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5. 후계경쟁 후일담(2)
* * *
“안 돼요!”
“아 글쎄, 내 몸은 내가 잘 안다니까!”
병상에 앉아 미음 따위만 먹길 이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서령의 표정에 배가 차지도 않는 것들만 억지로 먹어왔지만, 결국 참지 못한 애쉬가 병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식사도 그렇고, 입고 있는 환자복도 그렇고. 마음에 안 드는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이미 몸은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거의 멀쩡해진 것 같았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다, 계속 병상에만 붙어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것이다.
애쉬가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서령은 당연히 그것을 기겁하며 막았다.
“의사 선생님들이 못해도 일주일 정도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러셨다니까요!”
“아니, 봐. 내가 아직도 아파 보여?”
병상에서 일어선 애쉬가 입고 있던 환자복 상의를 휙 벗어던졌다. 그러자 전등 아래 그의 맨몸이 드러났다.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지난 20일 동안 흉터 하나 없이 회복된 몸과 건강한 혈색.
완벽하리만치 잘 잡힌 근육질의 맨몸은 환자라고 볼 수 없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환자는커녕 어딘가의 스포츠 잡지 모델인가 싶을 정도였지만, 서령은 그럼에도 고개를 저었다.
“수술할 때 혈액 팩이 몇 개가 들어간 지는 아세요? 온몸의 피를 다 남의 걸로 간 정도라구요!”
“그래서 20일이나 누워 있었잖아. 아니, 깨어나고도 이틀을 더 있었으니 22일이네.”
그 정도 쉬었으면 됐다. 애쉬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깨어났을 때 경악스런 얼굴로 쳐다보기나 하던 의사들이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알겠는가.
그의 몸이 가진 생명력은 일단 회복의 여지가 있기만 하면 자체 재생력만으로도 어중간한 부상은 회복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그런 그조차 완전히 사선을 밟고 있었을 정도였기에 수술로 한 고비 버틸 수 있도록 도운 건 고마웠으나,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애쉬는 자신의 뜻을 끝까지 밀어붙였고, 그에 못이긴 서령은 타협안을 내밀었다.
“그럼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있게 해드릴 테니까 병원에 며칠만 더 있어주세요, 부탁이에요….”
“이제 진짜 멀쩡하다니까.”
애쉬는 투덜거리면서도 서령의 간곡한 목소리에 그것을 단호히 끊어내지 못했다.
그녀만한 미인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자신을 위해 며칠만 더 지켜보자는데 그것을 어찌 매정하게 거절하겠는가.
“딱 3일만 더 지켜보고 멀쩡하면 바로 퇴원한다.”
“3일이요? 아무리 그래도 5일은….”
“아니면 그냥 지금 나가고.”
“아니, 아니에요. 그럼 3일이라도…….”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령.
그것을 본 애쉬는 마음이 또 약해질 뻔한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여기서 오랜 시간을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3일. 그게 그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렇게 서령과 협상을 마친 애쉬는 제대로 된 식사를 받으며 짧은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
상태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마친 뒤 재활 겸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재활 센터로 찾아간 애쉬는 초장부터 강화인간과 사이보그들을 위해 준비된 곳으로 향했고, 그런 그를 따라다니던 의사들은 다시 한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운동 능력이….”
“이건 학계에 발표되기라도 하면 엄청난 파문이 일겁니다….”
최소 수백 kg. 무거우면 톤 단위에 달하는 기구들을 가볍게 사용한다.
거기까진 일반적인 강화 인간, 혹은 사이보그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의사들은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이 강화 시술도, 그렇다고 사이보그 개조 수술도 받지 않은 순수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들이 직접 전신의 피를 갈고 찢어진 곳을 꿰매며 수술했었으니까.
겨우 22일 만에 죽음 직전까지 갔던 신체를 완벽히 회복한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순수 인간의 한계를 한참은 초월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
현재 애쉬를 따라다니고 있는 의사들은 최소 10년 이상씩 전문의 생활을 한 베테랑들이었으나, 그들에게도 이런 경우는 말 그대로 처음이었다.
“후우….”
철컹.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무게의 기구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재활 센터에서 십여 분 정도 몸을 푼 애쉬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그가 운동하는 것을 지켜보던 의사들이 그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와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곳이 있거나 하면 말씀해주십시오.”
“딱히 없어. 근데 너흰 할 일도 없냐?”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의사들을 바라보며 애쉬가 물었다.
서령이 업무를 위해 출근한 사이 껌딱지마냥 붙어있는 의사들. 그 숫자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이다.
아무래도 서령이 뭔가 언질을 준 것 같았는데, 거슬리기가 여간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애쉬의 물음에 의사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가한 건 아니지만….”
“아마 3일 정도는 이렇게 붙어있을 것 같습니다.”
병원에 인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애쉬에게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하나부터 열까지 유성 그룹에 의해 설립된 의료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애쉬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의사들은 학창시절 이전부터 유성 그룹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유성 의대에 진학하여 이곳까지 온 이들이었다.
가뜩이나 유성 그룹 회장의 손녀인 서령은 이곳에서 병원장보다도 한참은 높은 권력을 갖고 있었는데, 심지어 대부분 의사들의 출신조차 유성 그룹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런 병원에 소속된 이들 중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런 서령이 어떻게든 애쉬의 곁을 지키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했으니 형식상으로라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의사들의 사정을 들은 애쉬가 딱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돌아봤다.
“그쪽도 고생하네.”
“아닙니다. 잠깐 휴식을 갖는 셈 치는 거죠.”
정말 위급한 수술이 있으면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런 상황이 아니면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뜻.
서령도 그것을 허락했으니 지금은 쉬는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저희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뭐.”
신경 쓰지 말라는 의사들의 말에 애쉬는 곧 그들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서령과 약속한 것도 있었고, 괜히 도망쳐서 저들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럼 다음은 저쪽으로 가볼까.
의사들을 뒤에 매단 애쉬가 발걸음을 옮겼다.
몸을 점검하고 움직이는 일로 하루 정도는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었다.
*
“애쉬 씨!”
“어, 왔냐.”
놀란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발걸음. 애쉬는 침상에 누운 채 병문안 손님을 시큰둥하게 맞이했다.
서령과 함께 온 병문안 손님, 빌헬름과 베일라가 애쉬의 안색과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몸은 좀 괜찮으신 겁니까?”
“뭔 별 일이 있었다고.”
베일라의 물음에 애쉬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 쓰러지며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애쉬를 살피던 빌헬름이 안심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제 깨어나셨다길래 급하게 왔는데, 생각보다 더 멀쩡해 보이시네요.”
“시간이 그만큼이나 지났는데, 당연하지.”
“그게 당연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던 사람이 20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이제 깨어났는데,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게 당연하지는 않지 않은가.
애쉬와 오랫동안 알아왔고 몇 번이나 같이 일을 했던 빌헬름도 이번만큼 크게 다친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면 지난 걱정은 모두 괜한 일이었던 듯싶다.
“맞다, 그거 보셨어요?”
“뭘?”
서령의 말에 애쉬가 물었다.
그냥 그거라고만 말하면 그게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애쉬의 눈치를 읽은 서령이 빌헬름을 불러 말했다.
“아직 안 보신 것 같은데, 빌헬름 씨가 보여주실래요?”
“아, 그거요. 네.”
“그게 뭔데?”
“지금 보여드릴게요.”
빌헬름이 개인 병실 벽면에 다가가 단말기의 단자를 연결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조작하는 듯싶더니 벽면에 위치한 스크린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이번 유성 그룹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웃는 악마’라는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이…….]
애쉬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바깥에도 알려진 것인지 뉴스에 유진혁 회장의 저택에서 일어났던 학살극에 대한 소식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긴, 숨기기엔 규모가 너무 컸지.’
‘웃는 악마’의 테러 속에서 죽어나간 유성 그룹의 고위 이사급만 무려 수십이 넘는다. 아무리 유성 그룹이라고는 해도 완전히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한 규모.
그래서 유진혁 회장과 유성 그룹은 아예 외부에 정보를 어느 정도 공개하기로 한 듯 했다.
‘웃는 악마’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하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해서 이번에 유성 그룹이 큰 손실을 입었으며, 이로 인한 영향도 심상치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전문가 분을 모셔서…….]
[예. 거기에 대해서 설명드리자면…….]
아나운서의 말에 사회, 경제 쪽 전문가라는 남자가 나와서 얘기한다.
그냥 평소랑 똑같은 뉴스 아닌가?
애쉬 자신이 관여된 사건에 대한 뉴스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잡다한 소리에 애쉬가 흥미를 잃으려는 찰나, 빌헬름이 영상을 조작해 빨리 감았다.
“지루하신 것 같으니까 빨리 보여드릴게요. 음…. 여기였던가?”
“예, 아마 그쯤이었을 겁니다.”
빌헬름이 영상을 조작하고 베일라가 함께 확인한다. 서령은 분명 애쉬가 놀랄 것이라는 듯 즐거운 모습으로 병상에 걸텨앉은 채 영상이 재생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곧 빌헬름이 원하는 부분을 찾았는지 조작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뉴스 영상이 계속됐다.
[예,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해당 사건으로 인해 굉장히 유명해진 인물이 있죠?]
[네. 이른바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한 경호원입니다.]
“…뭐? 설마.”
영상 속 뉴스 패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애쉬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불길함을 느끼는 사이에도 영상 속 뉴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자세한 설명 전에 영상 보고 가시죠.]
뉴스 구석에 있던 작은 창이 화면 전체를 뒤덮으며 영상이 전환된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영상 속 주인공을 알아볼 수 없도록 잔뜩 블러 처리된 영상.
하지만 애쉬는 바로 영상 속 주인공을 알아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
모를 수가 없다. 블러 처리되긴 했어도 저런 은발에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이 더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해 뭐하겠는가.
뉴스에 나온 영상 속 주인공은 바로 애쉬 론모어, 그 자신이었다.
“오, 시작된다.”
빌헬름의 목소리와 함께 영상이 재생됐다.
그것은 유진혁 회장의 저택 내 CCTV에 찍힌 영상 같았는데, 영상 속 애쉬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도 힘든 속도로 움직이며 총탄을 피하고 적에게 다가갔다.
그 뒤에 적을 처치하는 장면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그 후의 결과를 알 수 있는 모습.
영상 창이 다시 축소되고 아나운서와 패널이 나타나 영상을 돌려보며 설명한다.
[여기를 보시면 사격음이 계속 울리고 있음에도 피격의 흔적이 없죠. 그건 곧 탄환을 피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저와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과 움직임입니다.]
[정말 놀라운 영상인데요, 한편으로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영상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전문가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여기서 처음 본 게 아니라 미리 확인을 해봤습니다만, 영상에 조작의 흔적은 없었으며…….]
영상을 슬로우 모션으로 돌려보며 평가하는 패널과 감탄하며 묻는 아나운서.
애쉬는 그것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 거대 도시, 웨인 시의 뉴스는 야심한 새벽만 아니라면 못해도 수십에서 수백만 이상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 곳에 바로 그의 영상이 올라가다니,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라 할 말이 없었다.
“…….”
서령이 그런 애쉬의 반응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풋, 유명인이 된 기분이 어때요, 애쉬?”
“…아주 좋네, 그래.”
애쉬가 웃음기 가득한 서령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너무 좋아서 저것을 저기에 제보한 인간을 때려눕히고 싶을 정도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