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5. 후계경쟁 후일담(1)
* * *
고즈넉한 사무실.
대부분의 비서들도 퇴근한 시간, 이제는 몇몇 이들만 남아 서류를 사락사락 넘기고 있는 그곳에 향긋한 커피향이 감돈다.
사무실의 주인인 유진혁 회장은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자신의 수석 비서가 건네는 커피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 아이는 여전하던가, 아헤인.”
“예. 여전히 낮에는 사무실에, 저녁에는 그 해결사의 병실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아이라고 지칭할 뿐 정확히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유진혁 회장의 수석 비서, 아헤인은 그런 주인의 대답에도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저번 사건 이후로 가끔씩 물어오던 말이었으니까.
유서령.
유진혁 회장이 이렇게 사적으로 누군가에 대해 묻는 일은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녀에 대한 것밖에 없었다.
“아직도 정이 많구나.”
수석 비서, 아헤인의 대답을 들은 유진혁 회장이 중얼거렸다.
그의 생일 축하연에 일어난 테러 사건으로부터 이주일이 지났다.
유성 그룹과 유진혁 회장, 그리고 당시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모든 고위급 이사들은 지난 2주 동안 눈코 뜰 새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테러로 인해 사망한 이사급의 숫자만 수십이었고, 살아남은 생존자의 숫자도 세 자릿수에 달했다. 그만한 사건이 그룹 바깥에 알려지지 않을 수는 없다.
온갖 언론들이 유성 그룹에 일어난 테러 사건을 대서특필 했으며, 그것은 연방 전체를 넘어 유성 그룹의 손길이 닿아 있는 모든 곳에 알려졌다.
남은 이들은 그것을 수습함과 동시에 사망한 이사들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으며, 또 바깥에 증명해야 했다.
‘유성 그룹’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말이다.
서령도 그룹의 고위 이사이자 후계 경쟁의 후보로서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지킨 한 해결사의 병실을 찾는 일은 잊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어디로 출장을 나가더라도 하루의 마지막만큼은 그 병실이었으니 그쯤 되면 유진혁 회장도 서령의 마음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손녀가 스스로 깨닫고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무의식중에라도 그 해결사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흐음….”
“한창 좋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유진혁 회장은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그런 그의 심기를 읽은 비서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커피의 향으로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는 것도 잠시. 미소 짓고 있던 비서, 아헤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유진혁 회장에게 말했다.
“참, ‘웃는 악마’ 쪽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뭐라던가.”
“이번 건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하더군요.”
‘웃는 악마’라는 키워드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묻는 유진혁 회장에게 아헤인이 대답했다.
누군가 예상했다시피 유진혁 회장은 이번 사건이 터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사건의 주동자과 얘기를 마쳐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무방비하게 길을 터준 게 그였다.
후계 경쟁의 선별과 여러 이해관계를 위해서.
아무리 국제적인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웃는 악마’라도 ‘유성 그룹’에 멋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유성 그룹이 지닌 힘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했고, 또 유진혁 회장은 ‘웃는 악마’의 정체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음에도 암묵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
그런 만큼 이번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유진혁 회장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약속된 일을 벌였던 그들이 어째서 유진혁 회장에게 사죄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번에 그들이 벌인 일에 원인이 있었다.
일반 이사들이 죽어나간 것은 상관없었으나 유성 그룹의 대외 업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던 유장혁 부회장이 죽은 것.
유장혁 부회장은 이번 후계 경쟁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기에 선별을 거칠 대상도 아니었을 뿐더러 설령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버리기엔 너무 유능했다.
혈연의 정 이전에 미래의 유성 그룹을 위해 필요한 인재였단 말이다.
‘웃는 악마’가 일을 벌이는 것을 허락한 유진혁 회장이었으나, 그것은 명백히 용납의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그들의 단장이 직접 찾아뵙고 사죄드리겠다합니다.”
‘웃는 악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조금은 가벼웠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은 유진혁 회장에게 아헤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유진혁 회장이 흔치 않게도 작은 놀람을 드러냈다.
“직접?”
“예.”
단장이 직접 온다라.
아헤인의 확답을 들은 유진혁 회장은 과거 만났던 ‘웃는 악마’의 단장을 떠올렸다.
몇 년 전 보았던 선홍빛 눈동자의 악마를.
외부 활동이라곤 하지도 않는 그 인물이 어째서 갑자기 움직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성의는 보이려는 것 같았다.
“도착 시일은 아직 정해진 바가 없으나 관련 정보를 입수하면 곧장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아헤인의 말에 유진혁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것으로 됐다. 책임과 보상에 대한 얘기는 단장을 직접 만난 뒤에 해도 되겠지.
‘웃는 악마’에 대한 생각을 적당히 정리한 유진혁 회장은 곧 다른 고민거리로 사고를 전환했다.
‘후계경쟁’.
‘유성 그룹’을 이어갈 인물을 정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유진혁 회장은 지난 세월동안 지켜보았으며, 이번 사건을 통해 밑바닥까지 확인한 후계 후보들을 한 번씩 돌아봤다.
어리석고 허술한 유선혁.
가볍고 주제를 모르는 유상혁.
야망만 큰 유선화와 업무적 능력은 나쁘지 않으나 제 쌍둥이 누이에게 끌려 다닐 줄 밖에 모르는 유성혁.
그리고 마지막, 지나칠 정도로 정이 많은 유서령까지.
이들 중 누구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맞을까.
첫째인 유선혁은 회장의 자리에 앉을 인재가 아니었다. 유능한 적은 아군을 위태롭게 하나 무능한 아군은 적이 없어도 아군을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
둘째인 유상혁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 서는 자는 언제나 무게감 있게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법인데, 평소의 모습도, 지난 사건에서 보인 모습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셋째 쌍둥이 중 누나 쪽인 유선화는 야망은 있었으나 본인보다 유능한 인재들을 다룰 능력이 부족했다. 그나마도 첫째인 유선혁과 유상혁보다는 낫다고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었지 절대치가 좋다는 것은 아니다.
셋째 쌍둥이 중 동생 쪽인 유성혁은 그나마 능력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인재들도 제법 따르고, 어떤 업무를 맡겨도 크게 막히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겁이 많고 도전을 무조건적으로 피하는 성격은 유진혁 회장이 바라는 상이 아니었다.
유성혁을 회장으로 만든다면 당장 그룹을 유지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엔 도태되어 과거의 역사로 남겠지.
그리고 막내인 유서령은…….
유진혁 회장은 마지막 후보인 서령을 떠올려봤다.
나약함, 온실 속 화초.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과거의 그 부정적인 모습들이었다.
후계경쟁이 시작되고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으나 여전히 그 잔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바로 타인에 대한 정이라는 모습으로.
지금 한낱 해결사 따위의 병실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안드로이드에 불과한 에아임의 복구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모두 서령의 약점 중 하나가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기업가에게 정이라는 것은 필요 없다. 특히나 유성 그룹만한 거대 기업이라면 더욱 더 차가워져야 하고 냉혹하게 끊어낼 줄 알아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가면을 쓴 채 다가올 것이었고,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 찔러올 텐데 그런 것 하나하나에까지 눈길을 주고 신경 쓴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적어도 유진혁 회장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정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고도 쓸모없는 짓이라고.
하지만 그런 유진혁 회장도 서령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되곤 했다.
자신에겐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령이 약하고 안쓰럽기 보이기 때문일까. 계속해서 시선이 가고 끊임없이 신경이 쓰인다.
서령의 부하들은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길 마다않았다. 그녀의 경호원들도 그랬고, 불과 몇 달 전 고용한 저 슬럼의 해결사마저도 목숨을 건 결과 지금과 같은 꼴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 것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유서령이라는 인간의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무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인간답다는 것’
인간으로 가득 찬 세상이지만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그것의 존재를 서령은 누구보다도 크게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조차 한참 전부터 서령의 그 무기에 당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그는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서령을 회장으로 만든다면 그 아이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어차피 잠정 은퇴를 선언한 것은 후계경쟁이 끝난 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일단 결정하고 교육을 하며 정 아닌 것 같다면 그때 가서 생각을 바꿔도 되겠지.
유진혁 회장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변명 아닌 변명 같은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했다.
그러니까,
유서령을 회장 후보로 낙점한다.
* * *
“…늘은 제인 이사님이랑…….”
메마른 목은 마르다 못해 타는 것 같다. 배는 어찌나 허기가 지는지 당장이라도 뭔가를 쑤셔 넣으라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몸은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건지.
그런 와중에도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는 자신의 얘기를 계속해간다.
“…해서 에아임도 찾아보고 왔는데, 아직은 정확히 알 수가 없을 것 같데요……. 흐윽….”
말을 이어갈수록 흐려지는 목소리. 곧 언어가 되지 못한 목소리는 작은 흐느낌이 되어 퍼져 나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흐느낌을 들은 애쉬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명령을 내려 접착제 칠을 하기라도 한 것 같은 눈꺼풀을 강제로 떼어냈다.
“…윽.”
흐릿한 시야에 불빛이 들어오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는 눈에서부터 느껴지는 감각에 작게 신음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란 기색의 여성, 서령이 흐느낌조차 멈추고 그를 불렀다.
“애, 애쉬, 깨어난 거예요?!”
“망, 할.”
앞도 제대로 안 보이네, 하고 말하려던 애쉬였으니 갈라진 목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서령은 애쉬의 짧은 말을 듣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바로 의사를…!”
버튼을 누른 것도 모자라 병실 슬리퍼를 신은 서령이 급히 뛰어간다.
애쉬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 달라고 하려다 목소리를 낼 힘도 없어 그냥 몸을 눕혔다.
유성 그룹 테러 사건으로부터 20일.
그가 눈을 뜨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