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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32화 (132/230)

〈 132화 〉 5. 후계경쟁­ 후일담(5)

* * *

“…괜찮으십니까?”

회의실 밖. 베일라가 눈시울이 붉어진 서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서령은 유진혁 회장의 발표가 있은 직후 소리 없이 오열했다. 기쁨과 안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이들에 대한 애도.

그 모든 감정이 한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고마워요, 베일라.”

서령은 그런 베일라의 호의를 받아 아직까지 맺혀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감정은 무너진 댐처럼 그 안에 가두고 있던 것들을 더 이상 막지 못했고, 쏟아진 감정의 폭포는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서령뿐 아니라 유진혁 회장을 비롯, 수많은 이사들이 있는 회의실이 아니었다면 소리 없는 오열 정도가 아니라 아주 통곡을 했을지도 몰랐다.

“아주 울보가 따로 없어. 전에도 그렇게 울더니.”

“애쉬 씨.”

배려심 없게도 며칠 전, 유진혁 회장과 만난 뒤 돌아와 울던 서령을 언급하는 애쉬와 그런 그를 불러 말리는 베일라.

하지만 서령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애쉬의 짓궂은 농담을 작은 미소로 넘길 수 있었다.

전처럼 빈말이 아니라 지금은 정말로 후련해진 기분이다.

“괜찮아요.”

“그럼 오늘 저녁에 전에 말했던 술자리나 가질까?”

애쉬가 서령에게 물었다.

얘기가 나온 뒤 며칠 동안은 억지로 술자리를 만들더라도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에 술 한 잔 하지 않는다면 언제 한단 말인가.

“좋아요.”

그런 그의 생각에 서령도 동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굳이 애쉬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곧 자리를 한번 만들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 이런 경사가 있으니 딱 날이 적당해보였다.

“그럼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준비해볼까요?”

언제 울었냐는 듯 이제는 기운차게 말하는 서령.

그에 애쉬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그럼 미리 비서들에게도 말해둬야겠군요.”

“네, 그건 제가 할게요. 베일라는 애쉬 씨랑 같이 술이라도 골라주세요.”

“술 말입니까? 저도 음주를 즐기지 않아서 잘….”

“그럼 술은 내가 고를 테니까 들기나 해, 아줌마.”

“…아줌마라고 하지 마십시오.”

서령과 애쉬, 그리고 베일라는 회사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저녁에 있을 작은 파티를 구상했고, 그 날의 오후 업무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

*

업무가 끝난 뒤 식재료와 술을 사온 저녁, 서령의 집.

그곳의 입주자들은 서령의 진두지휘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거기 고기 좀 뒤집어주세요.”

“예.”

“애쉬는 과일 손질 좀 해주시구요.”

“오케이.”

“저는 뭘 하면 될까요?”

“빌헬름 씨는… 아! 주방 뒤처리 좀 해주실래요?”

“네!”

다들 바쁘게 움직여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꾸며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실 꾸민다고 하기도 뭐한 게, 한 것이라곤 테이블에 테이블보를 깔고, 초를 몇 개 갖다 놓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실내의 불을 끈 뒤 야경이 보이는 창을 배경으로 몇 개의 초를 켜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살아났다.

과도 하나로 온갖 과일들을 완벽히 손질한 애쉬와 준비된 음식을 들고 온 이들이 테이블 위를 조금씩 채운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오….”

“여기에 음악만 작게 틀어놓으면 진짜 영화 속 한 장면인데요?”

“별로 한 건 없는데 상상이상으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배경도 워낙에 좋았고, 인테리어도 모던하게 잘 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령의 집 거실은 빌헬름의 말대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나 나오는, 주인공과 히로인이 사랑을 나누어야 할 것만 같은 자리가 되어 있었다.

각자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은 애쉬와 서령, 빌헬름과 베일라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원래였다면 이곳에 있었어야 할 한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졌지만, 그로 인해 우울한 분위기가 되어선 안 된다.

지금 이 자리는 웃고 즐기고 취하며 지나간 슬픔을 잊기 위한 자리였으니까.

“그럼 한 잔씩 받아, 아가씨부터.”

“네.”

술병을 든 애쉬가 먼저 서령의 잔에 술은 한 잔 따랐다. 빛깔 좋은 술이 잔 가득 차오르고, 바로 애쉬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은 서령이 다른 이들의 잔을 채웠다.

“그동안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애쉬도, 베일라도, 빌헬름 씨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대가를 받았으니 할 일은 해야죠.”

진심을 담아 전해지는 서령의 감사 인사에 무뚝뚝한 베일라와 빌헬름이 비슷하게 반응한다.

애쉬는 그런 셋의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유서령의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건배.”

““건배.””

짠, 한데 모인 잔이 맑은 소리와 함께 부딪히고 곧 더해진 잔잔한 음악 소리와 함께 술자리의 시간은 흘러갔다.

“근데 진짜 죽으시는 줄 알았다니까요? 대체 그때 어떻게 된 거예요?”

술자리가 계속되고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눈이 살짝 풀린 빌헬름의 질문. 닭 요리를 뜯고 있던 애쉬는 거기에 대충 대답했다.

“어떻게 되긴. 귀찮은 거 하나 만나서 고생한 거지. 나라고 그딴 게 나올 줄 알았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그들의 현재 주제는 유진혁 회장의 축하연 테러 사건 당시 통제실 앞을 지키던 애쉬에 관한 얘기였다.

처음에는 그 사건에 관한 얘기를 슬슬 피했지만, 술기운이 좀 오른 빌헬름의 질문은 다른 서령의 호기심까지 자극했는지 그녀도 애쉬 쪽에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베일라도 당시 급박한 상황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인지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이렇게 다른 셋의 신경이 집중되자 빼는 것도 좀 그랬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렇게 쳐다보지 마. 말해줄 테니까.”

“와!”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의자를 당겨 앉는 베일라, 그리고 기대된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서령과 빌헬름.

애쉬가 입을 열어 얘기를 시작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 처음에는…….”

*

“으으….”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빌헬름.

평소에도 말이 많지 않은 베일라는 그보다 더 말수가 적어져선 뭔가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 건지 모를 자세로 앉아 있다.

서령은 그 둘만큼 술을 많이 먹지 않아서 비교적 괜찮아보였지만, 그럼에도 제법 취한 듯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휘청하는 게 보였다.

애쉬는 혼자 멀쩡한 상태로 서령이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아. 고마워요, 애쉬.”

“정리는 내일 해. 하룻밤 정도 그냥 둔다고 썩는 것도 아니니까.”

“그럴까요…?”

“가서 쉬어.”

이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의 대부분은 서령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잘 먹었으면 정리 정도는 먹은 사람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서령이 방으로 들어가자 애쉬는 다음 날 정리 정도는 하자고 생각하며 자신이 깎은 과일을 하나 입에 던져 넣었다.

깎아놓은 지 두어 시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아삭아삭 씹히는 게 맛이 괜찮다.

그렇게 홀로 과일 안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잠시.

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령이 방에서 나왔다.

아직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어디를 나가려는 듯 겉에는 외출복을 걸친 상태였다.

“어디 가려고?”

“네. 여기 앞에 바람이라도 쐬러 가려는데, 같이 갈래요?”

“그럼, 당연히 같이 가야지.”

이제 모든 일이 끝났고, 마지막이 가깝다곤 하나 아직 그는 경호원이었다. 혹여나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따라가는 게 당연했다.

애쉬는 여전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빌헬름과 완전히 눈을 감고 잠든 것 같은 베일라를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 일도 아닌데 굳이 베일라까지 깨울 필요는 없겠지.

“가요.”

“그래.”

서령의 부름에 대답한 애쉬는 발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나섰다.

“이런 시간에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런가?”

“네. 전에 일이 한번 있던 이후로는 늦은 시간에 움직이는 걸 피했잖아요.”

“아, 그랬지.”

서령의 말에 애쉬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답했다.

처음 유선혁 사장의 수하들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던 것도 대충 이 정도 되는 시각이었고, 그 뒤로는 늦은 시간까지 바깥에 나가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랜만에 나와도 밤거리는 여전하네요.”

서령이 여전히 시끌시끌한 도심의 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제법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도심의 활기는 여전했다. 형형색색의 홀로그램 전광판은 물론이고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낮 못지않게 많았다.

이곳 1구역이 아무리 부자 동네라도 이런 번화가로 나오면 술에 취한 취객은 있었고, 그런 이들 때문에 오히려 낮보다 더 시끄러운 느낌도 있다.

애쉬는 그런 소란을 피해 자리를 옮기길 제안했다.

“근처에 공원도 있던데, 그쪽으로 가자.”

“그럴까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서령이 장소를 알고 있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애쉬는 그녀에게 붙여 함께 움직였다.

나아갈 때마다 천천히 소란의 중심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걷자 도시 중심에 조성해둔 푸르른 공원이 나타났고, 애쉬와 서령은 곧장 공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어둑어둑한 조명으로 중심의 길과 그 주변의 풀숲을 비추고 있는 공원은 동화 속 비밀의 길을 걷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

번화가를 벗어나며 급격히 말수가 적어진 서령은 공원에 와서도 별다른 말을 않고 걷기만 할 뿐이었다.

애쉬는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겉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로 보아 썩 유쾌한 것은 아닐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그는 분위기 환기도 할 겸,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서령에게 가볍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조용해? 졸리면 업어줄까?”

“…애쉬.”

“응, 왜.”

“앞으로도 같이 있어주면 안될까요?”

“…….”

이번에는 가볍게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애쉬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마지막이 가깝긴 하다.

처음 의뢰 기간은 분명 후계 경쟁이 끝날 때까지라고 명시했었으니 정확히는 오늘 서령이 회의장에서 나왔을 때 그것이 끝난 것이다.

억지로 늘리려고 한다면야 그럴 수야 있겠지만…….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장난기를 버리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애쉬는 곧 서령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

서령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미인이었고, 좋은 상사였으며, 또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 누구보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아직 어디 한 곳에 묶일 수 없었다. 저 바깥에 아직 버리지 못한 커다란 미련이 남아 있었으니까.

서령은 그런 애쉬의 대답에 뚝 멈춰 서서는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다 그를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아하하, 역시 곤란하겠죠? 애쉬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서늘한 밤바람 때문인지 꽃잎처럼 붉게 물든 뺨에 빗방울이 한 방울 흐른다.

하지만 서령은 그것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담담한 척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 사실 애쉬가 좋아요. 이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당신을 어떻게든 억지로 붙잡아 놓고 싶을 정도로 좋아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죠? 그건 정말 나쁜 짓이니까….”

서령의 고개가 떨궈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툭, 투둑. 바닥에 떨어진다.

애쉬는 그런 그녀를 보고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도, 지구에서도 누군가에게 이런 진심어린 고백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누군가가 진실된 감정을 전력으로 부딪혀온다는 것.

그것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한참은 무거워서 애쉬조차 똑바로 받아내기가 버거웠다.

하지만 서령은 그런 애쉬의 곤란함을 알았는지 소매를 들어 눈가를 닦고는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그러니까, 그냥 보내줄게요. 마지막까지 애쉬의 안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나는.”

만일 붙잡으려 했더라도 널 나쁘게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애쉬였으나, 서령은 그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애쉬를 잡아놓는 나쁜 짓은 못해도, 작은 일탈 정도는 괜찮잖아요?”

어느새 눈물을 다 닦아낸 서령이 풀숲을 등지고 요정처럼 신비한 분위기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하룻밤의 장난에 어울려주세요.

그게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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