‘저 놈의 위에 존재한다는 네 명.’
조인 디아벨은 분명 인공 벌떼를 조종하고 있는 저 악마 가면의 서열이 5위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대인전에서는 무적과도 같이 보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병기를 공략한 놈들이 넷이나 있다는 게 아닌가.
애쉬 자신이 가진 신체 능력과 숙련도는 누가 뭐래도 비교할 상대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놈들이 해낸 것을 그라고 못할 이유는 없었다.
‘저기에도 분명 약점은 있다.’
애쉬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 벌떼를 베고 피하며 생각했다.
분명 약점은 존재할 텐데, 그게 뭘까.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저 벌떼는 금속 관짝에서 쏟아져 나왔지.’
그렇다면 저 금속 관 안에 뭔가 공략 요소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애쉬는 곧장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금속 관을 찾았고, 불과 십여 미터 밖, 벌떼를 쏟아낸 뒤 닫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금속 관을 발견했다.
일단 저것부터 확인한다.
그렇게 결정한 애쉬가 순식간에 칼날을 휘둘러 정면의 벌떼를 베어냈다.
사아아악!!
단 한번.
검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예리하게 울리고, 한 순간에 칼날이 십여 번의 빛을 반사한다.
그리고,
투두둑.
그가 검을 휘두른 경로를 따라 수십에 달하는 인공 벌들이 토막 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애쉬는 바닥을 구르는 인공 벌들의 잔해를 짓밟고 곧장 금속 관으로 향했다.
멈춰서 자세히 확인할 시간은 없다. 사고를 가속한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가며 금속 관의 안을 눈에 담았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애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텅 비어있는 내부뿐이었다.
뭔가의 장치가 되어 있지도, 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오로지 내용물을 보관만을 위해 제작된 관.
그곳에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다.
부우우웅!!
벌들의 날갯짓에 반응한 공기의 떨림이 피부에 와닿는다.
애쉬는 어느새 뺨 근처까지 다가온 벌의 침을 피하곤 바로 자리를 벗어나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많은 숫자를 보조 장치도 없이 혼자 조작하고 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
대충 보기에도 수만에 달하는 이 어마어마한 숫자의 벌떼를 일개 개인이 조작한다고?
그건 조작의 복잡함과 그것이 개인의 사고 능력으로 가능한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무리 몸 안에 관련 파츠를 쑤셔넣은 사이보그라고 해도 겨우 인간만한 기계 하나로 수만에 달하는 외부 장치에 신호를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간단한 비행만 하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 봤듯 벽을 이뤄 폭발물을 막아내거나, 독침의 독을 주입하거나, 턱을 내밀고 날아오는 등 세세한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분명 숨겨진 뭔가가 있다.
이 인공 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단서가….
애쉬는 악마 가면과 금속 관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인공 벌떼, 그 자체에 집중했다.
부우우우웅!!
악마 가면의 주변에서 떨어지지 않고 놈을 지키는 무리, 나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무리, 뒤를 덮치는 무리, 정면에서 독침을 내밀고 당장이라도 찌를 듯한 기세를 보이는 무리…….
그것들을 피하며 움직임을 분석하길 계속.
수백에 달하는 인공 벌을 썰고, 몇 번이나 다른 독침에 더 찔린다.
이제는 몸에 멀쩡한 부분보다 독이 퍼진 부분이 훨씬 더 많을 정도.
이 전투를 승리한다고 해도 무사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끝에 애쉬는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저 인공 벌떼들의 비밀을.
놈은 저 수만에 달하는 벌떼 전부를 일일이 통제하는 게 아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를 수만 개로 분할하는 미친 짓거리였으니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애쉬가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던 이유는 하나였다.
계속해서 인공 벌들의 움직임에 집중한 결과 저 복잡하게 뒤섞인 벌떼들이 보이고 있는 패턴을 모두 읽은 것이다.
지금 저것들이 보이고 있는 패턴은 총 12개.
그것을 수만의 인공 벌떼를 나눈 12개의 무리가 뒤바꿔가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저 수만의 벌떼는 총 12개의 무리로 나눠져 통제되고 있었으며, 그 무리의 구분은 패턴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즉 악마 가면은 수만에 달하는 벌떼들을 일일이 통제한 것이 아니라 총 12개의 무리로 구분하여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12가지의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수만 가지보다는 훨씬, 한참이나,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웠다.
아마 저 악마 가면은 사고 분할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놈일 터.
그러나 여기까지만 본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놈이 무리를 총 12개로 나눠 조작하고 있다고? 그런 걸 알아서 어쩌란 말인가.
그걸 안다고 저 인공 벌떼를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리를 나눠 조작하는 것이 수만 개의 신호를 동시에 보내는 작업이 어찌 가능한지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애쉬는 총 12개로 나눠 통제되는 무리를 살피던 중 그것들의 중심에서 이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부우우우웅!!
다른 것들보다 덩치가 3배는 큰, 일종의 여왕벌.
다른 벌들에게 감싸여 있었을 뿐더러 무리의 중심을 벗어나는 일이 없고, 급히 벌떼를 피해야 했기에 발견하지 못했으나 인공 벌 자체에 집중하자 한 무리의 중심에서 그것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저 여왕벌이야말로 12 개로 나뉜 무리를 통제할 수 있도록 돕는 중계기.
저것만 파괴한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능할까?’
당장 발견한 것이 한 무리의 중심부였으니, 못해도 각 무리 당 하나씩은 저런 게 존재한다는 뜻.
어쩌면 무리 당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다.
저 벌들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그것들을 모두 찾아 박살내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애쉬가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에 질문했다.
온몸은 이미 멀쩡한 부분보다 독에 중독된 부분이 더 많았으며, 그로 인해 움직임은 처음보다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전의 상태도 아닌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이후에 멀쩡할 수 있을지나 걱정해야 할 몸 상태.
성공해도 목숨이 위험할 테고, 실패하면 무조건 죽는다.
어느 쪽이든 목숨을 걸어야 할 도박.
이런 몸으로 단 한번의 실수라도 했다간 개죽음으로 끝날 도박을 성공할 수 있을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무조건 목숨을 걸어야 할 뿐.
잘못하면 진짜 죽는다.
이 자리에서 형편없이 나자빠져버리는 것이다.
애쉬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이 붕 뜬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고, 모든 것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애쉬는 순간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뭐지 이 떨림은? 이 감각은?’
이것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한 것인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자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렇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아니!
그렇다면 이건…….
몸의 떨림, 가슴의 두근거림, 정신의 고양, 그 모든 것이 공포와는 정반대편에 위치한 다른 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마저 희열을 느끼고 있는 건가?’
기쁨, 희열, 전율.
그는, 애쉬 론모어는 이 순간 분명히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쾌락을 느끼고 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그의 감정이 완전히 두 개로 나뉘었다.
희열, 그리고 두려움.
‘애쉬 론모어’와 ‘인간 이진현’, 각각이 갖고 있는 감정들.
‘애쉬 론모어’와 ‘인간 이진현’의 감정이 완전히 동떨어져버린 지금, ‘이진현’은 자신이 ‘애쉬 론모어’를 설정할 때 넣었던 성향들을 떠올렸다.
전투광, 쾌락주의, 시니컬, 장난기 등등….
게임 내에서의 선택지의 방향성을 결정하던 그것들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절정에 올라 ‘이진현’의 감정을 배제한 채 ‘애쉬 론모어’로서 폭주하고 있었다.
몸이 흥분에 떨리고, 감각과 본능이 모든 것을 이끈다.
활짝 열린 오감, 그리고 제 6의 감각이 수만에 달하는 인공 벌떼들을 모조리 담았고,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 속에서도 ‘애쉬 론모어’는 움직였다.
척.
검을 제대로 잡고, 온갖 독극물에 중독된 몸이 지르는 비명에도 참을 수 없다는 듯 활짝 웃는다.
나약하디 나약한 ‘이진현’은 그런 ‘애쉬 론모어’의 폭주에 하염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