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5. 후계경쟁 후일담(4)
* * *
“애쉬, 이거요.”
“응?”
애쉬가 퇴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마침내 모든 일의 종지부를 찍을 날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여느 때와 같이 적당히 챙겨 입고 나가려던 애쉬는 서령의 손길에 붙잡히고 말았다.
애쉬는 서령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인상 썼다.
“이걸 또 입으라고?”
그녀가 내민 것은 한 벌의 정장이었다.
이전 유진혁 회장의 축하연때 입었던 옷은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려 치웠는데, 이번에 서령이 새로 하나 더 사온 것.
애쉬는 그것을 보고 명백히 싫다는 느낌을 드러냈지만, 서령은 그런 애쉬의 태도에 아랑곳 않고 말했다.
“어차피 마지막이잖아요.”
이렇게 정장을 입는 것도, 그리고 서령 자신과 이렇게 함께 하는 것도.
그녀가 유진혁 회장의 후계로서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면 온갖 교육과 업무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었고, 반대로 되지 못하더라도 유배 비슷하게 도시 외부 지사로 전출을 나갈 가능성이 컸다.
이번 일이 끝나면 결과가 어떻든 서령은 한동안은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분명 서령의 목소리는 밝았으나 분위기가 침울한 이유가 있었다.
애쉬도 그것을 이해했기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부탁이에요.”
“…그래, 뭐. 마지막이니까.”
정장을 받아든 애쉬가 방으로 향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위 단추가 몇 개 풀려 있는 셔츠와 그 위에 걸쳐진 재킷.
서령은 유진혁 회장의 생일 축하연에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넥타이를 손에 들고 나온 애쉬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넥타이 이리 주세요, 매드릴게요.”
“아, 어.”
자연스럽게 애쉬의 손에서 넥타이를 빼간 서령은 애쉬에게 붙어 풀려있던 위 단추를 잠군 뒤 천천히 넥타이를 손질했다.
“…….”
조용하지만 어색하지는 않은 적막 속 서령과 애쉬는 아무런 말없이 이 순간에 집중했다.
양측 모두 이제 진짜 마지막이 가깝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가볍게 보이게 한다는 것을 둘 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다 됐다, 그럼 갈까요?”
“그래.”
발걸음을 옮겨 베일라와 빌헬름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애쉬와 서령은 그렇게 차로 향하면서도, 차에 타 목적지로 향하면서도 잡다한 얘기 따위로 입을 열지는 않았고, 일행은 그렇게 가라앉아 침착한 분위기로 유진혁 회장과의 약속이 잡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
“여길 이렇게 빨리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베일라의 말에 빌헬름이 대꾸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유장혁 부회장의 저택이었다. 넓고 잘 관리된 정원이 인상적이던 그곳.
유진혁 회장의 저택은 아직 복구 중에 있었고, 유장혁 부회장은 테러로 인해 사망했기에 이 저택에는 유진혁 회장이 잠시 머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께서는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의 남자, 유진혁 회장의 비서 중 하나가 일행을 안내했다.
그렇게 그들은 잠시 저택 내를 걸었고, 곧 유진혁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안쪽에 기별을 넣은 비서가 문을 연다. 철컥,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유진혁 회장의 목소리도.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회장님.”
“들어 오거라.”
수십 명이 들어가도 여유 공간이 있을 정도로 넓은 실내. 그 중심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유진혁 회장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으나 그 분위기는 어쩐지 조금 풀려있는 것도 같았다.
일행을 안내한 비서는 유진혁 회장에게 고개 숙여 보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는 뒤에 오실 분들을 모시러 가보겠습니다.”
일행을 안내한 비서가 물러가고, 방 안에는 이제 서령 일행과 유진혁 회장, 그리고 유진혁 회장의 몇몇 비서들만이 남았다.
탁.
“유서령.”
차라도 마시고 있었는지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내려놓은 유진혁 회장은 애쉬나 서령의 다른 일행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서령을 불렀다.
평소에 서령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부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투와 목소리.
애쉬와 다른 일행들이 있기 때문에 변한 것이 아니다. 저것이 원래 유진혁 회장의 모습이었을 뿐.
서령은 그 딱딱한 부름에 마주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네, 회장님.”
“왜 회장이 되고 싶으냐.”
유진혁 회장이 물었다.
그에 대답을 위해 반사적으로 입을 연 서령이었지만, 그녀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건.”
그녀가 유성 그룹의 정점에 오르기로 결심한 이유. 그건 하나였다.
‘복수’.
그녀의 조부, 유진혁 회장과 자신의 핏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하지만 아직까지 그 생각은 여전한가?
누군가 묻는다면 서령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응어리진 감정은 풀리지 않았으니까.
다만 지금은 그 분노와 복수심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당시 느꼈던 그 분노보다도 다른 감정들의 비중이 더욱 커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아직 회장이 되고 싶은 걸까?’
서령이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지난 몇 달간 계속된 후계 경쟁을 돌아보았다.
계속된 경쟁자들의 공격과 그녀의 반격.
그 와중에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이 컸다.
그녀의 일상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으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동료도 잃었다.
권력자의 길에 한층 더 가까워졌으나 서령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잃고 만 것이다.
너무도 무력하게.
‘그래. 내가 회장이 되고 싶은 이유를 알 것 같아.’
서령은 더 이상 무언가를 잃기 싫었다.
빼앗기기 싫었다.
더 이상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이유였다. 그녀의 삶의 대부분이었던 것들을 잃고도 계속 노력하고 있는 이유.
“전…….”
어쩌면 유진혁 회장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질문이었지만 서령은 그런 자신의 진심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유진혁 회장은 조용히 그런 서령의 얘기를 들었고, 얘기가 끝날 때쯤 짧게 그녀를 평가했다.
“너는 아직도 너무 무르구나.”
“…그런가요.”
결코 좋은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여기서 점수를 까먹은 것일 수도 있긴 했지만 서령은 자신의 진심을 얘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덕분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럼 이만 가보거라.”
유진혁 회장은 서령을 앞에 두고 그녀를 이곳까지 부른 용건은 끝났다는 듯 말했다.
아직 서령의 경쟁자인 쌍둥이는 도착도 하지 않았으나 자리를 끝내는 것을 보면 완전히 마음이 떠난 것인가.
드르륵.
의자 발 끌리는 소리. 서령은 유진혁 회장의 축객령에 시원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가 어떻든 그에 승복할 뿐이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떠나려는 찰나, 들려온 애쉬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잠깐. 가기 전에 여기 영감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애쉬 씨….”
여전히 불손한 말투로 유진혁 회장을 영감이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금세 방 안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베일라와 빌헬름은 그런 애쉬를 말리려는 듯 불안한 눈으로 그를 불렀고, 서령도 애쉬를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애쉬의 질문을 먼저 승낙한 것은 유진혁 회장이었다.
“뭐가 궁금한가.”
한번 말해보라는 듯 묻는 유진혁 회장.
그는 이번 축하연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애쉬에게 빚을 졌다면 진 것이 있었기에 와중에도 그나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애쉬가 다음에 물은 것은 유진혁 회장의 호의 어린 태도를 깨부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감, 혹시 ‘회사’나 ‘웃는 악마’랑 연결 돼 있는 사이야?”
“…네?”
질문을 들은 유진혁 회장이 아니라 애쉬의 옆에 있던 빌헬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상대방은 유성 그룹의 회장이었으며,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들 중 하나였다.
자식인 유장혁 부회장이 죽었으며, 테러 한번으로 유성 그룹의 주식 가치가 눈에 띄게 떨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회사가 돌아가는데 있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만큼 언젠가는 복구될 것이긴 했지만 누가 봐도 피해자인 유진혁 회장에게 저런 질문이라니.
이것은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넘어 대놓고 싸우자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쉬 씨. 어서 사과를…!”
빌헬름 뿐 아니라 뒤늦게 반응한 베일라도 화들짝 놀라 애쉬에게 말했다. 그를 질책한다기보다는 혹여나 유진혁 회장의 분을 살까 걱정되어 말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쉬는 말을 바꾸지 않고 정면으로 뚫고 나갔다.
“아니, 이상한 게 한둘이어야지.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애쉬는 당장 생각하더라도 의심되는 요소들을 다섯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몸을 사리던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이번 축하연 테러 사건의 최전선에서 움직인 그였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 있었기에.
“어디서 그런 의심을 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과 관계가 없다.”
유진혁 회장은 언제나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으로 애쉬의 의혹을 부정했다.
그 무기질적인 표정에 짐승보다도 감이 뛰어난 애쉬도 제대로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
잠시 의심 된다는 듯 유진혁 회장의 눈을 들여다보던 애쉬였으나, 결국 먼저 물러선 것도 그였다.
“…아니면 말고.”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고 당장 유진혁 회장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묻는 말에 진실만으로 가득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안했다.
그저 상대방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다.
‘설마하니 이 영감도 안드로이드는 아니겠지.’
연방법에 의해 철저히 금지된 휴머노이드의 생산이었지만, 그것을 과감하게 어긴 이가 유진혁 회장이었던 데다 딱딱한 반응에서도 그 어떤 인간성을 찾을 수가 없어 괜히 웃기지도 않은 의심까지 들었다.
그렇게 물러선 애쉬가 자신의 뒤편에 붙자 서령은 유진혁 회장에게 짧게 사과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제 경호원의 말에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하신대로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철컥.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혁 회장의 모습이 문틈 사이로 사라진다.
방에서 나온 애쉬와 서령 일행은 복도를 따라 저택 바깥으로 나왔고, 곧 주차해둔 차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진짜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떻게 거기서….”
“…저도 마찬가집니다. 혹시라도 그런 말 때문에 이사님께 악영향이 있으면 어쩔지.”
“뭐, 벌써 마음은 정한 것 같던데. 안 그래, 아가씨?”
빌헬름과 베일라의 말을 듣던 애쉬가 서령에게 물었다. 그에 조금 후련한 표정의 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를 먼저 물리신 것만 봐도…. 그래도 마음은 편하네요.”
자신이 후계가 되지 못할 것을 직감한 서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모든 것을 잃고, 그녀가 얻은 것이라곤 개인의 안전뿐이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지만, 그것이 유진혁 회장의 결정이라면 불복할 수는 없다. 유성 그룹에서 유진혁 회장의 말은 곧 법이었으니까.
아무리 지지자를 모은 그녀라고 해도 진짜 왕에겐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조만간 술자리나 한번 가질까요? 비싼 술이나 잔뜩 마셔 봐요, 우리.”
“좋지.”
애써 기운 내려는 티가 나는 서령의 목소리에 애쉬가 대답했다.
지나간 일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이다. 신이 아닌 이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모든 것을 걸고도 실패하는 결과는 인생에서 얼마든지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에 뒤따르는 상실감을 어떻게 견뎌내느냐 하는 것.
“흑, 으아아앙! 미안해요, 에아임…! 미안, 미안해요,모두들…….”
괜찮은 척 집으로 돌아온 서령은 끝내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 있음에도 실패했다는 분함에 홀로 남은 자신의 방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애쉬와 베일라, 빌헬름은 그런 그녀를 위로조차 하지 못한 채 문 밖에서 그녀의 감정이 풀리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며칠 뒤.
유진혁 회장은 그룹의 모든 고위 이사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선언했다.
“나는 앞으로 3년 뒤 정식으로 은퇴할 것이며, 후계로 내정한 자는…….”
유서령 상임이사다.
"아, 아아아…!"
그것은 서령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발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